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드림

[밀레르웰] 교역을 합니다.

하필 교역물품 초기화 날이 목요일인 건에 대하여

푸른 하늘 위를 날던 드래곤이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하강한다. 두꺼운 네 발이 바닥에 닿는다. 나부끼는 모래를 손으로 내충 걷어낸 밀레시안이 팻에서 내려 동승자에게 손을 내민다.

필리아의 엘프 마을 외각에 있는 교역소. 작은 천막 안에서 교역 길드의 상인들이 바삐 움직인다. 그 중 몇몇이 밀레시안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거나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르웰린은 눈 앞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밀레신의 손을 잡고 팻에서 내렸다. 그리브 아래로 작은 모래 알갱이가 밟힌다.

“이곳이 필리아의 교역소군요.”

“응,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지?”

밀레시안이 깨끗한 천을 꺼내 르웰린의 머리 위를 덮어주며 말했다. 직접 재료를 모아 손수 만들어낸 최고급 실크였다. 곱게 짜인 직물이 새하얀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운다. 필리아는 햇빛이 강렬하고 모래가 뜨거운 사막이었다. 덥다는 이유로 피부를 노출했다간 화상을 입을 수 있었다. 예쁘고 고운 얼굴을 벌겋게 태울 수는 없었다. 르웰린은 밀레시안의 배려에 되려 얼굴이 간지러웠다.

정작 밀레시안 본인은 흔한 선크림 하나 없이 옷만 갈아입은 상태였다. 에린의 교역 길드원 의상. 큰 효과 없이 분위기를 내기 위해 입는 옷이었다. 평소 밀레시안이 즐겨입는 옷(목부터 발목까지 덮어 얼굴을 제외한 다른 부분을 노출하지 않는)만 봐오던 르웰린에겐 어색한 옷이었다.

옷깃을 세워 목부터 쇄골, 윗가슴까지 시원하게 드러난 하얀 피부가 강한 햇빛에 반짝인다. 르웰린은 애써 광활한 모래 언덕 위로 시선을 피했다.

사막 위로 밀레시안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오늘은 목요일, 루나사. 일주일 중 르웰린이 유일하게 일을 하지 않고 휴식을 즐기는 날임과 동시에 교역 길드의 물품이 새로 입고되는 날이었다.

이번 주 목요일은 ‘교역 시즌’이 바뀌는 특별한 날이기도 했다. 두카르 좀 만진다는 밀레시안들이 가장 바빠지는 시기.

평소 아발론 게이트의 망루 근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독서하길 즐기는 르웰린이 굳이 이 먼 곳에 와있는 이유도 그들과 같았다. 그의 밀레시안이 바로 ‘교역왕’의 꿈나무였기 때문이다.

수요일, 알반 헤루인의 밤. 밀레시안이 먼저 르웰린을 찾아왔다. 매주 목요일마다 함께하던 데이트(라고 쓰고 휴식이라 읽는다.)를 당분간 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밀레시안의 일정이 바빠지는 일이야 흔히 있었던 일이니 르웰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린은 이류를 묻는 대신, 당분간 이라는 게 얼마를 말하는 건지 물었다.

“이, 일주일. 일주일 안에 해결할 수 있어.”

굳이 늦은 밤에 찾아와 비장한 태도로 할 이야기인가, 의아했다. 등나무처럼 한쪽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따라 고개가 기울어진다.

“이번주만 못 보는 거 아닌가요?”

“으응, 그렇긴 한데…”

밀레시안이 우물쭈물 거리며 몸을 베베 꼬았다. 순간, 오랫동안 밀레시안을 관찰해온 르웰린은 직감했다. 데이트에 빠지는 이유가 밀레시안의 기준으로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닌것임을.

밀레시안이 그를 찾아온 진짜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을 지칠 수 없게 되었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요령이라고는 모르는 순진한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제 발 저린 도둑은 줄줄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교역의 의미, 교역의 종류, 교역을 하는 방법, 교역해야 하는 이유, 교역을 하는 것으로 얻는 이점, 등등. 업무 브리핑에 가까운 발표 덕에, 르웰린은 별이 높게 뜬 밤, 하품을 하며 조는 타라 왕성 경비병 앞에 한참이나 서있어야 했다.

“그래서…”

움찔, 르웰린이 밀레시안의 말을 끊었다.

“늘 만나던 그 곳으로 오지 못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밀레시안이 죄인처럼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르웰린이 실망했다고 말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몰꼴이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이리 볼품없어도 되는 건가. 르웰린은 ‘후후’ 웃음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

밀레시안이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르웰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같이 가게 해주실거죠?”

“어…? 그래도 돼? 아발론 밖으로 못 나오는 거 아니였어?”

금방 미소를 지워낸 르웰린이 한심하단 얼굴로 밀레시안을 바라봤다.

“당연히 나올 수 있죠. 저번에는 함께 던바튼의 서점에 다녀왔지 않습니까.”

“아 맞다, 그랬지.”

물론, 던바튼과 필리아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던바튼은 타라에서 육로로 이동한 가능한 지역임과 동시에 그의 동생이 학회원으로 일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반면, 밀레시안이 자주 이용하는 필리아의 교역소는 이리아 대륙에 있는 외딴 엘프 마을에 위치했다.

아벨린이 알면 한숨을 쉴 것이고, 알터가 알면 귀찮아 질 게 분명한 행선지였다. 그럼에도.

기쁨에 찬 밀레시안은 환호성을 지르고 방방 뛰어 다녔다.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어젯밤, 르웰린의 필리아 행이 결정되었다.

“오구오구, 착하지. 여기 봐라. 까꿍!”

밀레시안의 목소리에 르웰린이 고개를 돌렸다. 기껏 교역소 앞까지 와서 물건도 사지 않고 무얼하나 했더니 팻과 놀아주고 있었다. 교역소의 상인들이나 다른 밀레시안은 이것이 익숙한지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르웰린에게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저렇게 하면 두카르 이익이 증가하는 효과를 받을 수 있다고 했던가. 미리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다행히도 밀레시안의 기괴한 짓거리는 빠르게 마무리가 되었다. 마차를 소환한 밀레시안은 지급받은 두카르로 가장 비싼 물건을 가득 구매했다. 짐칸에 물걸을 실어달라고 외치는 모습이 신난 어린아이와 같아보였다. 르웰린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뒤를 쫒아오지 않았다면 혼자서, 혹은 함께 교역을 하는 다른 밀레시안들과 함께 하하 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냈겠지. 참으로 배알이 뒤틀리고 심술이 났다.

르웰린은 자리(그래봤자 나무로 된 짐칸)로 에스코트하는 밀레시안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마차에 올랐다.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밀레시안의 가방에서 멋대로 쿠션을 꺼내 베고 앉았다.

“앗, 그거 내 쿠션! 물물교환 교역품인데!”

“짐 마차라 그런지 바닥이 딱딱하네요. 써도 되죠?”

과장되게 우는 소리를 내던 밀레시안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넉넉하게 만들었으니까 몇 개 정도는 사용해도 괜찮아. 고급 양털로 속을 꽉 채워서 만들었는데 어때? 쓸만해?”

“나쁘진 않습니다.”

“다행이다. 이제 출발 할건데, 불편하면 꼭 말해줘. 나는 너희와 다르게 사소하고 세밀한 부분은 잘 눈치채지 못하잖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보시잖아요.”

“아니야.”

입술을 삐죽 내미는 밀레시안을 보며 르웰린은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누가 그의 이런 얼굴을 보겠는가. 밀레시안이 유난히 자신에게 무르다는 것이 르웰린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 숨어있던 질투심을 해소시켜주었다.

마지막으로 르웰린의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한 밀레시안이 마차의 앞에 앉는다. 고삐가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흔들리며 공기를 가른다. 목줄에 진동을 느낀 두 마리의 말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짐칸에 탄 사람을 배려한 세심한 움직임이었다.

필리아에서 발레스를 왕복으로 5번 오가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이후 밤이 되면 밀레시안은 르웰린을 집까지 배웅한 후 다른 밀레시안의 비행선에 올라 항공교역을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남은 것은 장거리 이동이었으니, 르웰린이 할 일은 없었다. 한가히 시간이 흐른다.

필리아의 사막은 조용했다. 간혹 오가는 밀레시안들과 스치긴 했지만 인사는 나누지 않았다. 몬스터와 약탈단을 피해 마차를 이끄니, 사건사고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햇빛이 뜨거웠지만 몸을 감싼 천이 그림자를 만들어주었고,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했다. 말은 굴곡이 많지 않은 길을 천천히 걸었기에 흔들림도 적었다.

덕분에 르웰린은 조용히 독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장소가 바뀌었을 뿐,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휴식하는 것이 평소와 다름 없었다.

적막속에서 돌연, 밀레시안이 한 곳을 가리키며 말을 걸어왔다.

“저기 봐. 유적이야.”

밀레시안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에는 석상이 하나 비스듬히 세워져있었다. 땅 속에 반 쯤 처박혀 있는 탓에 형태를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유적’이라는 것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울라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이리아 대륙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정체불명의 흔적, 아발론의 유적과는 다른 형태.

르웰린은 밀레시안이 곁을 지날 때마다 빛과 함께 정체를 드러내는 유적을 바삐 쫒아 시선을 움직였다.

“이게 대체…”

“반신화의 힘 때문일거야. 어디서 언제 배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힘을 쓰면 숨겨진 유적을 발견할 수 있거든. 어떨 때는 서서 유적의 모습을 도화지에 스캐치 하기도 해. 궁금하면 잠깐 멈춰갈까?”

“그러지는 않아도 되는데요.”

매몰차게 느껴지는 거절에 밀레시안의 어깨에 움찔, 떨린다. 그 뒤통수를 바라보던 르웰린이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또 볼 날이 있을테니까요.”

“하하…! 맞아.”

밀레시안이 명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힘차게 팔을 흔들어 말을 재촉한다. 빨라지는 속도에 바람이 분다. 르웰린은 책을 덮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사막이 스쳐지나가고 울창한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르웰린은 그 풍경을 소중히 눈에 담았다.

곧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겨워질 거라는 것도 모른 채.

“읍…”

“미안해. 역시 무리였나… 하하, 다음에 이어서 할까?”

“거절하겠습니다.”

“힝, 또 같이 와준다고 했으면서.”

“잘못들으셨겠죠.”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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