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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페 커미션 40. [carry] 크리스마스는 타지 않게 약불에 천천히 녹여서

1차 - 테리온x캐럴(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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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ry] 크리스마스는 타지 않게 약불에 천천히 녹여서

이 시기를 보낼 때면 늘 사방이 진창인 길을 어떻게든 걸어가야만 하는 것 같았다. 발이 푹푹 빠져 걷기 힘들고 발이 젖어 불쾌하며 발 전체를 진득하게 땅이 잡아끌지만, 어떻게든 걷지 않으면 그 진창이 늪으로 변해 저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선득한 느낌. 분명 진창길은 길지 않은데도 길이 끝나기 전까지는 천년이고 만년이고 영원할 것 같아서 진절머리가 났다.

캐럴은 그래서 매년 이 시기를 맨정신으로 보내지 않았다. 한참 비뚤어져 있을 때는 분노로 모든 감각을 태워버렸고 그다음엔 알코올로 감각을 다 절여버렸으며 지금은.

몽롱하면서도 허전한 느낌에 손으로 옆자리를 느리게 더듬었다. 부드러운 천 외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천천히 깨달으면서 캐럴의 미간이 어설피 찌푸려졌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눈 뜨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면 멀지 않은 곳에서 옷 스치는 소리가 났다. 화장실 간 것도 아니고 대체 방에서 뭘 하는 거야. 짜증 섞인 소리를 한 번 더 내면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 책상을 마련해주기는 했지만 쓸 일이 그리 많이 있을 리가 없는데, 답지 않게 책이라도 읽은 건가. 아 그래, 심심했다 이거지.

제 옆에 다시 눕는 테리온의 허리 같은 부분을 대충 끌어안으며 캐럴은 테리온의 등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프잖아.”

“잠이나 자자고 했잖아아.”

짜증과 졸음에 찌든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전혀 아프지 않은 목소리로 아프다니 괜히 한 번 더 꼬집어 줄까, 싶다.

“아니면 뭐어야. 나랑 있는 게 지겨워어?”

오지 않는 잠을 청해야 하는 테리온으로서는 지겨울 게 당연했지만, 캐럴은 절대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나름 테리온을 배려해 주던 건 평소에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시기의 캐럴은 그 누구를 생각하고 배려해 줄 여유 따위 전혀 없었다. 물론 캐럴이라면 너 같으면 안 지겹냐고 받아쳤을 질문이지만.

“아니, 자다 보니 다리에 쥐가 나서.”

“늙은이.”

“야.”

“이젠 괜찮지? 잠이나 자자, 핫팩.”

“이봐.”

“싫으면 유탄포 하던지…….”

바보 같은 테리온은 별 희한한 변명을 하면서도 아니라고 해주는 것이다. 유탄포가 뭐냐고 중얼거리는 게 제법 멍청하고 귀엽다니 자신이 역시 졸리긴 졸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쏟아지듯 잠이 오는 게 그저 도피일 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뭐 어떤가, 수면은 지금까지 이 시기를 견디는 방법 중 가장 온건하고 얌전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저보다 높은 테리온의 체온은 훌륭한 방파제였다.

잠으로 도망간다 해도 과거는 캐럴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그 꿈은 언제나 싸늘한 한기와 함께 찾아왔고 보지도 못한 광경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가끔 소중한 모든 것이 불타올라도 싸늘한 바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이불을 두텁게 덮어도, 아무리 벽난로의 불길을 지펴도 그 꿈은 한기와 함께 꿈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저보다 체온이 높은 테리온을 껴안고 자면 신기하게도 한기가 오지 않았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체온이 꿈에도 영향을 주는지, 테리온의 온기는 한기를 넘어 무의식까지 은근하게 덥혀주었다. 이럴 때 꾸는 꿈은 참으로 시시한 꿈이었다. 옛날 학교에서의 추억이 온갖 웃긴 변주로 나타난다던가, 자주 가는 술집에서 멍청한 난동꾼의 머리 위로 안주 그릇을 떨어트린다던가, 국적이 마구 섞였지만 일단 열대지방인 건 분명한 어떤 곳을 여행한다던가. 체취도 온기와 함께 넘어오는지 꿈에는 언제나 테리온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참으로 시시한 이유로 투덕거리다가 이유도 없이 화해하곤 했다. 참으로 얼빠진 꿈이었지만 이제는 캐럴도 순순히 인정할 수 있었다. 테리온이 나오는 꿈은 어쩌면 제법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렇게 캐럴로서는 지극히 논리적인 이유로 테리온의 방에 쳐들어가 그를 껴안고 잤다. 세월이 세월이긴 한 건지, 테리온은 갑자기 왜 이러냐고 험상궂은 얼굴로 짜증을 내는 대신 불만을 입 속으로 웅얼거리며 순순히 침대로 끌려갔다. 아무래도 이유를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제 속이 읽혔다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런 경우는 굳이 입에 이유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편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가끔 제 품에서 저절로 탈출한다는 점을 빼면 테리온은 꽤 훌륭한 다기능성 거대핫팩이었다.

그래, 제법 괜찮은 기능성 핫팩이지, 아니면 유탄포거나…….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캐럴은 다시 잠이 들었다. 꿈 없이 깊이 자는 꿈을 꾸면서.

그러나 그 잠도 오래가지 않았다. 꿈 없이 깊이 자던 자신은 갑자기 불어오는 찬 바람에 눈을 떴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면 제 방 한쪽 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그래, 부모님이 신경 써서 예쁘게 꾸민 가게가 푸른 불길에 타오르고 있는, 그런.

섬짓한 느낌에 눈을 뜨면 자신은 제 방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꿈이었구나. 정말이지 재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하며 캐럴은 짜증스레 머리를 벅벅 긁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떤 녀석들처럼 호그와트를 마냥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심심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게 일이야 심심할 틈이 없겠지만 지금은 가게 일을 배우고 싶지 않았다. 아직 자신은 청소년이다, 일은 어른이 되어서 배워도 되지 않는가? 그리 생각하며 캐럴은 아래층의 가게로 내려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계단을 밟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무서운 일이 아래층에 일어났다는 감이 왔다. 소름 끼치고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 하지만 캐럴은 멈출 수 없었다. 가고 싶지 않은 데도 다리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피비린내가 났다. 저 아래에, 무서운 것이 있다. 등 뒤로 온통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지 마. 가지 마. 가면 안 돼. 가면 안 돼. 캐럴은 소리쳤지만,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계단 너머로 조금씩 처참한 가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쏟아진 물건들, 깨진 병들과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탁한 색의 잉크, 찢어진 옷가지, 그리고, 도저히, 잉크라고 볼 수 없는 액체가 쓰러진 누군가의 발치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내밀면, 온몸이 난자당한,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의.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캐럴은 눈을 떴다. 또 꿈이었다. 캐럴은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너무 생생한 나머지 진짜 기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애초에 가게 위에 집이 있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무슨 꿈이 이따위야. 캐럴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소파에서 잠을 자니 이런 꿈을 꾸는 건가? 이게 다 테리온 때문이었다.

오늘은 테리온이나 괴롭히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캐럴은 시계를 봤다. 테리온이 집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캐럴은 테리온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방은 가지런히 정돈된 채 텅 비어있었다. 다른 곳곳을 살펴본 캐럴은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져서 테리온을 조금만 괴롭히기로 했다. 그야 집에 있는 테리온이 다른 어디에도 없다면 어디에 있겠는가? 제 방에 있겠지. 제 방에서 뭘 하는지는 몰라도 캐럴이 소파에서 자는 걸 알면서도 캐럴의 방에 있다는 것이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개는 키워본 적 없지만 사람 손을 잘 안 타는 커다란 멍멍이가 제 침대에 기어들어 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그래그래, 집 지키는 개도 집주인에겐 순순해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캐럴은 자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캐럴은 눈을 가늘게 떴다. 테리온이 보이지 않았다. 제 방에 있는 게 아니었나? 하지만 분명 집 안에 있을 텐데. 그러나 짜증은 곧 두려움으로 변했다. 침대 너머로부터, 천천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정돈하지 않은 이불과 잡동사니가 널려있다고 해도 쓰러지거나 엉망이 되지는 않았다. 집안에서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고 침입자의 낌새도 없었으며 테리온은 분명 집 안에 있다고, 시계가.

천천히, 두려움을 안고 캐럴은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방문에서 볼 때는 침대에 가려져 있던 반대편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머리카락에 가려져서도 알 수 있을 만큼 한쪽 머리가 짓이겨진, 보이는 곳 전부가 멍으로 뒤덮인, 그의 하나뿐인.

캐럴의 목에서 숨이 막혀 헐떡이는 소리가 났다. 아냐, 그럴 리가 없었다. 테리온은 강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마법도 제법 쓸 만하다고 할 수 있었으며 마법부의 문초를 견딜 만큼 정신력도 강했다. 루 브룩샤이어를 상대하는 게 아닌 이상은 한 번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아니, 저게 테리온일 리가 없었다. 아마도 마법적으로 테리온을 닮게 만든 무언가거나 자신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마법을 걸었거나, 하하, 설마 보가트일 리는 없고. 보가트라면 분명 테리온이 아니라.

하지만 시계는 테리온이 집에 있다고 했다.

우웩, 하고 토기가 치밀어올랐다. 현실부정과 현실증거가 캐럴의 속에서 어긋난 요철을 맞대며 긁는 소리를 냈다. 저게 정말 테리온이면 어떡하지? 테리온과 함께 사는 것이 발각되었을 때의 현실적인 문제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테리온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소름 끼치도록 어둡고 차갑게 피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테리온이 죽었다. 테리온이, 그, 테리온이……. 온몸을 찌르는 아픔에 캐럴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몸을 서서히 굽힐 때였다.

“자, 자, 괜찮아. 착하지.”

누군가가 뒤에서 저를 안아왔다. 온몸을 채우던 한기가 저를 안아오는 체온에 주춤거리며 숨결 새로 흘러나왔다. 캐럴이 뒤를 돌아보았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테리온…….”

“그래, 나 여깄어.”

“이 개새끼…….”

“미안, 미안. 이제 다 끝났으니까.”

“이 꼴로 놔두고 어디서.”

“바로 옆에 있었어. 이제 다 끝났으니까. 같이 자자.”

“거짓말하지 마, 나쁜 새끼야…….”

“진짜야, 다 끝났어.”

“또 이런 일 생기면 죽여버릴 거야…….”

“알았다니까. 따뜻하지?”

“지금, 따뜻한 게, 문제가…….”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천장과 바닥이 조금씩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쩐지 푹신한 것을 온몸에 두른 것 같은 느낌에 아무래도 좋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졸리면, 자면 된다. 캐럴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의식의 끝에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거기에 쏟을 정신은 이미 흩어져 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뜨면 침대 안이었다. 무언가 악몽과 악몽 아닌 꿈을 같이 꾼 것 같은데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악몽을 꿨다는 것은 테리온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니 어쨌든 괘씸했다. 얌전히 핫팩이 되기로 한 약속은 얻다 버렸단 말인가? 핫팩이면 핫팩답게 저가 잠을 다 자고 일어날 때까지 침대에 얌전히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테리온의 허리가 부서지든 방광이 터지든 그건 캐럴이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테리온은 제 옆에 얌전히 누워있어야 했다.

심지어 지금도 자리에 없다. 대체 뭘 하느라고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건가.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음식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끼니라도 만드는 모양이었지만 누가 해달라고 했던가? 캐럴이 해달라고 한 건 음식이 아니라 핫팩이다. 한 소리 쏘아줄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캐럴은 문득 제 손에 무언가 쥐여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심코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대면 보이는 것은 꼭 크리스마스의 붉은색과도 같은 빨간 편지 봉투였다.

“이게 뭐야?”

잠결에 약간 구깃구깃해진 봉투를 열면 안에는 특별한 구석 없이 단순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편지지 한 장과 노란색 보석이 들어간 와인색 서표 하나가 나왔다. 잠에서 덜 깬 머리로 서표 외에도 여러 장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네, 이건 등급이 낮은 황수정인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리던 캐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편지 봉투에는 단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캐럴에게, 테리온이.

“가짜지 이거? ……테리온이?”

그가 편지를 쓸 줄도 알았단 말인가? 그래, 물론, 쓸 줄 모르는 천치야 아니었지만 편지를? 테리온이? 흔적을 남기는 걸 죽어라 싫어하던 그놈이 말인가?

크리스마스 장식은 그다지 기분 좋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테리온이 무려 편지를 써서 잠든 자신의 손에 쥐어주었다는 것이 너무 큰 충격이라 호불호마저 잠시 잊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편지를 제게 준단 말인가? 혹시 헤어지자거나 나가 살겠다거나 하는 소리라도 적은 건가? 그런 말은 직접 하는 편이라는 걸 알면서도 캐럴은 허둥지둥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허탈하게도, 편지는 그냥 크리스마스 편지였다. 다분히 형식적인 문장들이 줄을 이었지만, 곳곳에 캐럴을 배려한 듯 위로 비슷한 이런저런 단어가 섞여 있었다. 서표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가다가 그럴듯해 보이길래 주워 왔다는 성의 없는 설명이 단 한 줄 적혀있었다. 한 장을 완전히 채우지도 못한 편지는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는 둥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인사말로 마무리되었다. 하다못해 추신 한 줄도 없는, 그냥 단순한 편지였다.

캐럴은 앓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세우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런 멍청이가 다 있나. 서표 색은 제 머리카락 색이고 보석은 테리온의 눈 색이었다. 보통은 서표 색과 보석 전부를 본인이나 상대방에게 맞춰서 주지 않나? 게다가 이런 서표는 테리온만 본 게 아니었다.

“멍청아, 이런 건 우리 가게에서도 팔던 거잖아…….”

애초에 다른 장식으로도 쓸 수 있는 서표를 제일 먼저 출시한 게 캐럴의 가게였다. 무슨 선물이 이따위람? 오다 주웠다는 괴상한 설명은 또 뭐고, 몇몇 구절만 빼면 이게 연인이 보낸 건지 다른 사람이 보낸 건지도 모를 내용은 또 뭐란 말인가.

캐럴은 무릎에서 머리를 떼고 편지만을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살짝 구겨진 봉투와 편지를 손으로 몇 번이고 매만졌다. 하지만 아무리 눌러도 구겨진 게 바로 펴지지 않았다. 캐럴은 한참을 매만지다 천장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어쩐지, 편지에서 가족의 흔적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테리온은 현재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비록 캐럴이 자는 동안에 몰래 편지를 쓰느라 악몽을 꿀 때까지 내버려 두어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잘 달래서 이번 크리스마스도 무사히 보냈다. 달랠 때는 뭔가 핀트가 안 맞는 대화를 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악몽에서 벗어나 깊게 잠든 것 같았으니까, 그거면 된 거다.

게다가 눈치를 보아하니 ‘적당한’ 정도의 크리스마스 편지와 선물도 제법 맘에 든 것 같았다. 테리온은 기쁨을 넘어 성취감마저 느꼈다. 그래, 편지도 선물도 은근하고 무난하게 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다지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고 캐럴에게 익숙하면서도 어쨌든 예쁘기는 한 물건을 찾느라 제법 고생했다. 연인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인데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없어야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기는 해야 한다니, 이 무슨 아메리카노 뜨거운 걸 너무 뜨거우면 안 되지만 따뜻해서 빨리 식지도 않을 정도로 적당히 내려달라는 소리냔 말이다.

그러나 테리온은 그것을 해내고야 말았다. 그래, 비록 일주일에 일곱 번쯤 싸운다지만 그래도 그들은 연인이 아닌가. 크리스마스다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좀 이상할 터였다. 캐럴이 듣는다면 개가 짖는 소리 취급하고 넘어가겠지만 테리온은 어떻게든 크리스마스에 연인다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캐럴은 지금, ‘한 번도 달라고 한 적도 없고 필요하다고 한 적도 없지만 어쨌든 선물을 받기는 받았으니까, 사람이라면 답례라는 걸 해야 하므로’ 주방에 들어가 있었다. 평소엔 얼씬도 않던 곳을 마법약을 만든답시고 단지며 재료를 마구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냥 거실이나 자기 방에서 만들어도 되지 않냐고 물어보니 거실은 테리온이 있어서 안 되고 자기 방은 더러워지는 게 싫다나. 주방은 더러워져도 되냐는 의문에는 주방은 네가 청소하지 않느냐는 자기본위적으로는 매우 타당한 대답을 들었다. 어머니의 날에 선물을 만들어 주겠답시고 온 집안을 어지럽히는 자식을 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있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있지 않을 자식을 기르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으나 테리온은 잔소리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답례라는 걸 해준다지 않은가. 이쯤 되면 기특한 발전이었다. 그래서 주방에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도 얌전히 듣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꾸러미를 한 아름 가져가는 것도 모른척했다.

곁눈으로 본 꾸러미는 컸다. 재료의 양이 많아 보였으니 약을 대량으로 만들 셈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수면제를 만들어 주는 것일 테지. 테리온의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없어야 하지만 마음에는 드는’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썩 잘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그게 평범한 수면제든 살아있는 죽음의 약이든 테리온은 기꺼이 쓸 생각이었다.

홀로 카드놀이를 하며 흐뭇하게 기다리는데, 주방에서 뭔가가 작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뭔가 수면제 만들 때 나는 냄새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이질적인 냄새가 났다. 수면제 재료에 움직이는 건 없을 텐데, 뭘 만드는 거지? 테리온이 주방까지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뭘 만들길래 움직이는 걸 써? 미리 살짝 기절시킨 걸로 사 오지 그랬어?”

그렇게 자상하게 조언해 주면 친절한 대답이 돌아왔다.

“닥쳐!”

정겹기도 하지. 욕을 들었음에도 테리온은 즐겁게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팔팔한 걸 보니 다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뭐, 마법약 실력은 저보다 뛰어난 녀석이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카드놀이도 지겨워진 테리온은 뭘 하며 기다릴지 고민하며 점점 변해가는 냄새를 즐겁게, 보다 열심히 무시했다. 한 가지 약을 대량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약을 만드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지만 갖가지 냄새 사이에서 특이한 냄새를 맡은 순간, 테리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재료가 끓는 냄새였다. 테리온이 아는 한, ‘그’ 재료는 거의 대부분 한 가지 성능에만 쓰였다. 그래, 주로 정력 감퇴와 관련된…….

테리온은 우렁차게 외치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캐럴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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