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벽(雙璧): 김수겸
The one who left
https://youtu.be/9esLc17CTRY?si=NsTPIlLsDNnuhXmm
모두 그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오랜만이야』
이정환. 고교 3년 내내 나와 쌍벽으로 불린 해남의 선수. 어떤 한 단어로 우리 둘이 묶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락을 딱히 주고받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럴 법도 하지 않나? 그와 나는 동 학년에 같은 포지션이었을 뿐, 같은 학교 아니었고 사는 동네도 달랐다. 애초에 쌍벽이라 불리는 관계는 그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그저 그게 다였다. 정환이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 졸업한 지 일 년 가까이 되는 이 시점에 갑자기 연락해 만나자고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한 내 태도도 어쩌면 평소의 나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결정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파묻히듯이 몸을 던졌다. 잘한 결정이었을까? 만나서 대체 무슨 말을 하지? 괜스레 손으로 머리카락만 쥐어뜯었다. 고개를 돌렸다. 거실 장식장 안에 고이 보관된 트로피가 보였다. 내가 처음으로 해남에게서 승리한 그날, 우리 상양이 현 내 1위에 올랐던 그날에 손에 거머쥔 우승 트로피. 반짝반짝 빛나는 트로피 옆에 액자 하나가 가만히 놓여 있었다. 장식장을 열어 그 액자를 꺼내 들었다. 승리의 그날 함께 찍은 사진. 상양의 선수들이 승리를 만끽하며 기쁨에 취해 있었고 몇몇은 기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어땠더라? 분명 기뻤다. 그것만큼은 확신한다. 그리고….
***
정환의 첫인상은 ‘엄청나다’였다. 녀석의 실력? 아니, 외모가 그냥 엄청났다. 정말로 고등학교 1학년이 맞나? 혹시 중학교 시절에 불량한 일을 저질러 그만 몇 년 유급을 한 것이 아닐까? 수겸의 눈엔 정환은 정말로 그와 동갑이라고 하기엔 인정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실력은 네가 더 위일 거야. 그래도 해남의 선발이니 방심하지 마.”
방심?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정환이 수겸을 얕보지나 않기를. 만약 정환이 저를 얕본다면 그에게 꽤 실망이 클 것 같았으니까. 오늘 이 경기에서 떠오르는 신입생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전력으로 나를 상대해. 수겸은 속으로 그리 되뇌었다.
시합 시작 전 코트 위에서 몸을 풀고 있는 정환을 보았다. 등 번호 12번. 하필 나보다 번호가 앞인 것이 불만스럽다. 수겸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이내, 얼굴을 풀었다. 그래 내 번호가 하나 더 많으니 오늘 경기는 내가 너를 반드시 이기고 말 것이다. 이기면 그만이다.
그 뒤로 정환과 수겸은 매번 함께 언급되었다. 그 둘이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여긴다고 공언이라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절대 그런 적은 추호도 없다. 정환과 수겸은 같은 현 내에 동 학년 그리고 포지션이 겹칠 뿐이었다. 그런 선수들은 이 넓은 카나가와에서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앞다투어 정환과 수겸을 하나로 묶었다. 쌍벽(雙璧). 두 개의 구슬이란다. 수겸은 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벽이라는 글자가 울타리를 말하는 벽(壁)인 줄로만 알고 정환이면 몰라도 자신이 어딜 봐서 벽처럼 보인다는 것이냐며 어처구니없어했다. 사실 속마음은 수겸도 나름대로 정환의 체격만큼 보이는 것일지 싶어 살짝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러자 현준이 그리 말했다.
“그 벽(壁)이 아냐. 구슬을 의미하는 벽(璧)이지.”
구슬. 동양에서는 가장 완벽한 물체로 여기기에 그 중 으뜸이 되는 둘을 일컬어 쌍벽이라 부른다고 한다. 신선했다.
수겸은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경험이 있었다. 어머니를 조금 일찍 여의었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여기서는 조금 먼 나라인 미국에서 생활했다. 타지 생활을 결정하기까지에는 수겸의 의지는 없었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어머니와 예정되어 있던 영원한 이별을 아버지는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수겸의 아버지는 도망치듯 미국행을 선택했고 수겸은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낯선 땅에서 몇 년을 보냈다. 미국은 자유의 땅이었다. 하지만 평등하지는 않았다. 외국인인 수겸에게는 더 그랬다. 피부색으로 대놓고 괴롭힘을 당했냐고?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피부색과 다른 언어 그리고 비교적 왜소한 체격의 수겸은 미국인들이 제법 배려해 줄만 한 아시아인이었다. 낯선 말로 수업을 쫓아가야 함은 차치하더라도 수겸이 본국에서 자신 있던 운동에서마저도 겉모습만 보고 얕보고 동정하는 미국인들에게 제법 화가 많이도 났었다. “너는 원래 작으니까” 그런 같잖은 배려 따위 필요 없었다. 저들의 우월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치 도구처럼 수겸을 대하는 동급생들의 태도가 무척 언짢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동정 따위는 아무 일도 해결해 주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 동정을 받을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감이 훨씬 생산적인 것임을.
수겸에게 정환은 참 예상과는 다른 존재였다. 체격은 웬만한 미국인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이면서 경기 중 수겸을 얕보지 않았다. 다년간 타지 생활에서 얻은 동물적인 감이었다. 정환을 제외한 다른 해남의 선수들 아니 더 나아가 수겸이 경기를 치른 다른 학교의 선수들은 수겸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얕보았다. 그러니 우리 상양에게 지고 만 것이다. 해남이 유일하게 상양을 그리고 수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정환이 수겸을 얕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겸에게 정환은 꽤 재미있고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 반드시 수겸의 손으로 그를 그리고 그가 속한 해남을 이기고 싶었다. 몇몇 사람들은 쉽게 또 동정했다. 늘 이정환을 쫓는 김수겸이 안타깝다고. 어째서? 우리는 서로 대등하게 경쟁하고 있는데, 그대들이 무엇이라고 나를 동정하는가? 수겸은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정환에게 그리고 해남에게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그를 뒤쫓는 것으로 보여도 동정하지 말기를. 정환도 수겸을 동정하지 않으니 말이다. 우리는 대등하다.
***
분했다. 관중석에 해남이 지켜보고 있음을 아는데, 이번에야말로 너희를 우리가 딛고 올라가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기회를 수겸 스스로 산산조각 낸 기분이었다. 기분? 아니다. 수겸이 망쳤다. 손으로 피가 흘러내리는 이마를 눌러 어떻게든 지혈해 보고자 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뜨겁고 끈적한 액체 같은 것쯤이야 의료용 거즈로 지혈하면 그만이다. 풍전의 9번을 탓할 여유 따위는 없다.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이었겠지. 그것을 알기에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무리수를 두려고 한다면 그쯤은 적당히 이용할 수 있는 것도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좋은 팁이었으니까. 파울을 먹여 풍전의 9번을 경기장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면 수겸은 그깟 이마쯤은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수겸의 예상과 다르게 풍전의 9번은 퇴장당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정작 경기장 밖으로 빠지게 되는 것은 수겸 자신이 되어버렸다. 그럴 수 없어. 어떻게든 경기에 복귀해야 한다. 그런데 이 피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보내 주세요. 이까짓 거 붕대로 압박하면 그만이에요.”
감독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그저 우유부단하기만 인사인 줄 알았는데, 이럴 때는 참으로 고집도 세다. 구급대원들이 다가와 수겸의 팔을 잡고 부축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거절했다. 들것도 필요 없어. 내 발로 걸어 나가겠어. 수겸은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려 경기장 밖으로 향하는 문으로 걸어갔다. 구태여 옆으로 와 저를 도와주겠다고 하는 의료진들에게 괜히 화만 났다.
수겸은 해남의 선수들이 자리한 관중석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했다. 이번에야말로 너와 너의 해남을 나와 우리 상양이 보란 듯이 이길 수 있었는데. 순간이 판단 실수로 모든 기회를 망쳐버린 자신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적어도 너는 나를 동정하지 마.
적어도 너는 스스로 기회를 망쳐버린 내 판단을 탓해야 해.
그것이 나와 쌍벽이라고 불리는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최소의 도리야.
경기장을 밖으로 이어진 복도가 끝이 나지 않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참으로 얄궂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양의 감독이 윈터컵을 목전에 둔 시점에 돌연 사퇴했다. 사퇴가 맞을까? 아니,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느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함이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이었다. 학교 측에선 새 감독의 영입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 속내를 짐작하지만, 쓸데없이 체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냉정해져야만 했다.
“내가 감독을 할게.”
누가 시키지 않았다. 수겸이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왜 너를 벤치에 가두려 하냐고. 너의 재능이 아깝지 않냐고. 농구부의 모두 수겸을 아끼기에 그리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옳다. 상양의 농구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으며 그 누군가가 수겸이였을 뿐이다. 그러니 스스로 날개를 접어 벤치에 앉아 있는 결정을 한 것에 후회는 없다. 내가 직접 상양을 최고의 자리에 오르도록 만들겠다.
***
모두가 수겸의 탓이었다. 상양이 인터하이 예선 결선리그도 오르지 못하고 여기서 멈추게 된 이유는 모두 수겸 때문이었다. 예년과 달라진 것이라 봤자 감독 하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김수겸이다. 상양의 선수들은 모두 잘해주었다. 그러니 상양의 질주가 시작하자마자 멈춘 것은 바로 이 어리석은 감독 탓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비하에 빠지거나 타인의 과도한 연민을 바라지 않는다. 해남이 아닌 학교에 졌다고 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름은 끝났지만, 아직 다음이 남아 있다. 그러니 다시 일어서서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비통한 마음과는 별개로 수겸이 덤덤히 다음 경기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우습게도 해남이 아닌 학교에 패배를 맛보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북산에게 패배한 직후에 스포츠 일간지 한구석에 실린 기사에 그리 적혀 있었다고 했다. ‘이정환과 김수겸의 시대는 끝났다.’ 사실 작정하고 찾아보지 않으면 찾아보기도 어려울 만치 짧은 기사였다. 고교스포츠를 다룬 기사들이 다 그렇지…. 수겸이 찾아본 것도 아니었으며, 하필 농구부 연습 시간에 연습은 하지 않고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후배들이 보여주어서 알게 되었다. “이런 기사 읽을 시간에 드리블 연습이나 더 해”. 팀의 책임자로서 할 수 있는 가벼운 잔소리를 했다. 후배들은 볼멘소리하며 이정환과 김수겸의 시대가 끝났다는 헤드라인에 화가 나지도 않냐 물었다. 기자들이 뭐라고 멋대로 주장을 깎아내리는 듯한 기사를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말이다. 수겸은 그저 웃었다. 화를 낼 여유 따위는 없다. 아니, 또 예전처럼 해남에게 패배하고 난 뒤라면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해남이 아닌 다른 학교에게-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패배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고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해남을 이기겠다는 어찌 보면 집착에 가려져 수겸이 그동안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수겸이 왜 농구를 하는가? 해남을 이기기 위해서? 상양을 현 내 최강자로 만들기 위해? 아니,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 농구를 좋아하니까. 수겸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고 싶었을 뿐이다. 해남 그리고 이정환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애초에 쌍벽이라는 관계도 남들이 멋대로 지어내서 엮은 관계이지 않은가? 수겸도 정환도 둘 중 누구도 먼저 서로의 관계를 그리 정의한 적이 없다. 그저 인생을 조금 더 먼저 살았다는 이유로 나의 식견이 이렇게나 뛰어나다는 점을 값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드러내고 싶어 할 뿐임을 안다. 그때의 백인들이 그러했듯, 수겸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그저 동정을 통한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을 뿐일 것이다. 그러니 화를 낼 이유가 없다. 나, 김수겸은 결코 안쓰러운 존재가 아니다. 나, 김수겸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고 싶고 지키고 싶을 뿐이다.
“겨울 선발전에선 내가 전면에 나설게.”
감독이라는 지위를 이용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북산과의 경기를 통해 배운 점이라면 수겸이 결코 벤치에만 앉아 작전을 지시해서는 상양이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이기적인 이유일지는 몰라도, 수겸 역시 농구가 좋았다. 마지막 경기는 코트 위에서 실컷 뛰고 싶었다. 더는 여한이 없다는 듯이.
***
손에서 공이 떠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감으로 안다. 이 슛은 성공이다. 수겸의 뒤에서 정환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도 느낄 것이다. 승리는 상양의 것이다. 농구공이 림을 통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물망이 양옆으로 세차게 움직인다. 시합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불었다. 관중석의 함성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수겸은 고개를 돌려 코트 위에서 가만히 서 있는 정환을 보았다. 왜일까? 그냥 웃음이 나왔다. 해남을 그리고 이정환을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상양의 승리를 마냥 기뻐하기만 하는 감정도 아니었다. 이 미소의 의미는…, ‘드디어 끝났어.’ 상양의 선수들이 수겸을 둘러싸 승리를 기뻐하는 그 틈에서 수겸은 정환을 보고 웃었다.
수겸은 상양을 현 내 1위에 올렸다.
***
현준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조금 전, 수겸이 한 말을 들으면 적지 않게 당황하고 놀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덤덤하게 수겸의 말을 받아들였다. 천성이 원래 냉철하기 때문일까?
“왜 놀라지 않아?”
“널 이해하니까.”
“어째서?”라고 물으려다 목구멍에서 말을 삼켰다. 대학에 진학하면 농구는 그만두려 한다는 수겸의 말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고 알았다는 듯이 행동하는 현준을 보면 수겸의 마음이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정환은”
찬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바람이 제법 시려 눈이 찌푸려진다.
“무척 서운해할 수도 있겠네.”
“너까지도 그놈의 쌍벽 운운하려는 거야?”
듣기 싫다는 듯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툴툴거렸다. 다른 이도 아닌 현준 마저 수겸에게 쌍벽을 거론할 줄은 몰랐다. 타도 해남을 외치며 누구보다 수겸을 앞장서 보좌해 준 이가 현준이다. 그렇기에 그가 정환을 염려하는 듯한 말을 꺼냄은 조금 의아할 수도 있는 일이다.
“누군가와 경쟁자로 오랜 시간동안 얽히는 일은 흔하지는 않은 경험이니까.”
“고작 3년이야. 그리고 걔랑 나랑 실제로 맞붙은 게 몇 번이나 된다고.”
“그런가, 자의든 타의든 나와 어떤 관계로 묶여 있던 누군가가 떨어져 나가면 무척 허전하고 상실감이 들 거야. 뭐, 내가 쓸데없이 깊이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정환의 마음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날, 현준의 귀띔이 없었다면 아마 그런 정신 나간 짓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괜히 ‘서운할 수도 있다’라는 그 말에 무슨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정환의 졸업식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졸업을 축하하는 많은 인파 속에서 정환을 찾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한 바와 달리 한눈에 정환이 보였다. 그래, 체격이고 피부색이고 다른 사람들과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리 여겼다. 수겸을 발견한 정환이 처음엔 조금 놀란 듯 이내 반갑다는 듯이 웃었다. 수겸도 빙그레 웃는다.
“졸업 축하해”
꽃다발을 받아 든 정환이 말했다. “고마워.” 그런 정환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원했든 그렇지 아니하든 3년간 나와 경쟁해 온 두 개의 구슬 중 하나. 그래, 정환에게 이 정도 인사는 어쩌면 해야 할 도리 같은 것이다.
“그동안 너와 경쟁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
고마워. 나를 얕보지 않고 대등한 상대로서 나와 겨뤄주어서. 덕분에 홀가분하게 나는….
수겸은 그날 이후, 코트 위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한은 없다.
***
대학에 입학하고 한동안은 새 환경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지냈다. 가끔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농구가 화젯거리가 되어봤자 국내 리그나 NBA 경기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좀 의외인 것은 다른 이도 아닌 창석이 아르바이트로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쳐준다는 것 정도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상양의 친구들 그 누구도 수겸에게 다시 농구할 생각이 있냐 묻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는 그들은 사려 깊고 배려심이 넘치는 친구들이다.
물론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해서 농구 생각이 아예 나지 않음은 아니었다. 가끔 지나가는 학교 운동장에서 집 근처 농구장에서 발걸음이 저절로 멈추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는 자신을 볼 때마다 무엇이 수겸을 그리 만드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저 과거에 대한 아름다움만 남은 기억이 마음을 자극하는 것뿐이다. 이루고 싶은 것은 다 이뤘다. 수겸에게 농구는 그저 지금처럼 아름다운 것으로 남아 있었으면 했다.
***
하필 날을 잡아도 이렇게 추운 날을 잡았는지 모르겠다. 정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겸의 연락처를 지금까지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짜고짜 만나자고 하는 정환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둘러 일정이 바쁘다고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지 말귀를 알아듣는 것인지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인지. 결국은 만남의 약속을 잡아버린 수겸 자신을 탓했다. 아무튼 모질지 못한 내 탓이다. 대충 어떻게 살아왔는지나 묻고 빨리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집을 나섰다. 매서운 바람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걸음을 멈췄다. 늘 지나다니는 그 낡은 농구장에서 수겸은 걸음을 멈추고 철조망 안 농구 코트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리도 추운 날 홀로 림을 향해 공을 던지는 소년이 있었다. 아무도 없이 혼자. 바람결이 칼끝같이 날이 서 있음에도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듯 홀로 림을 향해 공을 던졌다. 혼자 하면 심심하지 않나? 그 순간, 손에 공을 쥐고 있던 소년이 활짝 웃으며 팔을 흔들며 누군가를 반기기 시작했다. 코트의 철문이 열리고 소년의 친구로 보이는 다른 소년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듯이 달려왔다. 왜 가슴이 먹먹해지는지 모르겠다. 저 두 아이를 보고 있으니, 수겸이 가슴이 답답하고 눈시울이 따갑다. 추운 날씨 때문이다.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렸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저 덩치와 다르게 술을 못 마시는 줄은 몰랐다. 문짝만 한 몸을 한 정환이 좁은 테이블 위에 구겨지듯이 엎드려 있었다. 술을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던지. 저리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추운 날 귀가는 어찌하려나 모르겠다. 아니지. 애초에 수겸이 걱정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여간 수겸은 모질지 못하다. 답답해서 얄궂은 술잔만 채우고 비우고 또 채웠다.
“일어나, 이정환. 취했어.”
“안… 취했어.”
얼씨구. 가지가지 한다.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 치고 안 취한 사람이 있던가? 수겸이 보기에 정환은 이미 코가 삐뚤어질 대로 취했음이 틀림없었다. 안 되겠다.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차리게 해서 택시라도 태워 보내버려야겠다. 물이라도 가져오려 자리를 일어나려던 찰나, 수겸의 손을 누군가가 묵직하게 잡았다. 수겸의 피부와는 대조되는 색의 손. 정환의 손이 수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야, 이것 좀 놔 봐. 징그럽게 왜 이래? 물 좀 가져올게.”
손을 빼내려 안간힘을 써도 쉽지 않다. 하여간 예전부터 힘 하나는 알아준다. 나도 모르겠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잡힌 손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술잔만 비웠다.
“김수겸”
정환의 목소리가 더 잠겼다. 저러다 진짜 잠들어 버리면 곤란한데.
“왜?”
“다시 돌아와. 코트 위로.”
정환이 천천히 고개를 테이블 위에 내렸다. 결국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등만 호흡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여전히 수겸의 손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 꽉 잡고 있었다.
“하, 미련하다. 너도”
술잔을 조심히 내려놓고 정환의 머리를 쓸었다.
“그리고 나도.”
술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다시 술잔을 채웠다. 잠시 아까 보았던 농구장 위의 소년이 떠올랐다. 홀로 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그 소년이 어쩐지 제 앞의 누군가와 닮았다. 가슴이 다시 먹먹해진다. 그래서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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