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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커미션 신청본

ⓒ이온

분수를 모르는 것이 죄라면 지금껏 인간이 제게 지은 죄는 얼마나 무거운 형벌을 달 수 있을까. 오만한 인간들은 꼭 손에 넣지 못할 것을 탐낸다. 일평생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도, 섣불리 닿을 수도 없는 것들을 억척스럽게 양 손에 움켜쥐지 못해 안달인 종족들.

그 과정에서 그것이 어떤 형태로 찌그러지든, 구제불능인 상태가 되든 그저 가졌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해 웃음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잔인하리만치도 가혹하고 이기적인 그들의 성정이었다. 몇 차례 잔인한 방식으로 몸소 체험하고 난 뒤부터는 구태여 절대자의 입장에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결국은 그 욕심에 깔려 스스로 자멸하곤 하는 것이 짧은 생애의 척박한 흐름이었으니.

그래, 눈앞이 온통 깜깜해지기 전에는 분명 이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또, 욕심이구나. 또 누군가가 나에게서 나를 억지로 빼앗아가려 했구나. 어쩌면 내가 인간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사색에 빠진다 한들 인간의 시간을 초월한 누군가의 입장으로서는 다소 제 3자의 일처럼 제법 무던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었으나, 만약 한 번 잃은 것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인류의 시계가 제게도 해당되었다면 책임감이 강한 성정의 단장은 필히 괴로워했을 것이다. 고작 이런 이유로 또 누군가를 잃었다고, 분명 엘빈은......,

아아. 그래. 엘빈.

일정 주기가 되돌아오면 위협의 순간도 직면해야 하는 것이 불가항력이다. 다만 반복된 수많은 욕망의 페해 속, 깨어나기 전에 인간의 이름을 떠올린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지독히도 반복된 회고록에 대한 이야기다.

“......낯설다.

지금 이 상황에서 태평하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의외로 다정한 면이 있네, 단장도.

시끄러워.

걷지도 못할 정도로 골골대는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군. 퉁명스러운 대꾸였지만 몸을 돌려 문을 닫는 그의 손에는 물수건이 들려있었다. 안 그런 척 하면서 많이 걱정한 모양인데. 몰래 웃음을 지은 진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고는 침대 밖으로 나온 다리를 달랑달랑 흔든다.

단장, 아니지. 스미스 씨.

“.......

걱정했어?

걱정을 안 할 인간이 있다면. 그게 문제 아닌가? 낮게 일갈하는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나, 꽤나 오래 전부터 켜놓은 듯한 등불과 대야 안에 위치한 여러 개의 물수건을 보니 제가 깨어나지 않은 동안 그가 남몰래 들였을 정성이 보여 진은 또 고개를 돌린 채 쿡쿡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정말 재밌는 인간이라니까.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갈까 했으나, 그랬다간 제 어깨를 붙잡아서라도 도로 자리에 앉힐 인간인 것을 알아 그만두었다.

진.

응.

누워.

이거 봐. 잠깐 일어나 있었다고 또 과보호잖아. 순순히 자리에 도로 누운 진이 여직 회복되지 않은 상처가 아려오는 느낌에 작게 앓는 소리를 낸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잠들어있는 동안 엘빈이 열심히 물수건을 갈아준 것이 무색하게도 여직 몸 전체에 오른 열감이 식지 않은 상태였다. 느껴지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내부 장기에 손상이 좀 있는 듯한데. 구태여 구구절절 증상을 설명해 가뜩 이나 평소보다 묘하게 평정심을 잃은 상태인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또. 명색이 의산데 고작 이런 것에 골골대는 건 웃긴 일이기도 하고. 늘 우직하도록 딱딱한 태도를 고수하는 그의 앞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객기를 부리고 싶어진다. 이 또한 그에 대해 품고 있는 다른 마음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러니까 나는.

단장이 날 걱정해주니까 좋긴 한데, 그 정도 아니니까 괜히 극단적인 보호는 안 해도 되고.

“.......

그치만 내가 일어날 때까진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이미 그러고 있는 게 안 보이나보군.

그런 딱딱한 말 말고.


하여간 단장은 귀여운 맛이 없다니까. 짐짓 투덜대는 말투로 진이 대꾸한다. 걱정 돼서 자주 들렀으면서 아닌 척이나 하고 말이야. 그 말에 엘빈이 눈썹을 꿈틀댄다.

아닌 척이라니. 조사차 들렀을 뿐이니 오해는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조사. 나에 대한? 그런 거라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텐데.

진이 눈을 깜빡이며 대꾸한다. 리바이 병장이 말해주지 않은 건가? 아니면 아직 날 의심하고 있다거나. 곰곰이 생각하던 진의 앞으로 엘빈이 펜과 수첩을 꺼내들며 대꾸한다. 아니. 이번 건은 테네만에 대한 조사다.

그의 처벌의 근거에 대해 뒷받침할 자네의 진술이 필요해.

“...아아. 아직 처벌되지 않은 모양이네, 그 인간.

그 자리에서 붙잡아 구금시켰어. 자네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조금.


마지막으로 그가 헌병단에 의해 붙잡히는 모습을 보았던 것 같긴 한데.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다시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연다. 고문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내 몸이 증거가..., 아아. 안 되려나? 다는 아니지만 이미 어느 정도는 회복해버렸네. 잠깐만. 이것도 혹시 나 깨어나기 전에 단장이 뭐 해준 건가? 능청을 떨며 이불 안으로 제 상의를 들추곤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모습에, 가만 지켜보던 엘빈이 도로 상의를 끌어내린다. 왜, 좀 보게. 진의 말에 그가 한숨을 내쉰다.

자네가 확인한다고 상처가 나아지는 건 아닐 텐데. 명색이 환자이니 불필요한 거동은 삼가는 게 좋아.

왜. 나 그렇게 아파 보이나. 그 정도는 아닌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온계로 자네 몸의 열을 측정할 수 없더군.

“......그거야.

그러니 안정을 취하라는 말이다. 괜찮고 말고 얘기하는 것과 별개로, 자네의 몸이 지금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

낮게 대꾸한 엘빈이 차가운 물수건을 대번에 진의 이마에 올린다. 아, 차가워. 절로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쳐다보던 엘빈이 목까지 담요를 끌어올린다. 움직이지 말고. 그 말에 진이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감는다. 그 정도 아니라니까. 나 괜찮다니까. 중얼중얼 덧붙여지는 변명 같은 문장들에 한 마디 더 덧붙이려다 말았다.

구태여 그를 과보호하려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꼭두새벽부터 간호를 한답시고 기척을 죽여 누군가의 방에 들른 것은 어떤 특수한 목적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그가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이 계속 연상되는 것이 못내 싫었다. 이러다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 그대로 영면에 들 듯 의식을 잃어버리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건지. 자꾸만 답지 않게 최악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버리는 것이 답답해 답지 않게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잠에 든 진의 얼굴이라도 보아야 이 꽉 막힌 것이 해소될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이상했다. 묘하다고 느꼈다. 진실로 그를 마주한다 한들 진이 깨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

정작 본인은 며칠 간 타들어갔던 남의 속도 모른 채 불덩이 같은 몸을 하고서도 평온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이나 하고 있었다만.

그래. 나는. 널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애지중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려 그런 마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네가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 황당한 이야기를, 어떤 근거를 대야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게 설명이 가능할까. 어떻게 이야기해야 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지 않은 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밤새 생각해보았지만 결론은 제로였다. 어떠한 근거를 대도 이성적으로 납득시킬 수가 없다. 이미 제 상태가 평소와 달리 침착하지 못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오랜만에 사람과 이야기를 하니 목이 마른 것 같다며 평온하게 입맛을 다시는 얼굴을 보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엄살 대신 진심으로 아픈 척이라도 했다면 마음 편히 걱정이라도 했을 터인데. 마치 그런 낯 간지러운 것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듯 온 몸으로 밀어내고 있으면서도, 그 주제에 일어날 때까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며 연인 사이에나 할 법할 어이없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댄다.

도대체 그가 허락하고 있는 거리가 어디까지인지, 잘 가늠이 가지 않아 답답했다. 이렇게 누군가가 어려운 적은 처음이다.

네 말대로 나는, 못내 네 걱정을 하면서도 그 흔적조차 들키지 않으려 애써야 했는데.

“.......

왜 그렇게 쳐다봐, 단장?

그에 순수한 의문이라는 듯, 되묻는 얼굴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안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어쩌면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최초의 의문. 명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 불가침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해 본인조차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곳에 형성된 기묘한 응어리가 있었다.

자네는 몰라도 되는 이야기야.

이제 은근슬쩍 비밀까지 만들고.

마주하기 전까진 해소되지 않을,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회피하고 싶어지는.

“.......

알았다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단장.

어떤 비밀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켜줄게.

그에 엘빈이 저도 모르게 지그시 눈을 감는다. 진이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그래. 단장. 맞아.

스미스 씨는 정말, 재밌는 것 같아.

절대자의 속삭임에는 미지의 달콤함이 존재한다. 스스로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지는 달큼한 꼬임.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유혹. 이를 알면서도 섣불리 능력을 써 그의 머릿속을 캐묻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제 앞에 있는 인간이 직감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첫 번째 인류가 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그럼 나중엔 꼭 알려주는 거다? 언젠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어쩌면 절대자의 일기에 적힐 법한 문장.
길고 긴 생애를 회상했을 때 다시 한 번 되짚어볼 만한 한 페이지의 부록.

그때는 이제, 정말로 물러날 곳이 없으니까.

선명한 자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엘빈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은,

한 인간의 시간에 발맞추길 선택한 어느 절대자의 회고록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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