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K:새로운여정/멀린+발렌] 휘발하는 기억에 관하여
“마법사님은 언젠가 저를 잊을까요?”
* 3장 <신성한 나무의 서약> 에필로그 시점의 글입니다. 2, 3장 내용은 거의 없긴 합니다.
* 가내멀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통칭 멀린이라고만 씁니다(편하게 지지고 볶아드셔도 된다는 뜻) 가내멀린 틀잡기 용에 가까운 무언가. 저희집은 아티팩트 제작가 멀린 씨 되시겠습니다.
* 작내 명시되지 않은 종류의 설정은 전부 저희집 팬피셜입니다.
“마법사님은 언젠가 저를 잊을까요?”
그 말에 멀린은 불쏘시개를 뒤적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땅거미 숲에 닥쳤던 재앙을 막아내고 바로 성석마을로 돌아가려고 했다가, 로잔이 그리고 보니 기사님은 황혼의 나무 보고 싶었던 게 아니냐는 말을 꺼냈고 발렌이 멈칫하면서 대답(긍정이었건 부정이었건)이 늦었던 덕에 일행들은 난민캠프였던 자리에 남아있었다. 반나절이면 관광할 수 있다며 출발을 미루고 황혼에 황혼의 나무를 보고 돌아온 밤이었다.
아직 정착지를 결정 못한 난민 몇몇이 캠프에 있다 보니, 발렌은 하룻밤 새는 정도는 문제없다며(오히려 뱃길 내내 잘 수 있게 된다면 듀라님께 감사할 노릇이라고 진담 반 농담 반을 덧붙였다) 불침번을 자초했고 치피가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이런 건 2인 1조잖아요~ 그쵸, 마스터!”하고 끼어들었다. 여정 내내 부패된 땅을 힘내서 걸어준 귀엽고 사랑스럽고 든든한 서머너에게 멀린은 진실이야 어떻건 고개를 끄덕여줬고 일행 각자가 시간을 나누어 깨어있기로 했다.
가장 어두운 새벽 세 시. 빛나는 마력이 깊이 가라앉은 이 시간에 불쑥, 처음의 저 물음이 튀어나온 거다. 멀린은 손을 멈춘 채 불빛이 반사되어 난란하는 자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평정 그 자체다. 최소한 말이 미끄러진 건 아니군.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간을 노렸을 것이다. 속으로 고개를 주억인 그는 선선히 답한다.
“그렇겠지. 당장 내일이라도.”
“평소 마법사님께서 농담으로 하던 그것처럼 말이죠.”
“아, 그게 농담으로 보였으면 성공이야.”
멀린은 일행들과 돌아다니며 내키면 겉모양을 바꿔대곤 했다. 내켜서 그런 것도 있고, 그럭저럭 이유도 있다. 나는 형태에 담기지 않노라고. 지금의 내가 또다시 휘발되면 너희는 다른 나에게 익숙해져야 한다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멀린은 멀린이다.
발렌은 눈을 갸름하게 떴다. 이 영민한 청년에게 저의 의도는 충분히 잘 먹혔다 싶어 멀린은 소리 죽여 웃었고, 친우의 가장 믿음직한 부하는 그대로 눈초리를 치뜬다.
“블랙조크네요. 그거 장군님 앞에선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 봬도 속이 여리신 분이라.”
“걘 내 친구고, 못해도 그 꼴을 다섯 번은 봤을걸?”
“그건, 음, 그렇죠….”
“그래도 넌 상황을 알고 다음의 나를 맞이하게 될 거야. 미라엘보단 낫겠지.”
“…그것도 화염의 마녀 씨 앞에서 말하지 마세요. 평소에는 입에 발린 말도 잘만 하시면서 격차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예?”
그 사람, 면전에서 당신에게 그런 말 들으면 틀림없이 울 겁니다. 연한 보라색 눈동자 위로 이러저러한 감정이 지나간다. 기억과 힘 모두를 잃었지만, 본질은 여전히 ‘멀린’인 저는 첩보부대에서 손을 꼽을 이 자가 제게 읽게 해주는지 혹은 이런 통찰조차 ‘멀린’의 전유물인지를 고심하다가 이내 흩어낸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언젠가 이 순간도, 이 의문도 잊히리라.
“그 애는 내 마력을 일부나마 이었어. 아니, 쓸 수 있게 허락했다고 해야겠네. ‘나’에게 초면이었지만 그래서 의심하지 않았지.”
“…….”
“발렌 네가 호건의 가장 신임받는 부하라면, 봤을 텐데. 그 친구, 말도 안 되는 아티팩트 가지고 있지 않아?”
“…그것도 언젠가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 보안 아티팩트가 마법사님 거였군요. 어쩐지….”
“아, 옛날의 내가 그런 걸 줬구나? 흐음. 그래, 호건은 그런 게 필요한 타입으로 보이긴 해. 그때의 내가 잘 맞춰서 줬겠지.”
힘 빠졌던 자안에 이채가 돌았다. 총명한 애로구나. 멀린은 속으로 웃었다. 호건과의 이번 첫 만남에 없었더라도, 발렌 또한 제 오랜 친우와 연이 긴 듯하니 전후 맥락쯤이야 잘 꿰어 갈무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과거의 멀린과 연이 있으나 지금의 저와는 기억이 단절된 두 인물을 언급한 이유 또한 알아챘음이 분명하다. 답하지도 않은 청년의 깨달음에 멀린은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래, 나는 언제나 흩어져 사라진다. 남는 건 나와 함께한 이들이지. 그러니 휘발될 기억 대신으로 내 무언가를 남겨. 늦지 않게. 그 흔적만 있으면 정말 날 아는지 구별도 되고.”
그 대답에 청년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저는 기억 잃은 마법사님을 미아라고 착각했나 보네요.”
“그럴 리가. 나, 멀린이야. 기억이 없더라도.”
“예에, 자알 알겠습니다. 괜한 걱정이었네요.”
“언젠가 너무 늦기 전에 너에게도 뭔가 선물할 거야. 잃어먹지나 마.”
“아무렴요. 게다가 그 귀한 걸 잃어버렸다간 제가 장군님께 혼날걸요?”
짤막한 웃음소리. 그 사이에 가라든 모닥불을 멀린이 마법으로 다시 켰다가 그 마력을 감지한 해미가 무슨 일이냐고 벌떡 일어나 소동을 부리기 3분 전.
댓글 2
반짝이는 조랑말
너무 좋아 폴짝 뛰며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고 가요... 지난 번의 무기력한 발렌 연성에서도 잠깐 발렌이라면 저 아티팩트 멀린이 만든 것도 눈치챘을 것 같은데??? 했던 깜딱지라 이렇게 더 풀어주신 게 너무 맛있어요 가온님의 발렌이 좋다고 사방팔방 외치고 다니기 그런데 소제목 비슷한 거 노리신 건가요 발렌의 잊음이 다시 돌아오기 위한 쉼이었던 것처럼 멀린의 잊음도 다시 흘러가기 위한 과정 같아서<ㅇ> 갑자기 또 좋아서 벅차오르는 오타쿠가 되어요 이 무기력한 기사-그러나 영민하고 총명해서 가짜 친화력 장착하고 다니는 첩보집단의 우두머리-에게 기억과 힘을 잃어도 꿋꿋이 "나, 멀린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일지... 발렌의 감정이 일부러 읽히도록 해준 건지 멀린의 통찰인지 알 수 없다는 점도 너무 좋아요 주기적으로 기억 잃고 휘발되는 만큼 본인마저도 한없이 가볍게 자기자신을 흘려보낸다는 게... 그렇지만 멀린이 함께했던 사람에겐 멀린이 남는다니 이거 정말 관념 상의 멀린 아니냐구요 카세디아에게 말해줬던 게 정말이었던 거야 멀린은 모두의 마음 속에 있다(급기야) 하필 아티팩트~인 것도 약간 과거의 메아리 떠올라서 멀린은 멀린이구나 싶어져요 과거의 메아리도 아티팩트로 따진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성능 맞으니까요 그리고 저 대화 후에 발렌 자기가 뭘 받을지 은근히 꽤 기대할 것만 같아... 제법 즐거워져요>< 그런데 이 녀석 호건 장군이 받은 아티팩트 최대수혜자 아니었던가요?? 이거 아무래도 중복수령 같은데(이런 발언) 그렇지만 멀린님은 그마저도 영민하다 칭찬할 것 같기도 해서 ㅋㅋㅋㅋㅋ 잘 썼음 됐지!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발렌 원래도 은신 잘하는 편이었지만 정말 아예 모습이고 소리고 다 지워주는 거 받아도 좋겠단 날조를 불쑥 해보아요 그런데 이제 전투용이 아니라 휴식용이어도 좋을듯한? 뭐가 됐든 결국 알잘딱깔센 안성맞춤으로 해주시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 무기력한 발렌 연성을 못 잊었기 때문에 ㅇ<-< 저 정말 가온님이 빚어주시는 애들이 너무 좋아요...... 멀린이 전설의 마법사라면 가온님은 전설의 흰나비이시다(가온님: 네?)
몰입하는 두루미
가온님네 멀린... 산은 산이요 멀린은 멀린이로다<ㅠㅠㅠㅠ의 분위기가 정말 잘 느껴집니다...아직 가온님네 멀린 얘기는 많이 못 들어본 상태인데 이렇게 연성으로 만나볼 수 있다니 너무 좋네요ㅠ.ㅠ 파티 친구들의 복작하고 잔잔한 분위기도 좋고 발렌에게도 뭔가를 선물해준다는 멀린의 말도 너무 설렙니다...흑흑..... 발렌이라면 저렇게 대답은 가볍게 해도 멀린이 준 선물이 낡아 녹슬어버릴 때까지 소중히 간직해줄 것 같아서 참 좋아요. 귀한 연성 잘 읽었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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