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벽(雙璧): 이정환

The one who remained

자급자족 by 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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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xiZSrjgkMI?si=h6arhaba1wiheJEb

겨울이 한복판임을 알리는 듯이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술집의 창문은 실내와 바깥의 온도 차로 인해 창문마다 두껍게 김이 서려 있었다. 연말을 맞이해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듯해 보였다. 다만 가장 구석 자리에 있는 작은 테이블 하나는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장정 둘이 앉기에는 비좁은 테이블이었다. 그 테이블 위에 한 남자는 술에 취했는지 팔 위에 고개를 묻은 채 몸을 웅그리고 있었고 다른 한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홀짝홀짝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빈 술병이 서너 개. 혼자 술잔을 비우는 남자는 잔이 비면 혼자 그 잔을 채우고 맞은 편에 큰 몸을 웅그리고 있는 남자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자냐?”

술잔을 내려놓고 더는 안되겠다는 듯 앉아 있던 남자가 손을 가져가 웅그린 남자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몸이 흔들리니 감겼던 눈이 저절로 떠졌다. 어깨를 흔든 손이 보였다. 사내의 손 치고는 가녀리고 희고 고왔다. 다만 손바닥 군데군데에 박인 굳은살들은 그가 손을 생김새만큼 곱게 쓰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굳은살이 어쩐지 거슬렸다. 그래서 웅그리고 있던 몸을 살며시 풀고 손을 가져가 그 하얀 손을 잡았다. 태닝 된 피부의 색과 대조되어 더 희게 보였다. 그의 손에도 굳은살이 있었다. 이상하지? 제 손에 있는 굳은살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이 흰 손에 있는 굳은살은 왜 그리 거슬리는지 말이야. 엄지를 쓸어 굳은살을 만졌다. 단단하다. 그 바람에 손의 주인이 놓으라는 듯 팔에 힘을 주어 손을 빼내려 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에 더 힘을 주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내리고 있던 고개를 돌려 맞은 편에 앉은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변하지 않았다. 갈색의 찰랑거리는 머리. 저 머리카락 뒤 왼쪽 이마에 있을 상처.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그리고 그 피부보다 더 빛나는 눈빛, 수겸은 1년 동안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교 시절 그대로였다.

“일어나, 이정환. 취했어.”

고개를 저었다. 취하지 않았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치고 취하지 아니한 사람은 없다고 그랬는데, 지금 자신이 그 짝이려나. 수겸의 손을 잡은 채 정환이 다시 엎드렸다. 수겸이 손을 빼내지 못하게 힘을 주었다. 그러고 눈을 감고 잠시 옛일을 떠올렸다.

정환이 그리고 수겸이 서로 쌍벽으로 불리던 그 시절.

 

 

***

쌍벽(雙璧). 두 개의 구슬. 여럿 가운데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둘. 정환과 수겸은 그렇게 불렸다. 동 학년에 같은 포지션. 하지만 서로 경쟁하는 학교. 물론 상양이 일방적으로 해남을 쫓는, 1인자의 해남 그리고 2인자의 상양이었지만 말이다. 당시 고교 농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정환과 김수겸을 항상 한 쌍으로 생각했다.

정환이 처음 수겸을 만났을 때는 조금 특이한 존재로 여겼다. 운동선수답지 않은 곱상한 외모와 앳된 얼굴. 고 1의 정환은 혹시 1년 꿇은 거냐고 친구들이 놀리곤 했는데 수겸은 정환과 다르게 꽤 동안의 얼굴이었다. 간혹 그런 부모들이 있다고 들었다. 학교에 1년이라도 일찍 보내기 위해 생일을 앞당겨서 입학시키는 그런 일. 수겸도 혹시 그런 것일지 싶었다. 아무리 봐도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간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수겸의 체격, 자신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팔다리로 40분 동안 코트 위를 달릴 수가 있나? 물론 덩치가 좋다고 하여 경기력이 더 좋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보나 마나 후보이겠지. 정환은 그리 넘겨짚었다.

아무튼 예상을 깨는 아이였다. 경기 시작 전 코트 위로 주전들이 몸을 풀러 올라오는 데 그사이에 수겸이 있었다. 정환은 눈으로 상양의 선수들을 하나씩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13번의 김수겸. 나와 같은 1학년. 저런 여린 몸으로 그렇다고 해서 큰 키도 아닌데 상양의 주전이라니. 실력이 뛰어나기에 1학년임에도 주전으로 출전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선수라면 중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환은 그를 본 적이 없다. 정환은 상양의 13번을 달고 있는 수겸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오늘 경기는 쉽게 이기겠구나.

그래, 매사 속단하거나 방심해서는 아니 되는 일이다. 특히나 사람의 외견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정환은 경기 시작 전 수겸을 얕본 자신을 탓했다. 저보다 한참 작은 체구인 수겸을 막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1학년 주제에 수겸보다 선배인 선수들을 거리낌 없이 지휘했다. 상양의 4번이 아니라 수겸이 주장으로 보일 정도였다. 정환은 그때 느꼈다. 수겸은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 정환과 비견될 수준의 실력이었다. 어쩌면 개인 실력으로는 정환보다 수겸이 살짝 우위였을 수도 있다. 즐거웠다. 그래서, 봐주지 않았다. 수겸을 얕보았던 마음이 미안해 더욱 그를 봐주지 않고 상대했다. 그리고 그날 해남은 승리했다.

그 뒤로도 해남과 상양은 늘 마지막 경기에서 붙었다. 현 내 투톱이라는 명성대로였다. 수겸은 집요하도록 정환을 쫓아왔다. 정환이 이만치 앞서 나가려 하면 어느새 수겸이 뒤를 바짝 쫓아왔다. 그래서 정환은 더 달렸다. 이따금 수겸이 출전하지 않는 경기에서는 어쩐지 허전함까지 느낄 정도였다. 경기력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으나 정환 본인은 느낄 수가 있었다. 김수겸이 쫓아오지 않는 이정환은 제 실력을 양껏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뒤에서 자신을 쫓는 김수겸이 어느새 정환에게도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시간이 쌓인 경험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

2학년의 인터하이 예선도 너무 당연하게 해남은 1위로 상양은 2위로 전국에 진출했다. 해남과 상양의 순위가 정해진 그 경기에서 저를 보던 수겸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분하기도 하고 아깝기도 하고 그랬겠지.

 

본선에서 반드시 너를 꺾어주겠어.

 

수겸을 향해 어디 그래보라는 듯이 웃었다. 정환이 미소 짓는 그 속내를 수겸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또 수겸이 저를 쫓아올 것이라는 그 사실이 그저 좋았다. 정환이 먼저 달려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 뒤에 수겸이 쫓아와 다시 승부를 내겠지. 그리고 나를 꺾겠다는 너의 그 의지를 내가 다시 꺾어주겠어. 그래야 너는 다시 나를 쫓아올 테니까. 그것이 이정환과 김수겸의 관계임을 정환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수겸도 그랬을 수도.

 

피가 흐른다. 반짝반짝 광을 낸 코트 위에 꽃을 피운 듯 붉은 선혈이 내렸다. 저 피의 주인은 상양의 9번 김수겸. 그리고 그의 피를 흘리게 원인은 풍전의 9번, 남훈. 그가 수겸을 ‘고의’로 쳤다. 분명 몇 번의 위협이 있었다. 정환의 눈에도 보였다. 그러니 속으로 수겸에게 어서 피하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정환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수겸은 피하지 않을 것임을.

수겸이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경기장 밖으로 실려 나갔다. 좀 전까지 상양의 감독에게 수겸이 항의를 하는 것 같았는데, 분명 경기에 다시 나가겠다고 했겠지. 하지만 결국 설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수겸이 가는 길을 따라 정환의 시선도 따랐다. 이마가 지끈거렸다. 수겸의 고통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었을까?

“김수겸은 아니 상양은 여기까지이겠군.”

남 감독이 아쉬운 듯 나직이 말했다. 정환도 남 감독과 같은 생각을 했기에 심장에 날카로운 것을 콱 박은 것 같이 찌릿했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팔이 저릴 지경이다. 새삼 자신의 피부색이 남들보다는 조금 어두운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노기를 피부색이 먼저 티를 냈을 것이기 분명했기 때문이다. 남 감독의 말처럼 상양은 거기까지였다. 수겸이 빠진 상양은 최선을 다했지만, 에이스의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원하던 것을 뺏긴 기분이었다. 상실감. 정환이 아무리 저 위에서 수겸을 기다려도 그는 올 수 없었다. 저 풍전의 9번 때문이었다. 너도 이런 기분일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나를 쫓아오지 못하게 되었으니, 너도 이렇게 분하고 슬플까….

 

***

정환은 자신이 이다지도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까 싶었다. 항상 원하는 것은 기다리기도 전에 취하던 정환이었다. 그만큼 기다림은 낯설고 생각 외로 지루했으며 고됐다. 2학년의 겨울 선발전이 그러했다. 물론 전국으로 나갈 수 있는 학교는 단 하나.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또한 해남이 될 것이다. 그래도 그 겨울 선발전에서 수겸과 다시 붙을 수 있다. 나를 쫓는 김수겸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설렜다.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상양 김수겸이 감독을 맡았다고 하는구나.”

인터하이 본선이 끝나고 4번을 받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독의 자리라니, 정환은 들은 말을 의심했다. 남 감독의 성정상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겸이 상양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코트 위에 이제 전면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누가 떠밀어서 결정한 것이 아닐 것이다. 수겸 스스로 날개를 접어 자신을 벤치에 묶어 둔 것이다. 수겸이 스스로 한 결정임을 확신했다. 정환이 이해하는 수겸은 분명 그랬을 것이다. 기꺼이.

정환을 포함한 해남의 선수들이 모두 예상한 대로 수겸은 겨울 선발전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상양과 치른 경기에서 정환은 이따금 벤치에 앉아 지시를 내리는 수겸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하지 않았다. 항상 저를 쫓는 수겸의 시선을 받는 정환이었다. 그 시선이 좋았다. 하지만 선수가 아닌 감독 수겸은 정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날, 예상대로 해남은 상양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정렬 후 벤치로 돌아가는 상양의 선수들을 수겸이 다독였다. 정환은 이상하리만치 상양의 벤치에서 시선을 옮길 수 없었다.

허전하고 서운했으며 슬펐다. 박탈감. 아마 그 표현이 가장 근접한 것이리라. 이 또한 정환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

이정환과 김수겸의 시대가 끝났다.

모두가 입을 모아 그리 말했다. 북산에게 상양이 진 그 순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상양의 모두가 속상하고 분함을 안다. 그런데 말이지, 정환도 그러했다. 코트 위에서 수겸과 한 번 더 잠깐이라도 승부를 낼 수 있던 그 기회를 다른 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수겸에게 승리하는 상대는 항상 정환 자신인데, 수겸이 정환이 아닌 다른 이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빼앗겨 본 경험이 없는 정환으로서는 이 박탈감의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다가왔다. 여전히 낯설고 불쾌한 감정이었다. 이 감정을 다스릴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이전처럼 수겸이 저를 쫓아오는 것.

코트 위에서 서로만 존재하는 듯이 경기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알지만, 칼자루를 애석하게도 정환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귀가한 후 혼자 부실에 남아 상양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스포츠지 구석에 아주 짧게 써진 글이었다. 정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곳에서도 이정환과 김수겸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누구 마음대로.

찌익. 신문지를 찢었다.

 

***

겨울 선발전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대학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입학 시 요구하는 시험 점수도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기에 입시에 매진할 이유가 없었다. 정환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상양의 3학년이 전원 잔류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환에게는 이 겨울 선발전이 수겸과 승부를 볼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다시 내가 너를 이겨주겠어.

 

즐거웠다. 예상과 다르게 겨울 선발전의 수겸은 전면에 나서서 경기에 임했다. 북산과의 경기에서 아마 느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했던가? 수겸이 북산에게 패했을 땐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진 것이 제법 억울하고 분했는데, 그 경험 덕에 수겸이 다시 코트 위에서 상양을 진두지휘하게 됨에 조금은 감사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순서를 밟듯이 결선에서 해남과 상양은 다시 만났다. 1년 만의 재회였다. 아니, 정환에게는 2년 만의 재회였다. 그러니 정환이 느끼는 흥분과 기대는 어쩌면 당연했다.

이 경기가 마지막이다. 정환의 해남과 수겸의 상양이 가질 수 있는 고교 시절 마지막 경기다. 심판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정환과 수겸의 시선이 닿았다. ‘잘해보자’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민구에게서 공을 받은 정환이 림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면 늘 그렇듯이 수겸이 정환의 뒤를 쫓았다. 심장이 뛰었다.

 

***

시합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경기장 내에 울렸다. 승리 팀의 함성이 코트 위 선수들을 향해 내려앉았다. 정환은 가만히 서서 상양의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수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겸이 현준을 비롯한 다른 상양의 주전들에게 안겨지기 전까지 분명 정환과 수겸의 시선은 서로 맞닿아 있었다. 시선이 떨어지기 직전 수겸이 먼저 정환을 향해 웃었다. 정환은 그 순간 숨이 잠시 멎는 느낌이었다.

상양이 처음으로 해남에게 승리했다. 쌍벽의 마지막 대결은 그렇게 상양의 승리로 끝났다.

 

고교 시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날은 정환의 졸업을 축하해 주듯 날은 따뜻했고 꽃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날, 축하를 받던 정환의 앞에 반가운 사람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의외이기도 했다. 거리가 되는 해남대 부속고까지 수겸이 굳이 작은 꽃다발을 들고 정환을 찾아올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정환은 반가움에 미소를 지었고 수겸도 답하듯 웃었다. “졸업 축하해”. 그런 형식적인 말과 함께 정환의 손에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아무튼 수겸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적어도 정환에게는 그랬다. 그러니 꽃다발을 전해준 그가 이어서 한 말을 듣고 정환은 적지 않게 놀랐으며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동안 너와 경쟁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

그 뒤의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아도 수겸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코트 위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마치 이루고 싶었던 모두를 이뤘다는 사람처럼 말이다.

너와 나는 쌍벽인데, 네가 그리 떠나면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일까?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제 갈 길을 가는 수겸의 뒷모습을 보며 정환은 그제야 알아챘다. 쌍벽이라는 관계의 정의가 처음엔 단순히 사람들의 유희거리로만 받아들였다면 어느새 정환 스스로 수겸과 자신을 그리 자연스레 묶어 두었음을. 쌍벽이라는 관계의 정의에 정환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 그저 늦게 알았을 뿐이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문제였다.

 

김수겸은 내뱉은 말을 거두지 않는 아이였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코트 위로 돌아오지 않았다. 쌍벽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두 개의 구슬 중 하나가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 홀로 남은 구슬은 외로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

시간은 정말로 무섭다. 수겸이 존재하지 않는 코트 위가 매번 낯설기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은 그 낯섦도 어느새 무디게 만들었다. 그렇게 정환이 수겸의 부재에 익숙해질 무렵, 초겨울의 시작을 알리듯 나뭇가지의 바싹 마른 잎 하나가 똑 떨어지는 그 시기에 정환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 근처 작은 농구장에 멍하니 서 있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서로 공을 빼앗아 골에 넣는 중이었다. 바람결이 찬데도 저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둘만인 듯 그리 있었다. 마치 그 옛날의 누구처럼 말이다.

왜 그랬을까? 급하게 근처 공중전화 부스를 찾았다. 늘 지니고 다니는 수첩을 꺼냈다. 매년 연락처를 옮겨 적는 것이 힘들었는데 그런 습관을 들인 자신이 오늘처럼 대견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그 아이의 성이 김씨라 다행이었다. 달각. 달각. 동전을 넣고 수화기를 귀에 놓고 어깨로 눌러 고정했다. 수첩을 보고 천천히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뚜르르르- 연결음이 몇 번 들리고 철커덕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환이 숨을 들이쉬고 참았다. 긴장했기 때문이겠지.

“네, 김수겸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수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듯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새 입이 바짝 말라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떨어지는 느낌이 조금 따가웠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오랜만이야.”

정환은 수겸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 겨울이 더 추워지기 전에 말이다.

 

***

바쁘다는 수겸에게 조르듯이 겨우 약속을 잡았다. 대체 무슨 일이 그리도 많아 너는 약속을 잡는 것조차도 이리 어려운 것인가? 당장에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조바심을 부추기는 듯했다. 약속의 날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정환에게는 제법 길게 느껴졌다. 그러니 정환에게 일어나라며 재촉하는 수겸이 제법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는 나만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일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석 잔이나 마시고 어지러워 잠깐 휴식을 취할 뿐인데 너는 뭐가 그리 급해서 혼자 급하게 비워내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 것인지. 술을 마시니 감정 컨트롤이 조금은 버거웠다. 그래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놓지 않았다. 수겸이 손을 빼내려 아무리 용을 써도 뺄 수 없었다. 하여간 예전부터 힘 하나는 알아준다며 툴툴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수겸이 포기한 듯 잡힌 손은 그대로 두고 다른 손으로 술잔을 비웠다.

정환이 잡은 수겸의 손을 가만히 보았다. 제게서 공을 빼앗고자 수도 없이 정환에게 도전했던 그 손이다.

“김수겸.”

이름이 불리자, 수겸이 고개를 돌려 정환을 보았다. 왜 불렀냐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고개를 들기가 어렵다. 술 때문이겠지. 어지럽고 무거워서 눈만 겨우 치켜뜨고 수겸을 보았다.

“다시 돌아와. 코트 위로.”

 

나는 다시 너하고 치열하게 붙어보고 싶어. 그 시절 그랬던 것처럼, 너와 한 단어로 묶이고 싶어.

 

머리가 무거워서 다시 고개를 내렸다. 눈이 점점 감겼다. 그래도 손은 놓지 않았다. 수겸은 엎드려 있는 정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술잔을 내려놓고 그 손을 가져가 정환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꿈을 꾸었다.

골대를 향해 정환이 달리고 있었다.

그 뒤에 수겸이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쌍벽(雙璧).

여럿 가운데 뛰어난 둘, 그래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둘.

같이 있기에 완벽해지는 두 개의 구슬

그것이 이정환과 김수겸의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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