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사랑이 힘들어
제천독자
“내가 새파랗게 어린 너한테 어디까지 말해야 그만할래.”
창백한 낯이 평소보다 싸늘했다. 지나치게 차가운 그 온도에 젊음 하나로 영원히 타오를 것만 같던 열기가 식어간다.
“어? 내가 얼마나 더 상처 줘야 그만할 거냐고.”
처음으로 무섬증이 생겼다. 언제나 은은하게 얼굴 한구석에 존재하던 미소마저 깔끔하게 지워진 얼굴은 제법 서늘하고, 꼭 제게 질린 듯해서. 결국, 솟아오르는 건 화도 억울한 마음도 아닌 단순한 물줄기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처럼 하염없이 볼을 척척하게 적시고 있노라면 칼날과도 같이 매서운 눈길은 그대로지만, 얼음장처럼 차갑던 목소리는 천천히 녹아 들어갔다.
“그러니까 제발 이제 그만해, 제천아. 이거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언제는 미쳐야만 할 수 있는 게 사랑이라면서요. 불퉁하니 대꾸하려다가 그냥 꾹 삼켰다. 그 말까지 얹으면 가까스로 온기가 도는 목소리에 다시 서리가 꾸역꾸역 낄 것 같았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 …똑똑하잖아, 너.”
하나도 안 똑똑해요, 그냥 멍청한 코뿔소처럼 맨날 들이받기만 한다고 놀렸잖아요. 하고 싶은 말이 목 언저리까지 너무 많이 차서 꽉꽉 뭉쳐있는 상태라 단 한 마디도 뱉을 수가 없었다. 덩어리져 있는 묵직한 마음을 어떻게든 뚝 떼어내서 던지기까지를 당신은 절대 기다려주지 않을 테니까. 이것 봐, 결국 아저씨는 먼저 걸음을 옮긴다. 한 발짝 두 발짝 벌어지는 우리의 거리를, 나는, 나는……
“…가지 마세요”
“… …”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가지 마세요…”
먹먹한 목소리로 형편없이 읊조린다. 아저씨의 코트 끝자락을 간신히 미약한 힘으로나마 붙잡고 있는데,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 걸음에 꼭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우뚝, 가만히 멈추면. 그렇게 있으면. 이런 걸 나는 또 어떻게 이해하라고, 이기적인 나는 당신의 상냥한 마음을 또 제멋대로 해석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굴 텐데.
“… …”
“……”
겨울이었고, 타이밍 거지 같게 눈이 오고 있었고, 길거리였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댈 정도로. 덩치 큰 하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쉼 없이 흘리고 있고, 뒤돌아 서 있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람은 코트 끝자락을 무방비하게 잡혀준 채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으니까.
이건 죄다 당신의 잘못이다. 멈춰달라면 멈춰주고, 밥을 사달라면 밥을 사주고, 함께 가자고 하면 함께 가주는, 당신의 잘못. 그래놓고 사랑해달라는 단 한 가지의 부탁만 들어주지 않는, 당신의 잘못임이 틀림없다.
눈물이 슬슬 마를 때쯤에야 아저씨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주지. 하여튼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빨랐다. 내가 잡은 코트 깃은 내치지 않은 채로 아주 느릿하게. 그래서 나도 꼭 동아줄을 잡은 것처럼 아저씨의 코트 끝자락을 잡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 그러면 우리의 관계는 또 빗자루로 마구 쓸어버린 마당처럼 헝클어지고 흐지부지되어버리는 거다.
“… …들어가.”
“……”
그 긴 시간을 걸어오면서 말 한마디 않던 아저씨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집 앞에 도착한 후였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코를 한 번 흥흥거리고 훌쩍대고 있노라면 쭈뼛쭈뼛하며 한마디를 더 해준다. 내일 보자. 내일 병가 낼 건데요. 불퉁한 마음을 코 훌쩍임 한 번에 또 넘겼다.
“… …너무 울지는 말고.”
그리고 아저씨는 떠났다. 미련이라곤 한 줌 없는, 한없이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다만 눈길 위에 찍혀있는 발자국마다 미련이 남아있었다. 항상 그랬다. 아저씨는 애써 미련을 버리고, 나는 그 미련을 매번 주워 담는다. 두 사람분의 것을 안은 나만 미련스러워지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 미련마저 사랑하니까. 좋아하고 있으니까.
“… …”
내뱉는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희뿌옇게 흩어진다. 울지 말라고 했으니 내일은 또 퉁퉁 부은 눈으로 웃어 보여야겠지. 그런 내 얼굴과 마주하면 잘게 시선을 떨고는 이내 멀쩡한 척 구는 아저씨에게 나는 실없는 농담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다시 사랑을 고백할 용기를, 기회를 만들 수 있으니까.
“…”
하얀 눈이 어깨 위로 조금씩 쌓이는 게 느껴질 만큼 한참을 밖에 서 있었다. 발끝이 얼었고 눈에 보이는 살갗이 죄다 새빨갰다. 미련해. 너무 미련해 손제천. 더 흐를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꽁꽁 얼어붙은 손을 들어 눈을 꽉꽉 눌렀다. 손바닥을 척척하게 적시는 뜨거운 눈물 때문에 아팠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아마 눈이 퉁퉁 부은 채 아저씨를 마주했을 때 더는 웃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이 사랑도 멈추겠지. 코뿔소처럼 들이받을 줄만 아는 치기 어린 사랑도 멎게 되겠지. 아저씨가 조심스레 사다 책상에 올려놓은 바닐라라떼를 무감한 눈빛으로 가만히 쳐다볼 수 있게 되는 그때쯤이면, 그때쯤이면……
다만 내가 걱정인 것은, 내가 떠난 그 자리에서 아무도 줍지 않을 미련을 홀로 흩뿌리며 길을 잃고 방황할 아저씨다.
***
아저씨와 처음 말을 트게 된 건 회사 밑 편의점에서였다. 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창백한 낯은 같은 부서였음에도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다. 부장님…맞지? 아저씨는 그날따라 평소 이미지와 달리 신중하게 딸기우유와 초코우유, 커피우유 중 어떤 것을 고를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그러다 아저씨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새카만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숙였던 허릴 펴더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같은 부서의,”
“손제천 사원…… 맞죠? 우리 부서 신입.”
“…네. 저를 아세요?”
“같은 부선데 모르는 것도 웃기지. 뭐 먹을래요? 사줄게요.”
“사양 안 합니다.”
지갑 털릴 준비나 하십쇼. 소매를 걷어붙이며 정말 뭐라도 털 것처럼 악동처럼 웃어놓고 참치김밥 한 줄 고르는 모습에 아저씨는 픽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생소한 얼굴에 눈이 휘둥그레지기 전에 그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삑, 이천이백 원입니다. 삑, 천삼백 원입니다. 다 해서 삼천오백 원 계산 도와드릴게요. 봉투 20원인데 담아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뭐해요, 빨리 와서 가져가야지. 존대도 반말도 아닌 그 미묘한 정중함에 얼떨떨한 얼굴로 냉큼 제 몫을 챙기곤 곰살스레 웃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참치김밥 한 줄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묻는다. 그거 먹어서 그 덩치 유지해요? 아뇨, 이거 간식인데. 그럼 곧 점심이기도 하니까, 나랑 같이 먹을까. 네? 우리 부서 막내 얘기도 들어야지. 꼰대질 하는 거 맞으니까 인사팀에 찌를 테면 찔러. 참고로 거기 내 친구가 부장이에요. 말문이 턱 막힌 내게 아저씨는 가볍게 웃었다.
“제천씨 사수가 그러던데. 바빠서 제대로 못 챙겨줬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그래서 나보고 꼭꼭 챙겨주라고 부탁에 부탁을 하지 뭐야.”
“그건 제가 들어오자마자 뭔…? 프로젝트가 잘못돼서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요.”
“그래도 우대리가 제천씨 사수니까 할 일은 했어야지. 미안해하는 게 맞아. 물론 우대리는 그거 핑계로 내 지갑 열리는 꼴 보려는 거겠지만.”
“뭐 사주실 건데요?”
“먹고 싶은 게 뭔데.”
끙끙대며 고민하는 모습을 삼 초는 봤는지, 아저씨는 훌훌 걸음을 옮겼다. 그 옆에서 계속 뭐 마려운 것처럼 낑낑대며 같이 걸음을 옮겼더니 어느새 귓가에 우렁찬 인사가 울려 퍼졌다. 이랏샤이마세! 휘둥그레 눈을 뜨고 바라보자 아저씨는 고개도 하나 돌리지 않고 직원을 향해 두 명이요. 간결히 말하며 재킷을 벗었다.
“초밥 드시고 싶으셨어요?”
“못 고르길래, 그냥 아무 데나 들어왔어.”
“삼 초도 안 기다려주셨잖아요.”
“느려. 점심시간 끝나. 저녁에 나랑 따로 같이 밥 먹고 싶어요?”
“…”
“앉아요. 그리고 뭐 먹을지 골라. 아 혹시 초밥 못 먹나?”
“그건 아니에요.”
“그럼 됐지 뭐.”
커다란 덩치를 얌전히 구기고 앉았다. 인상과는 다르게 카리스마가 넘치시네…… 괜히 부장님이 아니시구나……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흰 주먹이 제 앞의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뭐 먹을지 고르라고. 아니면 내가 시킬까?”
“저는 그냥 양 많은 거로 주십쇼.”
“그러면 세트로 시킬게. 저기요, 여기 주문할게요. 세트…”
단정한 목소리로 몇 가지를 읊고 나니 직원이 떠났다. 아저씨는 수저를 놓고 물을 따르느라 부산스레 구는 나를 빤히 보더니 착하다, 하고 나직하게 말하며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참 예뻐서, 그래서 계속 시선이 갔나 보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예뻐서……
“신입, 뭐 힘든 거 없어요? 우리 부서가 좀 빡셀 텐데.”
“어렵지 않다면 거짓말인데, 그래도 할 만한 것 같습니다.”
“대단한데? 근데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보면 힘들다고 해요. 괜히 일 몰아줄 수도 있으니까…”
“다들 착하고 좋으신 분들 같았는데.”
“원래 사람이 급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따라놓은 물을 후룩 마시더니 손에 깍지를 끼고 다시금 빤히 나를 봤다. 그렇게 보시면 부끄러운데요. 능청을 떨자 다시금 웃는다. 아, 역시 당신이 웃는 게 좋은가 봐. 실없이 따라 웃었더니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아저씨가 말했다. 목을 축인 탓인지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아까보단 훨씬 부드러웠다.
“사실 우리 부서 전부 미안해하고 있어. 진즉 시켜줘야 했던 인력 충원이 회사 내부 사정 때문에 많이 늦어져서 하필이면 바빠 죽을 때 제천씨를 딱 뽑아줬지 뭐야. 그러다 보니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못하고 바로 투입 시켰는데 제 몫 해내는 모습에 다들 감동 했잖아. 부서 사람들이 잘해주는 거? 제천씨가 일을 잘해서 그래. 자부심 느껴도 돼요.”
“아…감사합니다.”
“이런 말에는 또 쑥스러워하네? 어쨌든, 힘든 거 있으면 지금 다 말해요. 이제 바쁜 것도 끝났고 여유롭게 제천씨 하나 봐주면서 꾸려갈 수 있는 분위기니까.”
“음, 근데 진짜로 징징댈만큼 힘든 일은 없습니다. 솔직히 바로 투입된 만큼 정말 많이 배웠거든요.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머쓱하게 턱을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아무리 편하게 말하라고 했지만 부장에게 어떻게 일개 사원이 힘든 걸 미주알고주알 말할 수 있을까? 아저씨가 아무리 웃는 게 예뻤다지만, 아무리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일종의 테스트였나 싶다. 다행히도 아저씨는 더 캐묻지 않고 그래요, 그럼. 하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때마침 직원이 묵직한 쟁반을 들고 앞에 섰다.
“소바 세트 먼저 드릴게요, 어느 분 앞에 놔 드릴까요?”
“아, 여기 놔주시면 됩니다.”
“맛있게 드세요.”
많이 시켜달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많을 일인가. 세 개, 작은 그릇까지 합하면 네 개 정도의 음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고작 초밥 열 피스, 우동 반 그릇 정도를 시킨 아저씨가 뭐해요, 얼른 먹고 다시 일하러 가야지. 하며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곤 후루룩 후루룩 잘도 먹었다.
“…잘 먹겠습니다.”
못 먹으면 남기지 뭐, 하고 조금씩 조금씩 먹다 보니 어느새 빈 그릇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 많이 고팠나 보네, 신입. 고개를 들자 이미 식사를 마친 지 꽤 되었는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아저씨가 있었다.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자 아저씨가 다시 웃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아요. 나는 입이 좀 짧은 편이라…. 나가면서 커피까지 사서 갈 수 있겠다. 신입 커피 취향 어떤 거예요?”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부장 체면 구기게 하지 말고, 뭐 마실 건지 정해놔요. 나 계산하러 갈 거니까 뒷정리 다 하고 나오고.”
원래 부장님들은 다 저런 모습인가? 고작 스물여덟 살의 갓난쟁이 사회인인 나로서는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의 여유와 배려였다. 그러니까, 분명히 처음에는 동경과 호감으로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감정이었다. 지금에서는 온갖 감정들이 뒤얽히고 섞여 눈덩이처럼 불어난 채지만.
“맛있었어요?”
척 봐도 반절 이상이나 남은 담배를 급히 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비벼 껐다. 손을 털고 품 안에서 작은 공병을 꺼내 칙칙 뿌리더니 코트 깃을 몇 번 털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질문하는 건 잊지 않았다. 담배 피우셔도 됐는데, 라는 말을 하려다 어차피 식상한 대답이 돌아올 게 뻔해서 네 맛있었어요. 라는 상투적인 답변을 했다. 아저씨는 부스스 웃더니 마른 풀냄새가 더해진 몸을 돌려 발길을 옮겼다.
“다행이네요, 입맛에 맞아서. 그래도 여기 되게 잘하는 데다? 이다음에 친구들이랑 한 번 와봐요.”
“넵, 감사합니다.”
“커피는 뭐 마실래?”
“저는 아이스바닐라라떼! 요…”
스무 살이 돼서 처음으로 먹은 아메리카노는 끔찍한 맛이었다. 지나치게 썼고 이런 게 어른의 맛이라면 절대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선했다. 우연히 동기가 마시던 바닐라라떼를 얻어 마시고 그 뒤로부터는 계속 아이스바닐라라떼 외길 인생을 고집했다. 그 때문에 망설임 없이 음료 이름을 크게 외쳤는데, 아저씨가 웃기 시작했다. 큭큭 가볍게 웃다가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도 웃었다. 큰 파도가 지나가고 잔잔한 파도가 부서지듯 남은 웃음을 잘게 털어내며 아저씨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아기라 그런가, 입맛도 아기네.”
“놀리시는 거죠?”
“부러운 거지, 나는 단 거 먹으면 이제 혀가 아려.”
꼭 칠십 먹은 노인처럼 말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나이 많은 분들이 단 걸 더 찾던데. 그럼 부장님은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 않으신 건가? 하긴 끽해봐야 마흔은 되시겠어. 다시 시답잖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나름의 예의도 더했다.
“근데요, 몇 살이신지 여쭤봐도 됩니까?”
“글쎄. 몇 살처럼 보여요? 이런 말 하면 답하기 곤란한가?”
그 말을 끝으로 정말 나이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않았다. 아이스 바닐라라떼를 들고 회사 건물로 이동하며 조금 뚱해 있는 내게 아저씨는 스치듯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마흔은 넘어.”
“네?”
정말 놀랐다. 끽해야 마흔이라고 생각했는데 마흔은 넘는다니. 그러면 마흔 초반이신가? 동공을 달달 떨며 농담도 참, 하고 애써 웃어 보이는데 전혀 농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며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흔하나?”
“땡, 업.”
“마흔…둘?”
“업.”
“마흔셋??”
“정답.”
“마흔세엣?!?! 거짓말이시죠??”
“이 친구 사회생활 잘하네. 칭찬으로 알아들을게.”
지나치게 경악해 턱이 빠지도록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우리 부서 앞이었다. 이게, 이게 말이 되나…? 충격에 빠진 채로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가자 우대리가 건너편에서 눈을 빛냈다. 이번에야말로 이 선배가 도움을 줄 차례 아니겠니? 머쓱한 생색을 내며 자리에 앉은 지 오 초 된 나를 일으켜 탕비실로 끌고 갔다.
“신입, 표정이 왜 그래? 귀신 봤어?”
“우대리님… 부장님 나이가 정말로 마흔셋이신 거예요?”
“응? 응. 엄청 동안이시긴 해. 나도 처음엔 많아 봐야 서른 후반이겠거니 했는데 이미 그때 마흔하나셨다고 하더라고.”
확인 사살까지 당했다. 웃는 게 예쁘고, 여유가 넘치고, 존경할 만한 사회인인 부장님은 정말로, 정말로 ‘어른’이었던 것이었다. 작게 비틀대는 나를 보고 우대리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신입 놀랐구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내가 이렇게나 놀랐다는 사실이 분명 퇴근할 때쯤이면 부서 전체에 퍼져 놀림당할 거라고.
정확한 추리였다. 퇴근하기 오 분 전쯤에 아저씨가 내 책상을 똑똑 두드리며 불렀다. 제천씨, 나 좀 보지. 심각한 목소리시길래 아까 넘긴 파일이 잘못됐을까? 하고 탕비실 쪽을 향해 가는 아저씨 뒤를 어영부영 졸졸 쫓아 달려갔다. 탕비실 문이 닫히자마자 아저씨가 홱 뒤돌아 나를 보는데,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놀리려고 불렀군. 내일은 기필코 우대리님을 물어뜯으리라……. 눈물을 삼키며 부장니임, 하고 투정을 부리듯 말하자 아저씨는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마흔셋인 거 많이 놀랐어요? 왜?”
“아니이, 아니. 부장님……”
“제천씨 진짜 귀엽다, 놀려서 미안해요. 근데 제천씨같은 반응은 또 처음 봐서.”
미안하다고 말해놓고는 또 혼자서 큭큭대며 웃었다. 결국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웃는 아저씨를 가만 쳐다봤다. 길쭉한 손가락이 달린 흰 손으로 입을 조금 가리고 웃는 모양새가 정말 예뻤다. 눈가에 곱게 접히는 주름들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웃는 것도.
“미안, 미안. 내가 너무 웃었죠.”
“솔직히 좀 그러셨어요.”
“주변에서 하도 어려 보인다고 하니까 이제는 별 감흥 없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제천씨처럼 반응해주는 사람은 또 처음이라 신선해서 좀 웃었어요. 기분 나빴으면 진짜 미안해요.”
잔잔하게 깔린 미소와 함께 정중하게 말하는데 사실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의 웃는 얼굴을 내가 낱낱이 뜯어보고 있었다고 고백한다면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건 아저씨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겉치레로라도 뚱한 얼굴을 지어 보이자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초콜릿 몇 개를 꺼내 내 손바닥 위에 올려주며 다시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퇴근해봐요. 오늘 여러모로 즐거웠어요. 내일도 다시 힘차게 일합시다?”
“네에…….”
부장님은 안 가세요? 라는 눈빛을 슬쩍 보내자 아저씨는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살짝 흔들었다. 다 드시고 가실 건가 보네. 얼마 되지 않는 눈치를 발휘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묵례하고 자리를 떴다.
그날을 기점으로 아저씨와는 빠른 속도로 친해지게 됐다. 어쩌다 보니 야근을 같이했고, 덜컹덜컹 움직이는 지하철에 지친 몸을 싣고 돌아가는 길이 비슷한 듯해서 슬쩍 말을 건네보니 이웃 주민이었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취향이 잘 맞았다. 맛집을 자주 돌아다녔고, 술도 마셨고, 사적인 만남이 어색하지 않을 때쯤에는 이미 서로를 제천아, 아저씨, 하고 부르고 있었다. 형이라고 먼저 불러봤지만 기겁하는 모습에 결국 아저씨로 호칭이 굳어지게 된 건 딱히 숨길만 한 비밀도 아니다.
“아저씨!”
“천천히 오라니까, 너 또 넘어지면 내 탓이라고 우길 거지.”
“근데 제가 늦은 건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일찍 온 거겠지?”
“아 진짜 말 한마디를 안 져주네.”
“네가 내 자식도 아닌데 내가 왜.”
꼭 친구처럼 싸워대며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새로 찾아낸 칵테일바였다. 여기가 그렇게 유명하대요. 예약도 해야 한다던데. 스치듯 했던 말을 기억했던 건지, 금요일 저녁에 메시지가 왔다. 네가 가고 싶다던 그곳, 예약해놨어. 주말에 가자. 그 문자 하나가 뭐라고 가슴이 빠듯해지도록 조여왔다. 그 이상한 감각에 뒷머리나 미친 듯이 헝클었다. 제가 약속 있었으면 어쩌려고 덜컥 예약부터 하신 거예요? 장난스럽게 보낸 문자에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주무시나? 휴대폰을 이리저리 만지작대고 있다가 놓을 무렵에 진동이 울렸다.
[그러네.]
[주말에 너랑 같이 있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보다.]
[앞으로는 물어보고 할게.]
[잘자]
평소에는 하나에서 두 개 정도만 찍 보내던 문자가 네 개나 왔다. 차마 답을 더 보낼 수가 없었다. 아저씨도 안녕히 주무시라는 그런 흔한 인사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동경인 줄 알았다. 단순한 호감인 줄 알았고 나이 차를 뛰어넘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카톡보다는 문자를 고집하고 전화를 걸면 신호음은 세 번이 넘지 않게 받아준다. 내가 가자는 곳은 다 가주고 흘려 말한 것조차 허투루 듣질 않는다. 입가에는 언제나 잔잔한 웃음이 머물러 있고 눈가에 작게 지는 주름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뻑뻑 질렀다. 말도 안 돼. 아 진짜, 거짓말하지 마.
…토요일 저녁의 나는 간만에 향수를 뿌렸다. 너무 향이 세지 않은 거로, 아주 조금. 그러니까, 정말로 아주 조금. 두 번도 아니고 딱 한 번만. 가게에 들어가기 전 아저씨가 갑자기 내 옷깃을 잡아챘다. 훅 다가오는 바람에 피할 겨를도 없었다. 피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피할 수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다가온 아저씨는 그 상태로 고개를 쓱 들어 가볍게 웃었다.
“향수 뿌렸네. 향 좋다.”
그러고서는 자기 혼자 휙휙 걸음을 옮겼다. 가게로 먼저 들어서는 아저씨의 뒷모습만 허망하게 지켜봤다. 나 이거 지금, 뭐 당한 거야? 입구의 코너를 돌아 들어갔던 아저씨가 고개만 쑥 빼고 안 들어와? 하고 물었다. 나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가게로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저씨는 신경도 안 썼다. 나만 또 집으로 돌아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지르게 될 거였다.
그날 마신 칵테일 맛은 아직도 기억이 안 난다. 어쩌면 코로 칵테일을 마시는 묘기를 부렸을 수도 있다. 무슨 소맥 말아서 들이키듯이 칵테일을 마셨더니 취기가 미친 듯이 올랐다. 양주는 양주였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쓱 보다가 자기 몫의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 내 입에다 카나페 몇 개를 쑤셔 넣어줬다. 우적우적 씹고 나서 입이 텅 비면 다시금 집어 넣어줬다. 내가 무슨 돼진 줄 알아요? 볼멘소리로 씨부렁거리면 무감한 눈빛으로 쓱 훑어보다 다시는 입에 카나페를 집어 넣어주지 않았다. 도통 두 번이 없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취했는데 정신이 말짱했다. 혀가 좀 꼬였다 뿐이지 잘도 말하는 내게 아저씨는 그 흔한 걱정도 건네질 않았다. 그냥 시시콜콜한 사는 얘기나 하고, 그러다가 내가 미친 척하고 결혼은 안 하세요? 물었다. 내뱉고 나서 주둥이를 뽑고 싶었다. 아저씨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푸스스 웃었다. 너 되게 늦게 물어본다. 남들이 안 하는 짓만 골라서 하네. 꼭 나이를 물었을 때처럼 그 말을 끝으로 답을 또 안 했다. 하여튼 자기 혼자 베일에 싸여있는 인간이라고 속으로 꿍얼꿍얼 욕 좀 했다.
“이혼했지.”
“예?”
그러다 갑자기 말을 팍 던졌다. 평온한 아저씨와 대비되게 나만 그 말에 두들겨 맞고 비련의 주인공처럼 엎어져 쓰러진 채로 멍청하게 되물었다. 아저씨는 또 아무렇지 않았다. 칵테일만 홀짝홀짝 마셨다.
“이혼한 지 좀 됐어. 오 년 됐나.”
“이유 물어봐도 돼요?”
“그냥, 남들이 다 말하는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아내분, 그러니까 전 와이프분……”
횡설수설 말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는 내게 아저씨는 가볍게 또 웃었다. 저 웃음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 거 아니야? 취한 머리통은 두 개 이상의 생각을 못 했다. 딴 데로 빠져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아저씨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해보면 미쳤지. 미쳐야만 할 수 있는 게 사랑이니까. 사랑하니까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 …어, 음.”
“표정 풀어. 심각한 거 아니야. 그 사람이랑 지금도 종종 만나. 친구고 연인이면 좋은 사람이거든. 그때 우리는 그냥 앞뒤 재지 않았던 거지. 상황도 안 맞았고, 결혼도 둘 다 안 맞았어.”
“아…… 그럼 연애는 더 안 하세요? 결혼 말고, 연애.”
“연애? 음… 이젠 새로운 사람 만나기가 무섭네. 이렇게 생겼지만 마흔셋인데, 내가 누굴 만나서 뭘 하겠어.”
나랑 만나서 연애 한번 해보면 안 돼요? 제멋대로 튀어 나갈 뻔한 말을 간신히 집어넣었다. 애매하게 웃음을 흘리자 아저씨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헝클었다. 그러니까 이런 행동이 자꾸 나를…… 한숨을 깊게 쉬었다. 아저씨는 여전히 내 머리를 헝클고 있었다. 아저씨 취했죠? 어. 그러더니 헝클어진 머리를 슥슥 빗겨준 후에 아쉽다는 듯 쩝하고 손을 뗐다. 내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아저씨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 말했다. 알아. 남은 칵테일을 훌훌 마시고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어디를요?”
“집에.”
쓸데없는 질문에는 왜 저렇게 항상 꼬박꼬박 답해주는지. 나는 온갖 게 다 불만인 채로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은 또 아저씨가 했다. 내가 산다니까요, 가게를 나와서 헤어지는 갈림길로 가기까지 계속 투덜대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아저씨는 참 한결같았다. 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늘 아니었다. 내가 구시렁대는 게 끝날쯤에야 아저씨는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얻어먹겠니.”
그리고 나서는 또 내 머리를 헝클었다. 강아지 같다, 너. 남의 머리를 헝클었으면 차라리 그대로 두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정리까지 해줬다. 아저씨는 꼭 그랬다. 울고만 싶었다. 취했고, 밤이었고, 나는 아저씨를 좋아한다는 걸 막 깨달은 아기였다. 사랑에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드라마 같은 대사를 쳐도 모든 게 용서되는 피 끓는 열정의 젊은이였다는 소리다.
“들어가. 도착하면 연락해.”
“아저씨.”
“응?”
“좋아해요.”
“…그래.”
진짜로 그게 다였다. 나름 진지하게 주먹까지 꾹 쥐고 고백한 나를 흘끔 보더니 아저씨는 손을 흔들고 갈림길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또 혼자 남았다. 이번에는 아저씨가 코너에서 귀여운 얼굴을 빼꼼 내밀어준다든지, 그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끝났다. 첫 고백이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말했지? 왜 말했었지? 아저씨는 왜 그렇게 대답해준 거지? 거절한 건가?
…당연히 받아준 건 아니었으니까 거절이었을 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절차를 밟듯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서 입에다 이불을 구겨 넣고 왁왁 소리를 질렀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을 정도의 쪽팔림이 컸고, 그래도 나름대로 연애도 사랑도 좀 해봤다는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꼭 열여덟 살의 첫사랑처럼 군 게 어이없었다. 아마 아저씨도 어이없었겠지. 짙은 현타를 맞이하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을 때였다. 징징 알림이 울리더니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미리 보기로 뜬 화면에는 아저씨의 문자가 와 있었다.
[제천아, 도착했어?]
[나는 이제 씻고 잔다.]
[남은 주말 잘 보내고 출근해서 보자.]
평소랑 똑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같았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안도감도 고마움도 아니었다. 슬펐다. 억울했느냐 묻는다면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좀, 좀 슬프고……
***
첫 고백 이후로 아저씨가 마침내 내게 싸늘한 거절의 말을 내뱉을 때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의 틈새마다 나는 끊임없이 고백하고 셀 수 없이 거절당했다. 지극히 당연하긴 했는데, 이제는 슬슬 억울하기까지 했다. 우리 완전 잘 어울리지 않아요? 어, 그래서 완전 잘 어울리고 놀고 있잖아. 아저씨는 진짜로 말 한마디를 안 져줬다. 아저씨가 지는 꼴을 보기 위해 아저씨 호적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가 아저씨는 무감한 눈빛으로 나를 쓱 훑어보더니 와, 그러면 근친이라서 더더욱 거절해야 하는데. 라는 말로 내 가슴짝을 북북 찢어놨다. 진심 재수 없는 인간을 왜 좋아하게 됐느냐고 물어보면…
정말 좋은 질문이다. 나는 이런 질문이 들어오기를 언제나 바라왔다. 먼저 목차는 다음과 같다. 하나, 김독자에 대하여. 둘, 손제천이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 셋………
***
언제부턴가 아저씨도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정말로 자연스럽게 느꼈다. 평소와 같이 행동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도 저 좋아하죠? 전날 회식에서 신나게 과음하고 주말 아침 해장국 집에서 밥 먹다가 물었을 때 아저씨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나를 빤히 보다가 대답도 하지 않고 내 머리를 헝클어주기만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떻게 나를 좋아한다는 걸 또 깨달았냐면, 나를 어떻게 신경 쓰고 있는지를 느꼈냐면, 머리를 정리해주지는 않았다.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어긋남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아저씨도 나를 좋아하는구나. 아마 그때부터 더 불도저처럼 굴기 시작했을 거다. 물론 그러다 호되게 차였지만, 하여튼. 그랬다.
***
오랜만에 밥을 굶기로 했다. 아저씨가 나에게 조금 더 죄책감을 느껴보라는 못된 심보에서 기인한 게 맞다. 제천씨는 밥 안 먹어? 네 오늘 속이 좀 안 좋아서요. 퉁퉁 부은 눈으로 말하니 제법 신빙성이 있어 보였나 보다. 팀원 대부분이 적당히 걱정해주다가 갔다. 개중에는 약을 사다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굳이 말리진 않았다. 저 멀리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움찔대는 아저씨가 보였으니까. 최대한 아파 보여서 나쁠 게 없었다. 점심 끝나고 나서는 반차도 쓸 건데 그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물론 무표정이겠지만. 퉁퉁 부은 눈 위로 동료가 주고 간 쿨팩을 얹은 채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눈두덩이가 따가웠다. 아무리 울어도 웬만하면 점심 전에는 가라앉던 눈이 여즉 시큰거리며 아픈 게 어쩌면 정말로 몸살까지 겹쳤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생각해보니 어제 그 추운 밤 몇 시간이고 눈을 맞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와, 나 진짜로 소설 주인공처럼 살고 있네, 상사병도 걸리고. 하도 부어서 욱신대는 눈이 조금씩 식혀지자 쉬이 잠들지 못했던 지난 밤의 여파로 졸음이 밀려왔다. 마침 의자도 편히 풀어놓은 상태라 몸을 조금 더 젖히자 반쯤 누운 자세가 된다. 물론 잠깐만 자고 일어날 거긴 하지만…… 시리야, 타이머 십 분만 맞춰줘. 졸린 와중에도 혹시 몰라 안전장치를 하나 더 해놓는다. 나는야 이 시대의 참된 직장인. 온갖 딴생각들이 슬슬 사라진다. 점차 머릿속이 새카맣게 점멸했다.
십 분이 지나자 싹수없는 알람이 울렸다. 대충 손을 휙휙 뻗어 알람을 껐다. 시리야, 오 분 타이머 맞춰줘. 여전히 조용한 복도를 보니 아직 다들 밥을 먹고 있겠거니 싶어 잠을 더 청하려 했다. 하지만 방금 순간적으로 귓전을 때린 알람 때문에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여전히 시원한 쿨팩 아래로 눈을 끔뻑였다. 어쨌든 시야가 보이질 않으니 주변 소리에 한껏 민감해졌다. 음, 벌써 밥을 다 먹은 분도 있구나. 저 멀리서 미세하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부선가?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금방금방 밥을 먹는 사람을 몇 명쯤 추려봤다. 딱히 인사할 힘은 없어 계속 자는 척을 하기로 한다. 이윽고 제 근처로 완전히 누군가 다가와 걸음을 멈췄다. 뭘 봐요, 자는 사람 처음 보나. 잔뜩 삐딱한 마음으로 쿨팩 너머를 노려본다.
“얘는 왜 이러고 자고 있어……”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체향이 훅하고 다가왔다. 아저씨는 공격적으로 울리려던 알람을 자연스럽게 꺼주고는 내 머리를 가만히 쓸어넘겼다. 한껏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많이 아픈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유독 심장에 시리도록 박혔다. 겨우 가라앉아가는 눈이 다시금 시큰해진다. 우리 그냥 서로 좋아하면 안 돼요? 제가 아저씨를 좋아하는 게 왜 약점인 것처럼 굴어요? 하다못해 내가 서른이 넘었더라면 우리는 괜찮았을까. 정말로 내가 떠나면 아저씨 혼자서 그 감정을 끌어안게 될 텐데, 어쩌려고 그러는 거예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서서 눈가에 예쁜 주름을 내고 은은하게 웃고 있을, 나를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아저씨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동시에 모르는 척 이 평화를 계속해서 누리고 싶기도 했다. 모순된 감정 이쪽저쪽을 치열하게 오가는 동안 아저씨는 손을 떼고 자리를 옮긴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못내 아쉽다. 자는 척을 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쿨팩을 떼고 어두운 낯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집에 갈 준비나 해야지. 고개를 들자 본인의 자리에서 다시 이쪽으로 오려는 듯 몸을 틀고 있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마실래?”
“저 아파요. 반차 쓸게요.”
어정쩡하게 바닐라라떼를 한 손에 들고 있는 아저씨에게 냅다 말을 내질렀다. 그 말을 듣자 동그랗게 토끼 눈을 뜬 채 입이 벌어진다. 표정을 갈무리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그 귀여운 모습을 사진 찍듯 마음속에 백 장은 넘게 저장했으니까. 처음으로 아저씨에게 무뚝뚝한 기색으로 대응했다. 속으로는 온갖 주접을 다 떨고 있었지만, 어쨌든 나도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무언의 시위와도 같았다. 아저씨는 바닐라라떼를 내려놓고 내게 손짓한다. 나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눈 많이 부었네. 너무 울지 말랬잖아.”
“마음처럼 안 되는데 어떡해요.”
“어디가 아픈데.”
“마음이요.”
“장난치지 말고.”
“왜 장난이라고 생각해요?”
“…제천아, 내가 어제 말한 게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는 모습에 다시 어제의 칼날과도 같던 말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떻게 그걸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아무런 대답 없이 입술을 꾹 말아 물었더니 아저씨는 사나워진 본인의 얼굴을 쓸어내린 후 사막처럼 말라버린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반차 쓰고, 내일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봅시다.”
“…내일은 월차 쓸게요.”
“손제천.”
“진짜로 아파서, 아플 것 같아서 그래요. 차라리 푹 쉬고 나아서 오는 게 낫잖아요.”
“…일단 오늘 들어가서 연락해.”
눈을 감고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홰홰 젓는다. 자리로 돌아가 짐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복도가 조용하다. 돌아오는 이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쯤 다들 커피 한잔때리고 있겠구나 싶었다. 창백한 얼굴을 흰 두 손에 파묻고는 잔뜩 지쳐있는 아저씨에게 떠나기 전에 충동적으로 한 마디를 내 던진다.
“…제가, 노력할게요. 앞으로 아저씨 좋아하지 않도록 많이 노력해 볼 테니까, 제 걱정은 그만하고 아저씨나 아프지 마세요.”
“… …뭐?”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부장님. 팀원분들한테는 죄송하다고, 그래도 해야 할 건 다 하고 갔다고 잘 말해주세요.”
처음으로 아저씨보다 먼저 뒤돌아섰다. 당신은 내 뒷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죽도록 아팠어. 태어나서 이런 마음을 처음 겪어봐서, 어른이 된 지 한참이나 됐는데도 아직도 이만큼이나 내가 어리다는 걸 알게 돼서 또 많이 슬펐어. 당신은 이런 마음을 겪고 어른이 됐던 걸까. 순식간에 복잡해진 머리를 북북 헝클며 경보 수준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기대도 하지 않긴 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아저씨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만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차마 고개를 들고 아저씨가 있는 쪽을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봤다간 그대로 뛰쳐나가 아저씨를 끌어안고 전부 거짓말이라고, 내가 어떻게 아저씨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냐며 어리디어린 투정을 부릴 것만 같았으니까.
엘리베이터 벽에 기댄 몸이 속절없이 미끄러진다. 주저앉은 온몸이 무거웠다. 정말로 큰 병에 걸린 것 같았다. 사랑은 병이구나.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1층으로 달려가는 숫자판을 흘끔 보곤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비척대며 몸을 옮기는데 하필이면 마주친 게 부서 사람들이었다.
“제천씨! 지금이라도 뭐 먹으러 가는 거예요?”
“아… 아니요,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반차 쓰고 퇴근하는 길입니다. 그래도 할 일은 다 끝내놨어요.”
“어머, 어머. 아픈 사람한테 할 일 다 했냐고 물을 만큼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우리. 에고고, 그래. 얼른 들어가서 푹 쉬고 멀쩡한 모습으로 봐요!”
“넵 감사합니다.”
한 명 정도는 아니꼽다는 눈빛을 보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모든 게 끝났다. 아무래도 내 낯빛이 똥빛이긴 하구나 싶었다. 회사를 나와서 도저히 버스를 탈 자신이 없어 아무 택시나 잡아타고 주소를 불렀다. 이 와중에 햇살이 드럽게 좋았다. 속으로 욕을 몇 번 곱씹고,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더니 금세 집이다. 무슨 정신으로 씻고 침대에 눕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름 상쾌해진 몸을 푹신한 데다 뉘니 그나마 아까보단 상태가 나아졌다. 좋아하는 걸 정말로 접어야 할까? 인형을 모으는 게 취미인지라 침대에 잔뜩 널려있는 크다란 인형 중 하나를 집어 꽉 끌어안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홧김에 던진 말이었지만 내가 밀어붙이고 있는 이 감정 때문에 아저씨가 힘들어하는 꼴은 그닥 보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마음을 접는다 해도 하트모양으로 접어질 거라는 거지만.
생각이 많아지자 다시 머리가 뜨끈뜨끈해지며 열이 올랐다. 몸이 무거웠다. 간신히 침대에서 벗어나 상비약을 챙겨 먹고 풀썩 드러누웠다. 몰라, 일단 자고 일어나서……
***
헉.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을 잔뜩 흘려 온몸이 축축했다. 무슨 꿈을 꿔도 이딴 걸 꿔. 찝찝하지만 자기 전보다는 한참이나 가벼워진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쭉 켠다. 아저씨가 결혼하는 꿈이라니, 진짜 개꿈이지. 아닌가, 개꿈 아닌가. 이거 예지몽인가? 머리통이 복잡해진다. 이게 다 꿈속의 아저씨가 지나치게 환히 웃고 있어서다. 턱시도를 잘 차려입고 나를 발견하자마자 머쓱한 얼굴을 하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맙다, 제천아. 딱 그 여섯 글자만 말하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에게도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며 설레는 얼굴로 웃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식장으로 들어갔고, 신랑 측 자리에 앉았고, 아저씨가 입장하는 모습을 보다가 결국 식장을 빠져나가 눈물 콧물을 다 빼며 추하게도 울었다. 살아오면서 꾼 악몽 중에 가장 최악이었다.
어느덧 새까매진 창밖의 모습에 놀라 휴대폰을 켜니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었다. 문자는 세 통. 모두 아저씨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마음이 북받쳤다. 문자를 확인할 용기도 차마 나질 않았다. 그냥 이 모든 게 다 끔찍한 악몽의 흐름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쌕쌕거리며 한참이나 숨을 내뱉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숨이 막힐 때쯤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분리수거나 하자. 밀린 집안일을 하고, 약 먹고 다시 한숨 푹 자자. 슬리퍼를 직직 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제법 되는 플라스틱의 양에 문을 열어두고 옮기자는 생각이 들어 벌컥 문을 연다.
“……안녕.”
“…아저씨?”
“… …”
우두커니 복도 벽에 기대 담배를 뻑뻑 피우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재빨리 담배를 비벼 끄고 자연스럽게 인사해 보지만 오히려 텅 비어있었던 재떨이가 가득 차게 된 것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계속 저 기다리신 거예요? 왜요?”
금세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재떨이 하나를 가득 채울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요? 내가 연락을 안 받아서 계속 기다린 건가요? 왜요? 왜 그랬는데요? 내가 아저씨의 뭐가 된다고. 연락이 안 되면 자고 있겠거니 하고 평소처럼 무심하게 굴지, 내가 뭐라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울음을 참느라 새빨개진 눈을 하고 아저씨를 노려보듯이 쳐다보니 아저씨는 고개를 툭 떨궜다.
“… …그러게. 내가 왜 이러지.”
“지금 그게 대답이 돼요?”
“…안될 건 또 뭐야.”
분명 웅얼대고 있는데도 퉁명스레 말하는 게 귀에 또렷이 박혔다. 저 아저씨가 진짜. 뭐라도 한마디를 더 하려 했는데 아저씨가 제 엄지손톱을 검지로 문지르고 있는 걸 봐 버려서 뭐라 말을 더 얹을 수 없었다. 감정을 꾹 참을 때 아저씨의 버릇. 난감하거나 난처할 때마다 나오는 아저씨의 버릇.
“……저 괜찮아요. 제 상태 보러 오신 거면 이제 가셔도 돼요.”
“…어.”
대답은 잘하는데,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그러니까 이러지 좀 말라고요. 울상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못이라도 박혔는지 한 걸음도 떼지 않는 모습에 결국 내가 한 발을 먼저 뗐다. 가보세요. 저도 할 일 있어요. 그러자 아저씨가 퍼뜩 고개를 든다. 돌아서려는 나를 붙잡았다.
“…아저씨. 왜 울어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뒤를 돌아보자 철옹성처럼 굳건하던 아저씨의 얼굴이 다 무너져있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짙은 후회와 망설임으로 점철된 얼굴이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있지 않았지만 분명 아저씨는 울고 있었다.
“……내가 너를 좋아해.”
“…네.”
“근데 이게 말이 되니? 내가 어떻게 너를 좋아해.”
내가 어떻게 너를…… 아저씨는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리고는 고장 난 기계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아저씨와 가까워진 지금에서야 술 냄새가 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는 너무 어려, 제천아.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더 좋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데 왜 하필 나를 골랐어. 나는 사랑이 힘들어 제천아. 이 감정이 내게는 너무 버거워. 근데 네가 나를 자꾸만 버겁게 만들어. 힘들어도 다 괜찮았던 예전으로 돌아가게 해. 무모해서는 안 되는 내가 계속 착각을 하도록…… 그렇게 한참을 중얼거리다가 내 어깨에 이마를 툭 얹는다. 네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우리는 안 돼.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천천히 이마를 뗀다. 나를 잡았던 손도 멀어졌다. 나는 결국 몸을 틀고 아저씨를 무작정 끌어안았다.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이지만 감동적이거나 기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무력하고 슬펐다. 아저씨가 나를 밀어내는 이유가, 내가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 …나, 갈 거야. 놔 줘 제천아.”
“싫어요. 아저씨가 먼저 찾아온 거잖아요. 저 못 놔요.”
“제천아.”
“맞아요, 저 어려요. 아저씨보다 한참 어려요. 근데 그렇다고 제 마음마저 그렇게 취급하지 마세요. 적어도 지금만큼은, 감정에 도망치지 않는 제가 더 어른스러우니까.”
“……”
“좋아해요. 아저씨도 나를 좋아하잖아요. 미쳐야만 할 수 있는 게 사랑이랬잖아요. 우리 그냥 사랑하면 안 돼요? 내가 빨리 어른이 될게요. 아저씨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 될게요.”
“……너는 정말 내 말을 안 듣는구나.”
어느새 그냥 눈물이 줄줄 샜다. 나를 밀어내지 않는 아저씨가 너무 미워서. 내 품에 꼭 맞게 안기면서, 우리는 안 된다고 말하는 아저씨가 미워서. 이 추운 날 바깥에서 몸이 차게 얼 정도로 오래 있었던 주제에 나를 밀어내는 게 미워서. 그리고 그 미움보다 여전히 아저씨를 더 사랑해서. 울기 시작하니 다시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아저씨는 머뭇거리다 결국 내 등에 팔을 감고 나를 꽉 끌어안더니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너를 어떡하니, 나를 어떡하면 좋을까 제천아.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심장에 가장 먼저 닿는다. 아파트 복도 등이 꺼졌다. 우리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온기를 나누고만 있었다.
아저씨의 차던 몸이 슬슬 데워질 때쯤 나는 몸을 뗐다. 아저씨는 침울해 보였지만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 사귀는 거죠? 퉁퉁 부은 얼굴로 멋없지만 당당하게 물었다. 아저씨는 이제 기가 차 보였다. 어. 그러면서도 역시 대답은 잘했다. 너무 기뻐서 와! 하고 만세를 하며 소릴 내질렀다가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어? 하면서 눈앞이 흐려지는데 마지막으로 본 아저씨의 표정이 너무 하얗게 질려 있어서 애써 웃어줬던 것 같기도 하다.
***
눈을 뜨니 집 안이었다. 맛있는 냄새도 났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저씨가 꼭 제집인 양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 깼네. 무심한 얼굴로 나를 슥 보더니 부엌으로 가 그릇에 뭔가를 떠서 식탁에 놓았다. 깼으면 와. 수저까지 야무지게 챙겨줬다. 아직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슬리퍼를 직직 끌어 식탁으로 갔다. 제법 먹음직스러운 죽이 있길래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이게 다 뭐에요. 사 온 거. 그럼 그렇지…… 까치집이 된 머리를 헝클고 자리에 앉아 죽을 몇 술 떠서 입에 밀어 넣었다. 웃음이 샐샐 났다. 왜 웃어. 아니요, 맛있어서. 웃음을 싹 지우고 다시 한술 떠서 넣는다. 맛있어? 그럼요, 사 온 거라면서요. 맞아. 아저씨는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로 내 앞에 털썩 앉더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힐끔 본 표정이 좀 풀어져 있었다. 금세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 저 한 그릇 더 주세요. 진짜 맛있어? 그렇다니까요. 속고만 살았나. 아저씨의 귓바퀴가 묘하게 붉어졌다. 다시 가득 차서 돌아온 그릇에 숟가락을 푹푹 넣었다. 죽, 얼마나 남았어요? 한 그릇 정도 더. 그러면 저건 내일 아침에 먹을게요. 그러던가. 아저씨는 먹지 마세요. 환자 거는 안 뺏어 먹는다. 진짜 먹지 마세요. 알았다니까. 나는 집요하게 확답을 받아냈다. 아저씨는 아마 간을 보지 않아 몰랐겠지만 이런 걸 파는 거라고 내놓으면 금세 SNS에서 마녀사냥을 당할 게 틀림없었다. 늘 완벽하고 여유로워 보이기만 하던 아저씨의 새로운 모습이 달가웠다.
“배부르다.”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배부르지, 그럼.”
“알겠어요.”
“약은? 있어?”
“아마 있을걸요. 아까도 한 알 먹고 잤는데.”
“…이것도 같이 먹어.”
아저씨는 내 앞에 놓인 텅 빈 그릇과 수저를 가져가더니 물컵과 약을 내려놓았다. 아저씨 저랑 지금 장난해요? 아저씨가 내려놓은 약병에는 짱구처럼 땡글한 어린아이 캐릭터가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린이용 딸기 맛 해열제였다.
“…애가 먹을만한 약으로 달라고 했더니.”
“텐텐도 있네.”
“같이 넣어주던데.”
“열 살 이후로 처음 먹어봐요. 둘 다.”
“정말 좋겠다.”
“…네.”
어쨌든 집에 있던 감기약과 딸기 맛 해열제, 텐텐까지를 챙겨 먹고 나니 문득 오늘의 아저씨가 궁금해진다. 제 앞에 앉아 열심히 스크롤을 내리고 있는 아저씨의 정강이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왜.”
“나 얼마나 기다렸어요?”
“…별로 안 기다렸어.”
“… …”
“…”
아저씨는 또 입을 다물었다. 사귀면서 저놈의 버릇을 차차 고쳐나가 주지. 가늘게 눈을 뜨고 째려보자 아저씨는 손을 뻗어 내 눈을 통째로 덮었다. 자러 가자. 네? 자러 가자고. 나도 이제 출근 준비하러 집에 가야 하니까. 그리고는 내 몸을 일으켜 침대에다가 풀썩 앉혔다. 억지로 나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토닥토닥. 완벽한 육아 스킬에 문득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사실… 여덟 살이었던가.
“너 진짜 내일 출근할 수 있겠어?”
“우리 사귀는 거 맞죠?”
“응.”
“내일 봬요.”
“…그래.”
“사랑해요, 제 꿈꿔요.”
아저씨는 나를 힐끔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겉옷을 챙기더니 재빨리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아저씨의 반응에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너무 귀여워! 저게 어딜 봐서 마흔셋이야 진짜 얼어 죽을…… 이불을 팡팡 차다가 휴대폰을 켠다. 생각해보니 아까 아저씨에게 왔던 문자를 확인하지 못했었다.
[내일 출근 못 할 것 같으면 말해 내가 처리해 놓을게]
[자?]
[제천아]
제일 처음 온 문자는 내가 퇴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리고 두 번째 문자는 퇴근 후, 세 번째 문자는…… 아무래도 이걸 보낸 때가 우리 집 앞에 찾아왔던 때인가 보다. 술 먹고 찾아오는 사람은 세상 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저씨를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저씨는 겁쟁이니까, 술이 좀 필요했겠지.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전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은 두 번이 채 가기 전에 끝났다. 여보세요? 단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집에 잘 들어갔어요?”
“응. 너희 집이랑 우리 집 가깝잖아. 씻고 누웠어. 졸리다.”
“술 마셨으니까 더 그렇겠죠.”
“……얼마 안 마셨어.”
“한 병은 넘게 마셨을 거잖아요.”
“… …”
“아저씨, 저랑 왜 사귀는 거예요?”
“뭐?”
아저씨는 다소 어처구니없어 보였다. 물론 나도 질문하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본질은 담고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침묵이 오가는 통화를 일 분 넘게 이어가다가 다행히도 이번엔 아저씨가 먼저 말문을 텄다.
“……네가 아프지 말라며.”
“…”
“근데… …네가 나 안 좋아한다니까…… 아파서……”
졸음과 취기가 함께 몰려왔는지 뜨문뜨문 이어지는 말이 전부 처음으로 들은 날것의 진심이었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더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고요한 저편 너머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카톡보다는 문자를 고집하고 전화를 걸면 신호음은 세 번이 넘지 않게 받아주는 아저씨. 내가 가자는 곳은 다 가주고 흘려 말한 것조차 허투루 듣질 않는 아저씨. 입가에는 언제나 잔잔한 웃음이 머물러 있고 눈가에 작게 지는 주름은 부드럽기 그지없는 나의 아저씨.
나는 아저씨를 사랑하고, 아저씨도 나를 사랑한다. 겁을 내고 두려워했던 만큼 우리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두 번은 없을 것처럼 굴고 곧 죽어도 말 한마디를 지지 않던 아저씨가 기어코 내게 한 수를 접어줬으니 우리는 결국 괜찮아지지 않을까. 원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니까.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분명 괜찮을 거다. 아저씨는 사랑이 힘들다고 했지만, 나는 사랑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으니.
“좋은 꿈 꾸세요. 제가 계속 사랑할게요.”
아저씨의 밤이 안온하길 빌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 혹시라도 깰까 전화조차 조심스레 끊었다. 어둠에 까맣게 물든 흰색 천장을 응시하다 눈을 감는다. 밝아올 내일이 기대됐다.
댓글 2
안아주는 오리
아아... 좋다.............. 근데 이게 말이 되니? 내가 어떻게 너를 좋아해. <<<<<<<<이 부분 진짜.......눈물이 핑 돌아버리는.....착잡함, 약간의 절망감,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천대성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졌다는 것에서 사랑을 확인해버렸다는게 확-!! 와닿았어요ㅠㅠㅠ없어서 못먹는 제천독자 연성 너무너무 감사해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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