여름에 있었다.

05. 간조

제천독자

제천독자 by 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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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천에게 김독자는 처음 본 순간부터 지독하게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저기! 저기요, 저 진짜 도믿맨, 막 이런 거 아니고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와, 개 잘생겼어.

…네?

네? 아니, 아니! 아니 잠시만요.

무슨…?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고, 그냥, 그냥. 이거… …이거 제 번호거든요? 기다려도 될까요? 아니야, 기다릴게요.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 꼭 좋은 하루 되세요!

 

저 할 말만 끝내면 단가. 왈칵 사랑스러움을 쏟아내고선 황급히 자리를 떴던 첫 만남을 손제천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김독자조차 기억하지 못할 단어 하나, 공기 한 점까지, 뼈에 새긴 것처럼.

 

사실 번호 주면서도 연락 안 올 줄 알았어요.

네? 왜요?

솔직히 좀, 이상한 사람 같지 않았어요?

부정은 못 하겠는데.

이럴 땐 아니라고 해줘야죠.

 

샐쭉하게 저를 흘겨보는 얼굴이 좋아서 자꾸 놀렸다가 결국 김독자가 크게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니까 좋아요? 손제천은 너무 놀라서 딸꾹질을 크게 했고, 멍청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김독자가 크게 웃었다. 곧장 정색하더니 화도 못 내게 한다면서 또 성질을 냈다.

 

근데 독자씨 정도면 번호 받으려고 사람들이 줄 서있지 않아요?

네? 에이, 제가 무슨…

 

진심으로 손사래를 치는 김독자를 보며 할 말이 많았지만, 꿀꺽 삼켰다. 나야 땡큐지. 자기 객관화가 안 된 덕분에 어떤 바보를 어떤 얌생이가 홀라당 채갈 수 있었다는 걸 어떤 바보는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듣고 웃지 마세요?

일단 말해보라니까요.

며, 멸망한 세계에서… 아 진짜, 안 웃는다면서요?

안 웃었는데요? 제가 언제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주실래요?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뭐냐는 질문에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결국 솔직하게 털어놨다. 아주 오래도록 봐 온 웹소설이 있다고. 제목을 묻자 이리저리 말을 돌리더니 끝내 졌다는 듯 답해주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고 말았는데, 너는 아직도 그 웃음을 오해하고 있을까 조금은 걱정이 됐다.

 

좋아해, 김독자.

… …어?

귀여운 표정 뭐지? 진짜 몰랐다고? 지금 좀… …너 우, 울어? 잠시만, 잠깐만. 독자야 잠시만…

 

좋아한다고 고백한 순간, 네가 보여줬던 몇 방울의 눈물과 환한 웃음에 내리쬐던 태양을…… 아마 그건 평생토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울렁거려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누군가 머리를 붙잡고 마구잡이로 흔드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손제천은 이런 게 사랑이라면 절대 여러 번은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고작 하루 두 번 있는 면회를 손제천은 한 달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얼굴을 비췄다. 익숙해지기 싫은 공간에 가장 편안히 누워있는 김독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곁에 의자를 끌어와 앉고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을 조물락거렸다.

 

“있잖아, 네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아.”

 

한 달 삼십 일. 무슨 정신으로 흘려보냈는지 알 수 없는 하루하루를 모조리 김독자를 곱씹는 데 썼다. 그 추억은 가끔 이수경에게 전해지기도 하고, 가끔은 김독자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독자 너 그건 기억 못 하지? 우리 바다에 갔을 때 말이야… …아이참, 3주년 때 간 거. 역시 기억 못 할 줄 알았다, 뭐. 짧은 면회 시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면 겨우 기억 하나에 담긴 사랑을 얘기할 수 있었다.

 

“너와 함께했던 순간마다 느꼈던 많은 감정이 있어.”

 

속으로만 혼자 곱씹어서 미안해. 손제천의 눈에 서서히 습기가 찼다. 쌩긋 웃으며 김독자의 거칠어진 손끝을 문질렀다. 그러니까, 독자야.

 

“…내 왕자님, 이제 제발 눈 좀 떠주라.”

 

김독자가 꼭 마녀의 저주를 받고 잠들어버린 왕자님처럼 느껴졌다.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든 건지, 어떤 게 그렇게 괴롭히는지. 종알종알 일러준다면 손제천이 전부 다 때려 눕혀줄 텐데.

 

아무래도 첫 수술 회복이 거의 안 된 상태로 재수술에 들어갔으니까요. 환자분 의지가 강하다고 해도, 상황적으로 다시 의식을 차리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코마 상태가 지속되면……

 

의사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수경도, 손제천도 본능적으로 어떤 말이 올지 알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계속해서 그를 옥죄었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소리를 질러 봐도 도무지 갑갑한 심정이 해소가 안 됐다.

 

“독자야.”

 

분명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도 손제천은 김독자의 입이 벙긋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제천아. 꼭 그렇게 대답해준 것만 같았다.

 

“나 안 보고 싶어?”

 

아까 전부터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눈물방울이 기어코 김독자의 마른 손등 위로 툭 떨어진다.

 

“나는, 나는 너무 보고 싶어. 너랑 같이 이렇게 있는데, 그런데도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 …제, 천아. 왜 우, 우, 울고 있, 어…”

 

쩍쩍 갈라지고 볼품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세게 때린다. 퍼뜩 고개를 들자,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토록 그리웠던 그의……

 

“독, 자야.”

“내…내가, 아, 안죽는, 다고…했, 잖…”

 

김독자는 지쳐 보였다. 말 한마디 채 끝내지 못하고 세게 기침을 토했다. 애초부터 우는 연인을 달래기 위해 억지로 목을 긁어서 낸 소리였으니까. 손제천이 펄떡이는 김독자의 어깨를 세게 잡아 누르며 너스콜을 여러 번 눌렀다. 안 돼, 독자야. 호흡해. 천천히 숨 쉬어. 김독자의 여윈 팔이 덜덜 떨리다 조금씩 멎는다. 손제천의 눈동자에서 퐁퐁 눈물이 쏟아진다.

 

“보고 싶었어.”

“…”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독자야.”

 

연습했던 환한 웃음이 제대로 네 눈에 비치고 있을까. 가늘고 결이 좋던 까만 머리칼도 하나 없는데, 선이 얇던 얼굴이 반쪽이 다 되어 아무리 에둘러 표현하더라도 볼품없는 이 못난 모습조차 어찌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지. 손제천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네가 있을 곳으로 돌아와 줘서 기뻐. 정말로 기뻐, 독자야.

 

“잠시 비켜주세요!”

“환자분, 정신이 들어요?”

“뇌압 측정해!”

 

들이닥친 의료진들이 손제천을 뒤로 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제천은 김독자만 봤다. 손을 아무리 쥐어도 불안하기만 하던 아까와 달리 멀찍이서 바라만 보는데도 마음이 충만했다. 어느새 다가온 이수경이 입을 틀어막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는 이수경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다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중얼거린다.

 

“…제천아, 인사가 너무 늦었지만… …정말로 고맙다. 네가 없었으면 버틸 수 없었을 거야.”

“저도요. 저도 어머니가 계셔서 다행이에요.”

 

저 멀리, 김독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렸다. 손제천에게는 천금보다 더 귀한 미소였다.

 

 

***

 

 

“…시, 싫어.”

“그럼 날짜는 언… 독자야, 뭐라고?”

“시, 시, 싫다, 고.”

 

침대에 몸을 기대서 간신히 앉은 김독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힘겹게 고개까지 저었다. 의사와 얘기를 나누고 온 이수경이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들은 말이었다. 손제천은 눈을 크게 떴다. 이수경이 나가 있는 동안 김독자에게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얼마나 중요한 수술인지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이건 당연히 받아야 하는 수술이었으니까.

 

“손제, 천한테. 다, 다 들었, 어. 그, 그, 근데…이제, 수, 수, 수술…… 아, 안 하고, 싶어.”

“…독자야.”

“또 수, 술 하면…그, 그때는 어, 어, 언제 누, 눈을 뜰지도 모, 모르겠, 고. 그, 그러니까,”

“김독자!”

 

손제천이 언성을 높이며 벌떡 일어났다. 눈이 시뻘게져서 소릴 질렀다. 김독자도 질세라 손제천을 노려봤다. 단호한 의지가 느껴져서 속이 문드러졌다. 자신이 너무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이수경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푹 떨궜다.

 

“왜, 왜 그런 말을 해. 김독자, 너 왜…, 왜 그렇게 말을 하냐고.”

 

울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김독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런데 꼭 바보가 된 것처럼. 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병신이 다 돼서. 참았던 분노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겨우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네, 가. 뭐, 뭘 알아. 아, 아, 알기나…해? 내가, 내, 내가…얼마나 무, 무, 무서웠는, 지…, 아, 알아?”

 

말문이 턱 막혔다. 김독자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쏘아붙였다. 비틀린 입술 새로 말이 줄줄 새 나왔다.

 

“누, 눈만 감, 았다가 떠, 떴는데, 하, 하, 한 달이나 지, 났대. 나, 나아진, 것도, 모, 모르겠어. 혀, 혓바닥은 더 두, 둔해지고 벼, 벼, 병신처럼 마, 말이나 계, 속, 더듬고…”

“김독자!!”

“내, 내가 헤, 어지자고, 해, 했잖아. 왜!!!”

 

고함을 지르면서 제 옆에 놓인 베개를 힘없이 던진다. 멀리 가지도 못했다. 손제천의 발치도 오지 못하고 툭 떨어진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도 김독자의 앙상한 팔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있었다.

 

“왜, 왜…, 기, 기다리, 고 지, 지랄이야. 어, 어차, 피 주, 주, 죽을…건데, 왜, 같이 겨, 겨, 견뎌 준다고, 씨발……”

 

그러다 김독자가 울컥 허리를 꺾으며 물을 토해냈다. 전신을 퍼들퍼들 떨었다.

 

“독자야!!!”

 

마냥 흐느끼기만 하던 이수경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김독자에게 달려갔다. 대꼬챙이처럼 마른 팔에 주삿바늘이 빠져나가 흰 시트가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콜을 눌렀다. 손제천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서 멍하니 이 현실감 없는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심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씩씩대며 끝까지 손제천을 노려보던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잘 안 보인단 말이야. 안 그래도 네 목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뿌연 눈물이 앞을 가리고 귀에는 이명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김독자가 꺽꺽대기 시작했다. 기이하게 비틀리는 팔다리가 역겨웠다. 자신의 한심함이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지러워, 싫어. 그런 와중에도 억지로 고갤 들어 손제천을 본다. 고개를 돌리고 있길 바랐다. 병실을 뛰쳐나갔길 바랐다. 하지만 적기에 도착한 의료진들이 손제천을 밀치고 김독자에게 다가오는 순간까지도, 언제나 그 눈동자는…

 

…제, 천아.

이럴 줄 알았어. 김독자 지금 나한테 좀 미안하지? 심하게 말한 것 같아서 엄청 미안해 죽겠지?

아, 진짜…쫌……

제천이는 다 알지. 울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눈빛만 봐도 다 알지롱.

웃기시네, 거짓말이 점점 능숙해진다 너?

거짓말 아닌지 나중에 시험해보던가.

…아 하여튼, 진짜로 미안해.

알아, 어떤 마음으로 왜 그렇게 말했는지도 다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있잖아, 나 집에 가고 싶어. 너와 내가 살던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제천아.

 

“제 말 들리십니까? 환자분!! 정신 차리세요!! 야, 뭐해! 안 붙잡고!!”

“진정제 투여합니다!”

“산소통 가져와!!”

 

네가 안 보여, 눈앞이 새까매. 제천아, 손제천. 너는 다 안다고 했잖아, 내 마음 다… …

 

“아아아아악!!!”

“안 잡고 뭐 하는 거야!! 꽉 잡으라고!!”

 

순식간에 펼쳐진 난장이었다. 끄륵끄륵 게거품을 물며 발작하는 김독자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런데도 손제천은 그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확신했다. 입을 틀어막고 치밀어오르는 역한 기분을 간신히 참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아주고 달래주고 싶었다. 그럴 수 없는 현실의 괴리가 그의 속을 엉망으로 헤집는다. 슬프고 아팠다. 억울하고 비참했다. 그가 허리를 꺾고 온 바닥을 눈물로 적실 동안 의료진들이 간신히 김독자를 진정시켰다. 약에 취한 김독자의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다. 담담의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딱딱한 얼굴로 다가왔다.

 

“절대 안정입니다. 환자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측두엽 쪽 손상이 있는 환자들은 대체로 감정조절이 많이 힘들어요. 오늘처럼 쉽게 흥분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띠게 됩니다. 게다가 뇌압이 크게 오르면 순식간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릅니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다음에도 이럴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네, 네… …감사합니다.”

“수술 건은 최대한 잘 설득해서 얘기 나눠 보세요. 늦을수록 좋은 게 없으니까.”

 

폭풍과도 같았던 순간이 지나갔다. 우르르 사람이 빠져나간 병실에 시곗바늘이 채칵커리는 소리만 유독 크게 들렸다.

 

“…죄송해요.”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우리도 독자 깨기 전에, 조금이라도 쉬자. 너도 앉아, 응?”

“……네.”

 

선채로 기절한 것처럼 잔뜩 굳어 있는 손제천을 가볍게 두드린다. 천천히 김독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온몸이 땀에 전 채 곤히 잠든 김독자를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주고, 손발을 조금씩 주물러주며 편히 쉴 수 있도록 자세를 바로 해 줬다. 도톰한 이불을 끌어 올려 꼼꼼히 덮어줬다. 보조 의자에 털썩 앉아 김독자의 가슴팍을 일정한 속도로 토닥였다. 천천히 입을 연다.

 

“…나는, 몰랐어.”

“…”

“내 배로 낳은 내 새끼가, 눈을 떴을 때 느꼈을 그 막연한 공포를, 아. …하나도, 하나도 몰라서…”

 

주름진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다. 더듬거리며 외치던 아들의 처절한 그 울음, 애절한 외침에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심장이 퍽 소리를 내며 터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엄마 되기가, 참…힘든 것 같아. 낳은 게 다가 아니라는 걸 계속 느껴. 네가 아까 화내주지 않았으면 아마 평생 그 진심을 듣지 못했겠다 싶어서… …”

“제가,”

“누누이 말하지만 넌 잘못이 없어.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야. 제천아, 자신을 그만 놓아주렴.”

“…”

 

이수경의 단호한 어조가 벌레처럼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자책감을 부드럽게 털어내 주었다. 김독자는 종종 손제천이 가장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그토록 원했던 말을 할 줄 알았다. 그조차도 몰랐던 제 속내를 꿰뚫으며 날카롭게 중심부를 쑤시곤 했다. 어머니를 닮은 거였구나.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김독자가 던졌던 하얀 베개가 눈에 들어온다. 왜 헤아려주지 못했을까. 왜 그냥 다그치기만 했을까. 김독자의 사랑을 믿겠다고 해놓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믿어주지 못했다. 혼자인 시간이 길어서, 혼자서만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해버렸다. 단지 깜빡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이없이 흘러간 시간에 오래 외로이 서 있었을 손제천을 김독자가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왜, 왜…

 

한참이나 감정을 흘려보낸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여전히 변함없는 풍경이 있었다. 채칵거리는 시계 초침,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든 김독자. 일정한 박자로 김독자를 도닥이는 이수경의 손길. 손제천은 마음먹었다. 돌이킬 수 없다면, 차라리 이 풍경의 하나가 되겠노라고. 굳은 결심을, 결의를 다졌다.

 

내려놓으니 모든 것이 선명히 보였다. 복잡할 것 하나 없는 단순한 일이었다. 김독자가 손제천을 사랑하고, 손제천이 김독자를 사랑하는 간단한 일에 괜히 복잡한 문제를 더 얹고 싶지 않았다. 무거운 족쇄가 달린 것만 같던 몸이 서서히 가벼워진다. 무작정 한 발을 뗐다.

 

창밖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가 잠시 고갤 돌렸다. 닫힌 틈으로 한 점 들어오지도 못한 바람이, 어쩐지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

 

 

“…”

“왕자님, 일어났어?”

“…뭔……”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도 너보단 덜 잤을 거야.”

“…나…어, 얼마 만에 눈, 뜬…거야?”

 

겁을 한가득 집어먹고 커진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물든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손제천은 피식 웃으며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맨둥한 머리를 쓸어주었다.

 

“네 시간.”

“…다, 다행, 이다.”

“독자야, 수술받기 싫어?”

“…”

“제천이한테 아까 한 말들이 쫌 미안하더라도,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우, 웃기시네……. 나, 나가라 너.”

“제천이는 속상해.”

 

손제천이 습관처럼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김독자가 작게 벌어진 입 틈새로 소리 내 웃었다. 히히. 예전만큼 크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가 가장 사랑하던 웃음이었다.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무서웠지?”

“…응.”

“그래. 나는, 나는 있지. 그게…”

 

마지막까지 의연하게 말하고 싶었다. 네가 무섭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네가 힘들다면, 다 그만둬도 괜찮다고. 나에게 전부 떠넘기고 가더라도 다 이해하겠다고. 그렇게 말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말해주려 했는데. 치료를 멈추고 나면 김독자가 정말로 제 곁을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게 슬펐다. 울컥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꽉 막았다. 울지만 말자. 울지만 않으면 돼. 꾸역꾸역 울음을 삼키고 입을 여는 순간, 소매를 꾹 잡는 미약한 힘에 저항 없이 입이 다물렸다. 김독자가 입술을 달싹인다.

 

“…제, 제천아. 나… 수, 수술 받, 을까?”

“…”

“수술, 바, 받을게.”

 

히히. 김독자가 또 소리 내 웃었다. 그러면 손제천도 마주 보고 웃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내, 내가 그, 랬지. 모, 모, 못생기게 웃, 을…거면,”

“알겠어, 하여튼 내 얼굴에 엄격하다니까.”

 

손제천이 숙인 고개 아래로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번에 눈떴을 때 또 없으면 죽는다, 너. 김독자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덕분에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많이 울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더 푹 숙였다. 김독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겨우 들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창밖으로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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