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으로서의 귀향

쿤 사냐 소테리아 과거로그

내 머리 위의 바다를 올려다보면 하얀 거품 사이

내게 쏟아지는 윤슬

저기 저 바닷속을 날아다니는 새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땅 위에 고인 하늘에 발을 담근 나는

또 어디로 가는가

알을 낳기 위해

생살을 불태우며 물길을 거스르는 연어

온기를 찾아

뼈마디가 저리도록 하늘을 가로지르는 철새

내가 정녕 그들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내가 정녕 그들보다 나의 길을 알고 가는지

내 머리 위의 바다에게 묻는다

아!

그대는 쏟아져라

걸음마다 빛으로 젖어도 좋으니 그대는 그저 내게 하염없이 쏟아져라

_______________________

- 「윤슬」

탑 깊은 곳, 모든 사람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그 마을에서 그는 아버지와 더불어 유이(唯二)하게 푸른빛을 머금은 존재였다. 그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었다. 쿤 사냐 소테르. 파란 꼬마. 소테리아의 딸. 그중 사냐가 가장 맘에 들어한 것은 마지막 호칭이었다.

어린 나이에 흐릿한 기억에서 가장 선명한 것을 꼽으라면 단언 자신의 어머니가 ‘소테리아’가 된 순간이리라.

사냐의 고향 마을인 ‘소테르’에서는 10년에 한 번 ‘소테리아’라는 영광된 성을 걸고 사냥 대회를 개최했다. 그 대회의 우승자는 푸른 월계관과 소테리아라는 성을 하사받고, 마을의 정예 군인이 될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다. 월계관을 쓰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 이는 소테르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50살이 넘은 중년마저 소테리아가 되는 꿈을 잊지 못해 10년마다 계속 도전하기도 했다. 그만큼 사냥 대회의 위상은 마을에서 절대적이었다.

대회가 주최되는 장소인 소테르의 숲은 매우 울창하고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그만큼 미지의 공포와 위험이 뚜렷하게 도사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남들보다 가장 많은 사냥감을 가지고 무사히 귀환하리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10년에 한 번, 누군가는 그런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바로 사냐의 어머니인 로멜리베가 그러했다. 그는 가장 최근에 개최된 사냥 대회에서 소테리아가 되었다. 사냐는 그 순간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4미터 정도 되는 알록달록한 꽃 기둥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냥 대회가 개최될 동안 모두의 무사 귀환을 빌며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모여 엮은 순수한 꽃 기둥이었다. 기둥에 묶인 하얀 천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허공에 살랑였다.

그날 마을의 모든 사람은 하얀 전통 의상을 입고 광장에 모였다. 그중 주인공인 로멜리베의 옷이 가장 새하얗고 길었다. 로멜리베는 의식을 거행하는 마을의 촌장 앞에 가 거룩하게 무릎 꿇었다. 그의 곱슬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꽃 기둥의 꽃처럼 한 데 어우러졌다.

“로멜리베 소테르, 그대는 앞으로 로멜리베 소테리아가 되어 이 마을을 수호할 것입니다....”

사냐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아버지의 바지춤에 꼭 매달려 지켜보았다. 꼭 자신이 촌장 앞에 무릎을 꿇은 듯 사냐의 작은 심장이 크게 쿵쿵거렸다.

“받듭니다.”

푸르른 월계관이 로멜리베의 분홍빛 머리에 올려졌다. 월계관을 쓴 로멜리베는 자리에서 일어나 촌장 옆에 서 새로운 소테리아의 탄생을 알렸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사냐와 아버지 또한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로멜리베의 눈은 올곧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모습이란 완연한 소테리아였다. 사냐의 어린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자신은 절대로 이 순간을 잊지 못하리란 오묘한 확신을 가지고서.

“빌어먹을.”

스무 살이 된 사냐는 머리를 낮게 질끈 묶고서 초조하게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의 발치엔 덫이 놓여 있었다. 그건 들개나 사슴 같은 동물을 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번엔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물려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완전히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으, 맙소사. 제기랄.”

들개가 파먹은 듯한 토끼는 온몸이 헤집어져 있었다. 피가 낭자한 광경에 사냐가 오만상을 쓰며 덫을 조심스럽게 벌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사냥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해온 일이었지 만, 이렇게 가끔 비위 상할 때가 있었다. 사냐는 맹수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토끼 사체를 대충 땅에 묻어 해치웠다. 그때 멀리서 아버지가 사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갈게!”

사냐는 다른 덫에 걸려 있던 사냥감들을 질질 끌며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이것은 사냐의 별 볼 일 없는 저녁의 일상.

“이번 덫은 영 별로인 것 같아. 지나치게 위험하기도 하고.”

온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할 때 테이블의 맨 끝에 앉은 아버지가 말했다. 사냐는 속으로 동의하며 토끼 스튜를 한 숟갈 크게 입에 넣었다.

“난 늘 덫이 별로라고 생각했어. 사냥은 손으로 해야 제맛이지.”

“당신은 소테리아잖아, 여보.”

“그러는 당신은 쿤이고.”

어머니, 로멜리베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버지는 못 말린단 듯 따라 웃을 뿐이었다. 그런 둘 사이에 낀 사냐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눈을 보란 듯 크게 굴렸다. 부모님은 그런 사냐를 보고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똑같이 사냐에게 보란 듯 자기들끼리 ‘우리 딸 하는 것 좀 봐.’ ‘아직 사춘기인 게지.’ 같은 말을 장난스럽게 속삭일 뿐이었다. 그걸 들은 사냐는 더 크게 눈을 굴리려다가 결국 2 대 1의 싸움이란 걸 깨닫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럼 반은 쿤이고 반은 소테리아인 내가 이 가족 중 최강이네.”

사냐가 장난스럽게 으스댔다. 그걸 들은 로멜리베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냐는 미소 지으며 토끼 스튜를 한 입 떠먹었다. 문득 조금 전에 보았던 토끼 사체가 떠올랐다.

아, 속 안 좋다.

쿤 사냐 소테르는 마을에서 가장 발이 넓은 젊은이였다. 그는 누구보다 친구가 많았고, 모두에게 신임받는 인재였다. 위대한 가문인 쿤과 소테리아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그를 향한 기대와 신뢰는 당연했다. 하지만 사냐는 당연하게 그러한 관심을 받으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으론 늘 그게 석연치 않았다.

10살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사냐의 마음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했다. 한시도 가라앉은 적이 없었다. 그러한 마음은 사냐에게 늘 용기와 대담함을 불어넣어 주었으나, 동시에 늘 위태롭기도 했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 사냐는 그게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쿤 사냐 소테르는 어긋나 있었다. 고향인 소테르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자신의 모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마을에서 눈에 띄는 연푸른빛 머리카락. 친구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이름 앞에 붙는 또 다른 성.

다른 아이들이 겨우 몇 마디 자랄 때 사냐는 보름마다 한 뼘씩 자라났으며, 또래 아이들 중 누구보다 검을 빠르게 휘두를 줄 알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다람쥐처럼 날쌔고 멧돼지처럼 강했다. 혹자는 그러한 사냐의 모습을 칭찬했으나 그럴 때마다 사냐는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역시 쿤과 소테리아의 딸이라니까!”

하지만 나는 진정한 쿤도, 소테리아도 아닌데요.

쿤 그 자체인 아버지와 달리 반쪽짜리 혈통. 제 힘으로 소테리아가 된 강인한 어머니와 달리 여전히 흔한 소테르인 자신.

그게 견딜 수 없었던 날도 있었다.

어린 시절, 10살도 되지 못했을 때. 마을의 한 못돼먹은 녀석 하나가 사냐의 푸른빛 머리를 물고 늘어진 적이 있었다. 돌연변이라느니, 외부인이라느니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비난이 쏟아졌다. 그날 사냐는 그 녀석을 흠씬 패주었다. 하지만 상처받은 마음은 낫지 않았고, 두 아이는 모두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푸른 머리카락은 사냐의 오래된 약점 중 하나였다.

“정말 싫어.”

눈물로 짓무른 얼굴로 사냐가 제 머리카락을 붙잡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흐릿한 푸른색 머리카락.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사냐는 선반에서 물감을 꺼내 자신의 머리끝을 분홍색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덧칠해도 어머니가 가진 부드러운 분홍빛은 나오지 않았다. 사냐는 또 그게 서러워 다시 엉엉 울었다.

그날따라 집에 늦게 들어온 부모님은 해괴망측한 꼴을 하고 있는 자기네들의 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사냐가 못돼먹은 녀석과 싸운 이야기를 듣고는 겨우 사냐를 진정시켜 침대에 앉혔다. 아버지가 물었다.

“그래서 이겼니?”

“응.”

“그런데 왜 네 머리한테 이런 짓을 했어? 머리끝이 다 상했잖아.”

“걔가 나더러 퍼랭이라고 하잖아!”

엄마는 벚꽃 같고, 아빠는 파란 천장 같은데. 왜 나만 머리 색이 이래? 누가 밟고 지나간 눈덩이 같아. 사냐가 서럽게 울었다.

“사냐, 우리 아가.”

로멜리베가 짐짓 당혹스런 눈빛으로 사냐를 꼭 껴안았다. 그는 분홍색 물감으로 더러워진 사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엄마 머리는 분홍색이지만, 엄만 사실 푸른색을 가장 좋아해. 네 머리 색이 뭐 어때서? 시원한 구름빛깔이잖니.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야.”

“.......”

로멜리베가 사냐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그 품에 안겨 사냐는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푸른색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날 이후 사냐가 자신의 머리색을 가지고 투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종종 아버지를 졸라 쿤 가문 이야기를 들었고, 늘 주변으로부터 괴리감을 느꼈다. 파란 꼬마. 쿤 사냐 소테르.

그는 풍선처럼 늘 불안한 존재였다.

“나, 이번 대회에 참가하려고.”

어느날 아침 사냐가 밥을 먹으며 선언했다. 이번 대회라 함은 당연히 10년마다 개최되는 사냥 대회였다. 그러자 부모님의 눈에 여러 감정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뭐야? 4번 연속 떨어진 티티 영감님도 또 참가한다잖아. 솔직히 영감님보단 내가 낫지. 안 그래? 뛰다가 넘어지지나 않으시면 다행이지. 와, 벌써 한 명 제꼈네!”

사냐는 소테리아의 딸인 자신이 소테리아가 되지 못하면 누가 되냐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부모님은 그런 사냐가 갑작스럽다고 말했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사냐는 오래전부터 이 대회를 기다려 왔었다. 어머니가 소테리아가 됐을 때부터. 어쩌면 그 전보다 훨씬 오래되게....

소테리아는 소테르 마을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머니를 따라 소테리아가 된다면 자신 또한 온전히 이곳에 속할 수 있으리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반쪽짜리 쿤이나 어머니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소테르라는 성은 이제 필요 없었다. 그는 소테리아가 될 것이다. 소테리아가 돼서, 그래, 분홍색 머리 끈과 리본으로 굳이 몸을 치장하지 않아도 그만의 ‘분홍색’을 갖고야 말 것이다. 그리하면 이 오래된 불안함도 사라지리라.

결국 사냐는 자신의 바람대로 사냥 대회의 출발선에 섰다. 조금 쌀쌀한 초가을이었다. 사냐는 여유로운 척 자신의 검은 창을 휘두르며 웃었다. 하지만 입은 도저히 벌릴 수 없었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이 심장이 입을 벌렸다간 그대로 튀어나갈 것 같아서.

그는 매우 초조했다. 이 대회는 사냐의 인생을 결정할 터였다. 이번에 우승하지 못한다면, 티티 영감님처럼 또 10년을 기다려 다음 대회에 참가해야겠지. 그러면 그 10년은 또 얼마나 외롭고 불안할 것인가? 10년 전, 오늘 패배한 기억으로 또 패배한다면? 그럼 또 그렇게 제2의 티티 영감님이 되어 살아가나?

죽어도 그렇게는 안 되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쿤과 소테리아의 딸이었다. 이번 소테리아는 자신이 되어야만 했다.

경적이 울리고, 대회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뛰쳐나간 사냐는 숲의 깊숙한 곳으로 곧장 달려 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꿰뚫었다. 토끼. 사슴. 족제비. 아니면 들개. 평소엔 조금 무섭고 꺼리던 것들도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사냐가 숲을 빠르게 돌파할수록 그의 사냥감을 담는 등대는 묵직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더욱 초조해졌다. 볼라이트가 식고 천장이 어둡게 물들면 사냥 대회는 끝난다. 그러기까지 앞으로 몇 시간.

자신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게 맞을까? 숲에 들어오며 표시해두었던 표식은 그대로 있을까? 나보다 강한 녀석은 없어.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옆집 틸리네는 늘 나보다 요령 좋게 사냥감을 잡았는데.... 만약 틸리네가 나보다 더 앞서가고 있으면 어떡하지......?

“헉.”

분명 단단한 대지를 디뎠어야 할 발이 허공으로 푹 꺼졌다. 당황한 사냐의 눈이 한계까지 뜨였다. 몸이 크게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었다. 창을 땅에 꽂기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사냐는 그대로 절벽 밑으로 추락했다.

“.......”

처음 느껴보는 큰 충격에 사냐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다. 귓가에서 이명이 웅웅대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냐는 창을 지팡이 삼아 쓰러진 몸을 정신없이 일으켰다. 어서 빨리 절벽 위로 올라가야-

“.......”

순간 사냐의 몸이 조각처럼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등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자신이 멧돼지 떼 에 포위되어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상아색 엄니가 볼라이트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한 마리라면 모를까, 이렇게 포위된 상태로는 사냐도 별 도리가 없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사냐, 우리 아가.’

어머니 로멜리베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그때 가장 앞에 서 있던 멧돼지 하나가 사냐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사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넌 누구보다 특별한 아이야.’

정말 내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어떤 힘이든, 제발....

“모두 꺼져버려!”

사냐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어떤 차가운 소름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심장의 혈관 하나가 튀어나간 것 같았다. 동시에 푸른 전격이 화살처럼 허공을 가르고 멧돼지 떼를 향해 날아갔다.

“.......”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해 사냥 대회의 우승자가 결정나는 순간이었다.

“쿤 사냐 소테르, 그대는 앞으로 쿤 사냐 소테리아가 되어 이 마을을 수호할 것입니다....”

봄날이었던 어머니의 월계관 수여식과는 달리 단풍이 드는 가을날이었다. 눈처럼 하얗고 긴 전통 의상을 입은 사냐는 촌장의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축복을 받았다. 스무살. 사냐의 구름빛 머리카락에 마찬가지로 푸르른 월계관이 얹어졌다. 사냐는 고개를 들고 광장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어머니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어렸을 적 사냐를 괴롭히다가 그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못돼먹었던 남자애도 섞여 있었다. 모두가 그를 축복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사냐가 그토록 원하던 문신-상징-을 그의 팔에 새겨주었다.

“결국 너도 그 인간의 피를 이어받았구나, 사냐.”

그건 칭찬이었을까? 아니면 안타까움이었을까? 사냐가 얼얼한 팔을 문질렀다.

온 마을과 가족의 축하를 받은 사냐는 자신이 가져온 사냥감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인 후 지친 몸과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죽을 뻔했던 정신은 무척 초췌했으나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몸을 뒤척여 침대 옆 선반에 놓여져 있던 영광의 월계관을 집어들었다. 월계관이 창백한 볼라이트빛을 받아 반짝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토록 열망하던 것이 그냥 푸른 관처럼만 보였다.

“.......”

사냐는 자신이 승자가 된 순간을 회상했다.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던 그 전격. 아버지는 그게 ‘쿤’의 상징 중 하나라고 했다. 사냐는 쿤답게 번개의 권능을 사용했고, 어머니처럼 자랑스러운 소테리아가 되었다. 이보다 완벽한 마을의 수호자는 없을 터였다. 그래,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 않아.

사냐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몸을 웅크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그를 감쌌다. 그저 색색- 내뱉는 숨소리만이 들렸다.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사냐는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창과 겉옷 하나만 걸치고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나갔다. 그의 집 뒷마당은 온 마을의 축하로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가득 차 있었다. 사냐는 선물들을 힐긋거리다 마당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는 사냥 대회가 이뤄졌던 숲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소테리아가 됐다. 쿤 사냐 소테리아.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지독한 허무감이 그를 덮친다. 10년이 넘도록 원했던 것을 손에 쥐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풍선이자 강에 홀로 남겨진 연어였다.

그래, 그냥 이젠 이렇게....

“고민이 있어 보이시는군요, 소녀분.”

사냐가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창 끝에 닿은 존재는 한 번도 상상하지도, 본 적도 없는 형태였다. 사냐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창 끝이 스르르 내려왔다. 상대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알 수 없는 아득한 신성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신적인 존재였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허무감을 끝내고 싶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녀분에게 모든 걸 보여드리죠. 이 탑의 모든 것을 말입니다. 그저 제 손을 잡기만 하시면 됩니다.”

사냐는 신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도약이자 모험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사냐는 2층의 갈대밭에 서 있었다. 늘 잔디와 꽃으로 가득한 평화로운 고향마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부모님께 말도 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이 모험이 과연 자신에게 독으로 돌아올지 사냐는 두려워졌다. 하지만 그의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올 곧고, 뚜렷한 빛깔이었다. 마치 어머니 로멜리베처럼 말이다.

가지고 있는 건 창과 늘 갖고 다녔던 간략한 짐뿐. 그는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섰다. 사냐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한 발짝 발을 내딛었다.

풍선은 터졌다. 이젠 새로움을 향한 기대만이 남았다. 그는 이제 바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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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연어가 고향을 벗어나 바다로 향하는 것은 본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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