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멀린] 녹색과 바람과 밤의 공기

수많은 즐거움과 가슴 사무치는 고뇌가 당신 안에 잠들어, 깨어나지 않고 있으리라.

LIMEADE by LIM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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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림주이자 멀린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1장~2장 사이 어딘가의 이야기.


잠 못 드는 깊은 밤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우연을 불러들인다.

그 날 따라 잠들지 못하는 신경을 달래며 정처 없이 광장 속을 헤매던 발렌의 발걸음이 한 곳에 멈춰 섰다. 성석 마을의 입구 어귀 즈음, 그의 시선이 향한 끝에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마법사 님?”

“…발렌?”

아담한 체구를 가진 백발의 여성. 그녀는 발렌의 상관인 호건 장군의 오랜 친구라고 하였다. 장군께서 그녀의 정체를 직접 밝히려 하지는 않았으나, 눈치가 재빠른 발렌은 호위로서 동행하며 관찰해 온 것을 토대로 어느 정도 그녀에 대해 파악해내었다. 엘레나, 그녀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이런 곳을 홀로 서성일 위인이 아니다. 본래라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염려하고 주목하는 대중과 기사단에 둘러싸여 걸음 한 보, 눈짓 한 번의 자유마저 잃어버릴 것이 섭리렸다. 그래서일까, 그녀를 보좌하는 미스터리 하우스의 돌리라는 여성의 조언으로 외부에 나설 때면 그녀는 ‘평범한’ 외모로 자신을 위장했다. 솔직히 말해 발렌이 보기에는 불필요한 조치다. 그녀의 본래 모습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일뿐더러, 그녀가 뒤집어쓴 ‘평범한 사람’의 가죽은 전혀 평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 호건 장군의 친구라기엔 너무 젊은 모습이지 않은가. 발렌은 이런 마법사의 허술함에 이따금씩 유쾌해지곤 했다.

발렌은 그녀에게 다가가 밤인사를 건넸다. “마법사 님도 산책 중이신가요?” 질문을 던지자 짧은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눈동자는 발렌을 향하고 있었으나, 눈앞의 그를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 먼 곳을 응시하는 듯이 보였다. 발렌은 이제는 그 눈빛에 익숙해진 듯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대하신 마법사 님께서 호위도 서머너도 없이 밤중에 홀로 산책이라니, 저희 장군님께서 아셨으면 호들갑을 떠시겠군요.”

“다들 위대한 마법사를 너무 얕보는 거 아니야?”

엘레나가 눈썹을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온몸으로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느껴졌다. 자유로운 천성을 가진 발렌은 그녀의 반응에 공감되었다.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상관은 시도 때도 없이 친우의 걱정을 늘어놓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발렌은 매번 적당히 흘려듣는 척하면서도, 그가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을 지켜보며 책임감을 가슴에 새기곤 하였다.

“하하. 장군님께 마법사 님은 소중한 친구분이니 걱정이 될 법도 하죠.” 낮지만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고 난 후 발렌은 정중한 태도를 취하며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동행할까요? 어쨌든, 당신을 지키라는 장군님의 명령에는 기한도, 시일도 없으니까요.”

“상관없어.” 엘레나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발렌은 그마저도 익숙한 듯이 웃음으로 받아친다.

“네, 그럼 가실까요.”

그렇게 두 사람의 산책이 시작되었다.


함께하는 산책길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라 할만한 것이 오고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발렌이 두서없이 화두를 늘어놓으면 엘레나가 간단한 호응을 할 뿐이었다. 마을에 떠도는 재미있는 소문, 가십거리, 기사단에서의 고충, 등골이 서늘해지는 괴담까지 발렌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엘레나는 그 중 어느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오히려 모든 주제에 대한 흥미의 크기가 전부 비슷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어쨌든 간에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엘레나라는 개인에 대해 어떤 것도 간파해내지 못했다. 발렌에게 있어 타인과의 대화는 상대를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약간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잠시 침묵하던 발렌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서려 있었다.

“마법사 님은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네요.”

그건 분명한 본심이었지만, 발렌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주워담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실수했다는 마음에 난감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는 그를 두고도 엘레나는 전혀 상관 않는듯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신경 쓰여?”

“그야 물론이죠.”

발렌은 지체없이 답했지만, 이어지는 질문에는 잠시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보호 대상이라서?”

“그건…, 난감한 질문이네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무심한 시선 앞에 발렌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는 답지 않게 상대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은 첫 일감을 눈앞에 둔 풋내기 용병처럼 긴장과 고민으로 마비된 것만 같았다. 그 상태로 얼마나 걸었는지는 발렌도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엘레나는 발렌에게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다시 정적을 깬 사람도 다름 아닌 그가 되었다.

“실은, 밤사이 내내 마법사 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을 설친 거야?”

“하하…, 부끄럽지만 그렇군요.”

설마 장본인에게 털어놓을 줄은, 발렌에게 있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때 아닌 고백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의 눈은 의아함과 호기심으로 물들었고 드물게 그녀의 의식이 발렌에게 집중되는 것이 보였다. 발렌은 어쩐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친김에 그동안 그녀에 대해 품어왔던 의구심을 드러내 보기로 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함께한 지 꽤나 지났는데도 마법사 님의 생각을 전혀 모르겠거든요. 제게는 마치 마법사 님께서 무언가 감추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비밀을 캐고 싶어 하는 제 성미가 날카로워진단 말이죠.”

말을 마친 발렌은 시험 삼아 발걸음을 멈추어 보았다. 그를 따라 엘레나 또한 걸음을 멈추고 그의 앞에 섰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이 흙길 한복판에 멈춰서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드물게도 발렌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매사에 평정심을 표방하던 그의 얼굴에 설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천천히 두 사람을 감싸듯이 흐르고, 풀벌레 소리마저도 멀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바람소리만이 귓가를 스치는 정적 속에서 엘레나는 한참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발렌은 그 모습에서 평소의 그녀를 보았다. 눈앞에 사람을 두고서, 아주 멀리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듯한 눈동자와 몸짓이었다. 새하얗게 빛나며 파도치는 달빛 머리칼을 손으로 넘기면서, 그녀는 발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너무 마음 쓰지 않는 게 좋을걸.”

발렌은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얹는 게 그녀의 특기인가 싶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언젠가 널 까맣게 잊을 테니까.”

그 말에 발렌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의 기억에 관한 사항은 호건 장군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망각증이 발렌에게 피부로 와 닿는 것은 처음이었다. 언젠가 나를 잊는다라, 발렌은 속으로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자 한 가지 섭섭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마법사 님, 혹시 저와 거리를 두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그러나 엘레나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하다. 그녀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발렌을 포함한 여타 모든 것에 무관심한 표정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뜻밖의 문장이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발렌은 잊혀지면 서운해할 성격이라고 생각했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발렌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설마, 지금 저를 배려해주시는 건가요?”

“그걸 이제 알았어?”

엘레나가 살짝 뾰로통한 얼굴로 발렌을 올려다보았다. 발렌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가 그녀의 호위 기사가 된 이래로 처음으로 마주한 사람다운 표현이었다.

“하하하!”

발렌은 아주 실컷 웃었다. 마을 한복판이었다면 잠에서 깬 주민들의 원성이 날아올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마법사는 그 둥그런 눈매를 더욱 둥글게 가다듬고는 어리둥절한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후, 속이 후련해진 표정의 발렌이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그 말은 명령이 아닌 조언으로 가슴 속에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덧붙였다.

“세상 모든 일은 지나갈 바람 같은 것들뿐인데, 잊혀질 인연이라 해서 아껴주지 말라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발렌은 고개를 숙여 마법사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앳되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얼핏 본다면 소녀로 보일 법도 하다. 허나 그녀에게서는 역시,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기묘한 매력이 감돌았다. 그것은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을 인간이 언어로 전부 담아낼 수 없듯이.

“발렌, 너….”

녹음을 담은 눈동자가 순간 코앞까지 다가왔다. 발렌은 생각지도 못하게 좁혀진 거리감에 문득 숨을 삼켰다.

“이상한 녀석이네.”

싱거운 반응을 내뱉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발렌은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고요한 밤의 정적 속을 벌레의 노랫소리가 채우고, 달은 언제나처럼 따뜻한 듀라의 온기를 머금은 채 생명들의 휴식을 축복하고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는 긴 머리카락은 밤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발렌은 자기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당신만 하겠어요.”

발렌은 머릿속에 엘레나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듯하다가도, 노파처럼 모든 것에 달관한 사람이군.’

그리고는 한낱 자신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그의 궤적을 어림잡아 그려보았다. 많은 만남이 있었으리라, 많은 이별이 있었으리라. 그 속에 수많은 즐거움과 가슴 사무치는 고뇌가 당신 안에 잠들어, 깨어나지 않고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두 사람 사이의 열댓 걸음이 수십, 수백, 아니 수억 걸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간극처럼 강렬하게 느껴졌다.

“ーー발렌.”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발렌의 눈이 문득 엘레나의 눈과 마주쳤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와.”

먼저 앞서 간 그녀가 발렌에게 손짓한다.

발렌은 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이유로 밤잠을 설쳤던 순간과, 그리하여 밤의 거리를 떠돌던 자신의 모습과, 결국엔 장본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상사병에 걸린 평범한 남자 같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워서 야속하고 애틋했다.

그는 가벼워진 발걸음에 힘을 실어 그녀에게 힘껏 달려갔다.

“네, 네~. 갑니다, 가요.”

그녀가 아무리 초월한 이라 한들 이 새로운 여정 속에서 틈은 메워지고, 간격은 좁혀져,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을 것이다. 발렌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달빛을 입은 엘레나의 얼굴이 잔잔한 평화를 띠었다. 두 사람은 같은 밤의 공기를 공유했다. 발렌은 그 점이 왠지 기뻤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인간으로서의 짧은 삶, 발렌의 한평생에 걸쳐도 알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의문이 그의 안에서 피어났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바랐다.

‘부디 그랬었기를 바랍니다, 마법사 님.’

들판을 누비는 바람과도 같은 자유. 그것은 때때로 고독을 동반하는 법이라는 것을 발렌은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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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연성하는 판다

    선생님 신나게 읽고 오는 길입니다! 선생님댁 멀린은 확실히 인간의 틀을 벗어난 느낌이 강해서! 그점이! 너무 좋아요! 그런데도 확실하게 인간이야!라는 모순...최고... 호기심 많고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직업병일지는 차치하고서) 발렌이 옆에서 계속 기웃하는 것도 귀여워서 좋구요... 그냥 계속 연신 좋다고뿐이 외치지 않네욬ㅋㅋㅋ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상상하는 청새치

    너무 좋아서 몇 번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어요... >호건 친구라기엔 너무 젊다< 메타적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인데(아무래도 플레이어블 캐릭터) 발렌이 저렇게 말하니까 너무 웃기고... 자유로운 바람 같은 두 사람이라 발렌이 엘레나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본질에는 깊이 공감하는 게 너무너무너무 좋네요 멀린님 까맣게 잊는대서 무심~한 줄로만 알았는데 '서운해할 것 같아서' 정 주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도 다정해요 진짜 만사 무심한 약인외 멀린이 나한테 뾰로퉁한 표정 짓는다? 이거 어떻게 안 반하는데 자기도 '상사병에 걸린 남자'처럼 굴고 있다는 거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도 진짜............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예요 약인외와 인간 사이의 아득한 간극을 절절히 느끼면서도 발렌은 멀린을 계속 따라갈 거고 멀린도 발렌을 기다려줄 거라니 어떻게 이런 인간인외가 다 있지 너무 맛있어서 냠냠 접시 밑바닥까지 먹어버릴래요(이런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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