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꾼의 공현

떨리는 활시위는 필시 과녁을 빗맞추는 법이다.

화양연화전 by 숩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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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사냐. 릴 인벤토리 수업은 아주 제대로 해 줄게.

9층의 시험은 팀 대항전이었다. 승리 조건은 상대팀 전원을 섬멸하는 것.

사냐가 서 있는 높은 절벽 위는 시험장이 한눈에 담겨 완전한 창지기의 자리였다. 이번 시험을 우세로 만든 큰 이유 중 하나다. 손쉽게 저격수 확보한 팀은 쉽게 전투를 이어갔다. 아까 우리프와 제르엣이 마지막 등대지기를 죽였으니, 이제 남은 인원은..

[...사냐, 사냐! 아까 우리프가 놓친 탐색꾼이 그대로 후방으로 숨어들었나 봐. 조심해.]

“뭐? 에스더, 그 탐색꾼은 중앙광장을 마지막으로 등대를 따돌렸...”

[..뒤, 뒤에! 사냐!]

“큭..!”

탐색꾼의 칼과 창이 맞부딪친다. 정적 속에서 투창만 하던 사냐의 귀에 찢길듯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진다.

익숙해진 전격이 자연스레 전신을 휘감는다. 탐색꾼이 가시모드한 아머 인벤토리에 휘둘러진 발이 막혀 애꿎은 신수만 파직거렸다.

“윽! 너, 아까 놓친 쥐새끼구나!”

아머 인벤토리를 밟고 도약해 상대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뒤집어진 시야에 갑옷 아래의 연약한 목덜미가 보였다. 9층까지의 시험으로 단련한 푸른 신수는 더욱 날렵해졌다. 번쩍거리는 푸른 전격을 따라 릴이 감긴 니들이 날카롭게 미끄러진다.

“….”

전격을 담은 니들이 살갗을 뚫고 나왔다. 검붉은 피가 낭자하게 흩뿌려진 가운데 상대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역겹다. 피투성이 니들을 끌어 손에 쥐며 표정을 찌푸린다.

9층, 시험의 승자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10층으로 올라가는 게이트에 쿤 사냐 소테리아가 있다.

“사냐! 거기서 뭘 하고 있어? 인사 덜했나?“

“사냐. 빨리 와! 짐을 엘브가 다 들기에는 너무 많아 보여….”

시험을 끝낸 직후, 정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10층에서 라온이 팀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어쩐지 받은 편지에 10가문 친구가 없단 이야길 하더니만, 정이랑 별로 친해지질 않았나…하고 넘겼더니. 뭐, 어렵지 않게 새 동료들을 만난 것 같던데..잘 살아있겠지? 그 얘.

“에, 엘브!! 이 이상 올리면 무너질 것 같은데요…!!”

“으..으아아아!!용달아, 간지럽히지 마….으학!”

우당탕탕..결국 상자의 탑이 절반 넘게 쓰러졌다. 9층까지 탑을 오른 결과 단언할 수 있는건 포 비더 엘브멕은 낙오자가 맞다는 것이다. 포비더의 자제란 사람들은 전부 다소곳하니 재미없게 생겼는데, 혼자서 도박의 아찔함을 즐기고 담배가 없는 삶의 공허함에 몸부림치다니….입으로 한숨 한 번, 속으로 다짐 한 번 되새기고 가까이 다가갔다.

“사, 사, 사 사냐..용달이가 손에서 요동쳐 사냐…!”

“자잠만 길아! 절대 찌그러뜨리면 안돼!”

“둘 다 진짜 뭐해? 빨리 용달이 어항에 넣어. 게이트에 들어갈 때도 자유분방하게 다니면 위험하잖아. 누가 잡아가면 어떡할거야!"

“으윽…너무해… 어항에 안 들어가는건 순전히 용달이 마음이라고…”

궁시렁대는 엘브를 뒤로하고 마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엘브는 이미 자신의 키를 훌쩍 넘게 박스를 쌓아 들고있다. 9층까지의 시험을 통과하며 살림이 너무 커져버렸나. 이 층에 발을 들일땐 더 많았는데..

“…”

“그러고 보니 사냐, 인사는 다 끝냈어?”

“ 으응, 뭐 대충…”

“음~?뭐 걸리는 게 있나봐? 아아..아쉽다던가?”

“사냐,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몇십년간은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런가?”

“뭔데? 뭔데요 엘브?”

“..잠깐 기다려봐, 그럼 인사만 제대로 하고 올께!”

어..어어? 뭔데 사냐?! 다녀오면 꼭 말해줘야 해!

으하하하, 사냐 힘내라~좀 더 친해져서 돈도 팍팍 빌리게!

익숙한 9층의 숙소 앞.

우리프와 에스더, 제르엣만 남은 숙소는 어딘가 차분하고 조용했다. 2층에서부터 시종일관 투닥거리며 지내와서 그런지, 그 몇 분 사이에 낯선 곳이 되어버려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동료를 찾으러 탑에 들어온 자에겐 현실을 납득하게 되는 것 같다고나 할까.

…10층에 올라가면, 마리한테 연락해야지. 어김없이 에스더는 식탁에서 차를 마시고 있고, 옆 소파에 앉아 칼을 손보고있던 제르엣과 눈이 마주쳤다.

“..으음..? 사냐? ..아까 나가지 않았었나?”

“할 말이 있어서. 우리프는?”

“!!..방…방에 있을걸? 아마..?”

“사냐. 다시 돌아온 거야?”

뒤에서 더욱 굳어버린 제르엣을 눈치채지 못하고 시선을 돌린다. 3층 이후로 우리프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피를 씻어낸 참이었는지 조금 길게 늘어뜨린 푸른 머리칼에서 물이 똑똑 떨어진다.

“우리프, 그….”

“널….”

생각했던 말은 역시나 나오지 않는다. 사실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조차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너는 내가 예쁘다고, 좋다고 했고. 나보다 훨씬 강하고 아쉬울 게 없을 텐데도 나여서 좋다고…. 그렇다면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으로서 알맞지 않을까, 네가? 하지만 마리는 가족이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존재라 했었다. 또한 온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것.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마에 입을 맞추며 저에게 사랑한다 말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분홍색 눈을 감춘 눈꺼풀에 키스하며 사랑한다 읆조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떠올리게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말을 쉽게 건네고 까무룩 잊어버린 이 또한 너였으니까. 지난 10년간 깨달은 것이 있다면 홀로 열망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은 확신이 부족하다. 팽팽히 당긴 활시위를 놓아버리기엔 너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렇지만 10층에서 멀어진 뒤에, 자신 몰래 더욱 길게 늘여뜨려질 푸른 머리칼을 생각하니 활시위를 당긴 손이 조금 조급해졌다.

“..사냐?”

검붉은 눈꺼풀이 깜박거린다. 살면서 봐온 색채들 중 네 눈빛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살며시 귀 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부드럽게 당겨 아름다운 옥빛 눈을 감춘 눈꺼풀에 키스했다.

입술에 닿는 살갗에 까치발을 든 발끝을 헛디딜 뻔했다.

“죽지 마. 위에서 보자.”

더욱 조각처럼 굳어버린 제르엣에게 손을 흔들고, 입이 떡 벌어져 멈춰버린 에스더에게 눈인사를 하고 숙소를 나왔다.

그럼, 이제 탑을 오르다 보면 언젠가 보게 되겠구나. 라온이 새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떠나는 걸음이 빨라진다. 느릿하게 걷던 두 발은 점점 빨라져 게이트의 푸르른 빛이 보일 쯤에는 턱까지 숨이 차올랐다.

“사냐아..제발 이것좀 들어줘, 제발…이건 고문이라고..”

“진짜아, 엘브! 사냐가 들 짐보다는 적거든요? 어휴, 잠자코 가자구요!“

“그냥 이리 줘, 게이트만 넘으면 다음 숙소까지는 금방이니까.”

“고마워! 헤헤, 그럼 여기 이 가방만… 어라, 얼굴이 빨갛다, 사냐.”

“..짐 이리 내놔.”

“!!사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말해주는거야?”

“조..조금! 조금 있다가!“

길이와 엘브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상태론 활시위를 놓쳤을지, 애매하게 붙잡았을지조차 알아낼 수가 없었다. 상대가 알아채었을지 마저 의문이었다.

그래도 계속 탑을 오를 것이다. 이젠 잡을 수 없는 사냥감도 목표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아득바득 쫓기로 했다.

헤돈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와는 사뭇 다르지만, 정상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나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찾으려 탑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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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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