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K_새로운 여정

[AFK:새로운여정/발렌+멀린(+페이)] 종이 한 장 차이

반신이 행복에 젖으라 건넨 꿈은 그 맑고 청량한 향과는 다르게 악몽으로 화했다

* 4장 <소생의 심장>를 진행하다 보면 열리는 서브퀘스트 <달의 신 전설> 퀘스트에 관한 선동과 날조입니다

* 발렌과 페이 남매(이건 공식) 가족에 관한 적극적인 선동과 날조!!

* 가내멀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통칭 멀린으로만 씁니다(멀린과 발렌은 로맨스적 관계 아님)

* 기타 게임 내에서 확인되지 않는 정보는 팬피셜입니다.

* 이하 툿타래에서 출발함


샘의 비밀을 풀고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샤키탈리스. 그가 보물 대신이라며 자신의 맥아 음료를 한 잔씩 돌렸다. 상쾌한 맥아향. 한 모금 살짝 마신 모두가 끝없는 꿈속으로 빠져든다. 반신은 즐거이 웃지 않았을까. 다만, 멀린은 세피아로 물든 지금 이 자리를 겪었을 뿐이다. 현실인가 꿈인가. 어쩌면 저 반신은 제 잊힌 시간을 모조리 알지도 모른다.

어슴푸레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꿈결에 젖은 얼굴들이었다. 루시우스는 동료들과 스프를 나눠먹던 정경을, 테히미아는 내용을 뭉개긴 했으나 어쨌건 그의 영혼이 미뻤던 순간으로 잠겼고, 페이는 아예 있지도 않은 꿈을 생생하게 겪었던 모양이다. 치피와 해미 또한 마찬가지로 둘이서 꺄꺄 떠들고 웃고 있었다.

한 사람씩 말을 걸어보며 상태를(어쨌든 반신이 하사한 음료 아닌가. 인간의 몸에는 과할지도 모른다) 확인하던 멀린은 이내 멈칫한다.

발렌, 늘 쾌활하고 가볍게 구는 그가 희게 굳어 질린 채로 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연한 자수정을 닮은 눈이 나비 날개가 흔들리듯 퍼르르 떨린다. 미아 같은 눈이었다. 아니, 그냥 영락없는 미아다. 들춰내지 마세요, 제발요. 호건의 충실한 오른팔은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으나, 멀린은 그의 영혼이 부르짖어 간청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침 다른 동료들 모두가 행복한 꿈의 여운에 젖어 이쪽에 신경 쓰지 않고 있으므로, 오랜 대마법사는 몸을 비껴내 청년 기사에게서 멀어진다. 등 뒤로 얄팍한 한숨이 들린 것도 같다. 제가 세피아 색 필터를 씌운 현실을 보았듯이, 발렌은 어쩌면 악몽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위대한 마법사가 제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오, 듀라시여. 그다지 신앙이 깊은 편은 아니나, 이런 순간만은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기억을 잃은 대마법사는 때때로 모든 것을 읽어 알맞게 행동했다. 그 점에 지금만큼 감사한 적이 없다. 발렌은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애쓴다. 예민한 청각에 야생마처럼 날뛰는 제 심박이 시끄럽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꿈과 현실이 뒤섞였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래, 그건 꿈이었다. 다른 이들은 행복한 추억을, 바라는 미래를 본 듯했지만 저는―. 아니. 발렌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보았다. 있을 수 없는 꿈 같은 장면이었다.

기사단 일을 마치고, 야간 경비에 차출되지 않고 돌아간 집. 왔느냐고 맞이하는 부모님. 4인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는다. 오래 끓여 맛이 깊어진 화이트 스튜, 금빛 이삭 마을에서 나고 자란 밀로 만든 흰 빵, 마을 언저리에서 따온 야채로 만든 샐러드, 넉넉히 희석해 가볍게 마실 수 있는 과일주….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그래서 말이야, 오빠! 들어봐.”

“그래, 어디 들어볼까, 우리 말괄량이 아가씨?”

“응, 그러니까 내가 오늘 사귄 친구 이야기인데―”

페이가 만면에 환한 웃음으로, 이 애가 사랑하는 보석처럼 반짝반짝한 표정으로 떠돌이 상단의 아무개와 만나 같이 논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등줄기가 차갑게 식은 것은.

‘…잠깐만. 이럴 리가 없잖아.’

아까까지 현실이었던 것이 검날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이성으로 찢어발겨진다. 꿈이다. 그럴 리가 없다. 제게 동생이 있는 건 맞지만, 발렌은 그게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페이. 페이는 멀린님과 골렘을 조사하러 나왔다가 만난 소녀일 뿐이다. 눈동자 색이 비슷하지만, 그뿐이고, 갈색 머리카락은 이 대륙에 흔해 빠졌다.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이조차도 저를 구조했던 장군님이 증언해줘서 아는 거다. 그때의 제가 엄마아빠와 동생을 부르짖으며 울고 있었다고. 부모 얼굴도 기억 못 한 지 오래인데, 하물며 동생은.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호건 장군님이 보장하는 저 위대한 대마법사, 그것도 기억이 온전한 멀린의 마법이 아니고서야 가능할 리가 없다.

머리는 차곡차곡 생각을 정리한다. 이 꿈에서 저를 박리剝離한다. 이 단란한 풍경, 행복 그 자체 속에 잠겨든 저는 지나치게 이질적이다. 반신이 행복에 젖으라 건넨 꿈은 그 맑고 청량한 향과는 다르게 악몽으로 화했다. 숨통이 조여든다. 페이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지직거린다. 웃는 낯이 환하다. 좌우에 앉은 부모의 얼굴이 서서히 지워진다.

발렌은 눈을 감는다. 불규칙하게 쿵쾅대는 심장 소리, 피리 소리처럼 꽉 죄어 색색거리는 숨소리. 1부터 10까지 천천히 세어본다. 그리하면, 아까, 현실로 돌아와 대마법사와 눈이 부딪힌 순간이 된다.

면면을 보아하면 이런 악몽을 꾼 건 저 혼자인 듯하다. 그 고지식한 신전기사단 두 분께서도 꿈의 여운에 젖어 딴 사람 따위 안중에 없어 뵈는 게 천만다행이다. 멀린에게 선생님, 선생님하며 조잘거리는 페이를 흘긋 바라보며 발렌은 속으로 사과했다. 헤아려본 동생의 나이가 저 아가씨와 비슷해서 일어난 착각일 테고, 페이는 무슨 그런 걸로 사과하느냐고 되물을 테지만. 제 마음 문제다.

하나하나 마음을 정리해나가는 발렌은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꿈의 끝자락, 기억 못하는 부모의 얼굴은 틀림없이 지워졌으나 페이의 얼굴은 현실에서 눈뜰 때까지 그대로였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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