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창작 소설

Cut the dog’s tail

Sit down beside me -2


"버려지는 건 익숙해."

아픔마저 익숙해지진 않을지라도.

낙화에게는 사수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범죄 조직이라도 일을 가르치는 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고 신입이던 낙화에게 일을 가르쳐주던 사람은 낙화보다 2년 정도 먼저 조직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낙화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쓴다. 권진혁. 그래. 그런 이름었다. 권진혁은 범죄 조직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낙화는 왜 이런 사람이 이런 일에 몸 담고 있는 걸까 생각했었다. 어울리지 않는 일과 어울리지 않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괜히 얼굴도 선하게 생긴 사람. 낙화는 진혁이 나쁘지 않았다. 따지고 들자면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진혁이 수금을 하거나 약을 유통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은 척 해내는 것을 뒤 따라다니며 보고 배웠다. 어미 새를 보고 아기 새가 배우듯이 낙화는 진혁을 보고 고통을 주는 일에는 고통이 뒤 따른다는 것을 몸으로 익혔다.

진혁은 새끼 손가락이 반쯤 잘려나가 없었는데 다른 조직을 배신하고 이쪽 조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다른 조직원들에게 들었다. 진혁은 그 일에 관해서 입에 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낙화는 그에게 대놓고 그의 배신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진혁은 그래서 낙화를 좋아했다. 낙화가 주변 사람들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덕분에 사이가 돈독하고 괜찮은 관계였다. 그래서 낙화는 진혁이 이 일을 그만두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지독한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알게 뭔가. 진혁이 다시 조직을 배신을 한다면 손가락이 잘리는 데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그러니까 낙화야, 괜찮아."

진혁은 그렇게 낙화를 위로했다. 진혁의 머리 위로 총구를 대고 있던 낙화는 작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총구가 닿아 있던 진혁만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어둡고 맹렬한 비난의 눈초리가 진혁과 낙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낙화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일종의 청문회였다. 동시에 처형식이었다. 진혁은 조직을 다시 배신했다. 그건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낙화는 방아쇠 위에 얹은 손가락을 안쪽으로 꾹 눌러 당겼다.

탕.

총격음이 울리고 진혁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그의 몸이 넘어가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그려졌다. 낙화는 자신 안에 있던 진혁의 흔적들을 지우기로 했다. 지워버렸다. 진혁이 가르쳐준 것들은 출처 없는 형태로 낙화의 안에 남아버렸지만 적어도 낙화는 그의 이름을 지우는데는 거의 성공했다.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낙화의 곁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는 건 익숙해."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곁의 사람들이 그를 혼자 남겨두고 앞서 나가더라도, 또는 뒤처지더라도 낙화는 자신의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그대로 걸었다. 그가 맹목적으로 쫓는 복수가 끝나고 나서도 낙화는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방황하는 이들이 길을 잃은 것은 아니라고 했던가. 그 말은 낙화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틀린 말이다. 낙화는 길을 잃었다. 길 잃은 자들은 같은 곳을 맴돌지언정 멈추지 않는다. 멈춰서면 그 주변의 낯선 풍경들이 그가 외딴 곳에 홀로 버려졌음을, 더 이상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 아님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주변을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작정 걷는 것이다.

낙화에게 있어서는 일이 그런 방편이었다. 맹목적인 복수가 끝났음을 잊는 것. 더는 살아가야 할 의미를 잃었음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낙화는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생의 의미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건 가족을 잃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었으므로.

그럼에도 낙화는 진혁을 떠올린다.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내부에서는 많은 말이 돌았다. 배신자를 색출한다는 둥 쓸모없는 인력을 쳐낼 것이라는 둥, 또는 조직의 꼬리를 완전히 잘라내고 타 조직과의 병합이 있을 거라는 말도 있었다. 그 말들이 향하는 곳은 같았다. 가장 뒤에 매달린 꼬리를 쳐낸다. 잘라낸다. 그걸 버리고 가야 한다. 조직의 덩치가 커질 수록 쓸모 없는 잔가지를 부러뜨리고 잘라내는 것이 중요했다. 낙화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가 조직에 있는 동안 그런 식으로 휩쓰는 파도에 쓸려 나간 사람들이 몇이던가. 낙화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해야만 했다.

큰 파도가 덮쳤다. 낙화는 오래 버텼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많이 버틴 것이라고. 그는 조직을 배신하지 않았지만 조직에서 버림 받았다. 어쩌면 조직에서도 낙화의 불씨가 꺼졌음을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른다.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위안 해야 하는 걸까. 대규모의 숙청에서 낙화는 목숨을 부지한 채 내동댕이 쳐졌다. 그나마 목숨부지라도 했으니 나쁘지 않았다. 그게 낙화에겐 가장 큰 문제였다. 나쁘지 않은 그런 애매한 상태로 그저 살아만 있는 것. 시시했던 죽음처럼 시시한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 좋음으로는 나아가지 않는, 나아갈 수 없는 어중간한 삶의 갈래 길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일. 

낙화는 집으로 돌아왔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문득 진혁의 머리통에 대고 총알을 박아 넣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손이 떨렸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미진하기 그지없는 분노 때문에. 아니면 어쩌면 슬픔 때문에. 

진혁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기 때문에 슬펐나? 조직이 자신을 떠돌이 개처럼 버려서 화가 났나? 감정은 복합적으로 뒤엉켜서 그 정체를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다. 낙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더러운 오물 같은 감정들을 정리할 때에는 정의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럴 수 없는, 이름표가 붙지 않는 감정들이 남아서 밑바닥에 가라앉는다. 그것들이 퇴적되는 과정을 낙화는 인생이라고 불렀다.

조직에서는 쫓겨나왔기 때문에 그나마 있던 적은 짐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낙화는 그것에 그다지 상심하지는 않았지만 별것도 아닌 일들에 조그마한 분노라도 담아서 버리고 싶었다.

전기 레인지를 켜야겠다. 이번에는 5분, 10분이 아니라 30분 또는 1시간 그 이상을 켜둬야겠다. 그 위에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태워버려야지. 레인지의 상판에 눌러 붙을 검게 탄 종이들을 상상한다. 낙화의 상상 속에서 레인지의 열기는 온 집안을 뒤덮는다. 열기에 곧 이어 집은 화염으로 뒤덮힌다. 화염 속에서 사람들의 이름이 그을려 지워진 종이들이 흩날린다. 낙화는 그 가운데서 검은 종이 꽃이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본다. 눈을 감는다.

눈을 뜨면 현관 앞이다. 집은 서늘하다. 열기도, 팔랑이며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검은 종이 꽃도 없다. 낙화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침대에 늘어져 눕는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불평하듯 끼익거리는 소리가 집안에 울린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침대 안으로 점점 더 빨려 들어가듯 안으로 안으로 깊숙하게 빠져든다.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어떤 화염도 미치지 않는 하얀색 바다.

"...야. 낙화야."

누군가 그의 이름을 작게 부른다. 얼굴 앞으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면 역광에 가려진 선명한 외부 윤곽선만이 또렷한 얼굴이 보인다.

"누구..."

"낙화야. 그새 나를 잊었어?"

허탈한 듯하기도 하고 어딘가 안타까운 기색도 드는 목소리다. 낙화는 그 목소리를 알아챈다.

"진혁 선배?"

"그새 조금 더 자란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리가 없나. 다 큰 놈이 자라긴 뭘 자랐을까."

"뭐야? 왜 여기에 있어?"

진혁이 웃는다. 눈을 접고 입꼬리를 미묘하게 틀어 웃는다. 특유의 어색하면서도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완성된다. 낙화는 그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왜냐니. 일해야 하는데 자빠져 자는 놈 데리러 왔지."

그는 태평한 소리를 하며 낙화의 볼을 두드린다. 낙화는 주변을 둘러본다. 사무실의 소파에 반쯤 누워 있는 자신과 그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은 진혁이 보인다.

"어디로 가는데?"

"사람 잡으러."

"누구? 난 아직 들은 게 없어."

낙화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이윽고 기억들이 밀려 들어온다. 9월 17일. 조직에서 떨어져 도망간 사람을 잡으러 가는 날이다. 이름도 모르고 아는 것이라고는 사진으로 받은 인상착의와 거주지 뿐이다.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혼자인지,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사람을 사냥하러 가는 날이다. 이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았다. 가끔. 1년에 두어 번. 조직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잡으러 간다. 이유 역시 모른다. 왜 조직을 벗어나려고 하는지. 죄악감이 들어서 더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니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여겨 살고 싶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을 잡아서 이유 하나 묻지 않고 죽인다. 조직에서는 그런 사사로운 것들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낙화 같은 '사냥개'로 지명되는 사람들은 알고 싶어도 물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사냥개가 되는 사람들과 표적이 되는 사람들은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르는 것이 상책이니까. 그게 설명의 전부이다.

진혁은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서 옆 데스크에 놓여져 있던 사진과 서류 뭉치들을 서류 봉투 안에 담아 넣는다. 낙화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진혁이 정리하고 있는 서류들 옆에 놓여진 차키를 집어 든다.

"내가 운전 할게."

이 말은 오늘의 일에서 보조를 맡겠다는 뜻이다. 공격의 순위에서 자신을 뒤로 물리고 백업으로 임한다. 진혁은 그런 낙화를 흘긋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

진혁과 낙화는 자료들을 가지고 차창이 새까맣게 선팅된 차에 오른다. 낙화는 차에 시동을 걸고 음악을 켠다. 밝고 통통 튀는 곡조의 음악이 흘러 나온다. 어딘가 늘어지다가도 갑자기 튀어 오르는, 흐린 듯 하다가도 선명하게 밝아지는 음악이다. 낙화는 음악을 따라서 흥얼거리며 엑셀을 밟는다.

"네비 찍어줘."

"기다려 봐."

차가 큰 대로변으로 나서자 진혁이 타겟의 집 주소를 찍는다. 화면을 누를 때마다 음악에 섞이지 않는 맑은 소리가 띵띵 하고 울린다.

"끝나면 바로 복귀?"

"어떻게 할래? 

"음... 술 마시러 갈까. 아니면 어디 놀러 갈까?"

"생각해둔 데라도 있어?"

진혁의 물음에 낙화는 한참 고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냥에 어울리는 노래가 아니야. 그런 생각만 든다.

"강원도 갈까? 바다가 보고 싶어."

"가까운 인천 놔두고 무슨 강원도?"

"인천은 싫어. 거긴 서해잖아. 나는 동해가 보고 싶다고."

낙화는 운전대를 팡팡 가볍게 두드리며 불평한다. 인천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라앉아 있어서 싫다. 거기서 잡은 물고기들은 다 인간을 뜯어먹고 자란 것들일 것이다. 그래서 낙화는 그쪽에서는 횟집에도 가지 않는다. 시멘트에 담궈버리면 뭐해? 썩으면 다 흘러나올텐데. 낙화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다.

"회는 먹지 말자. 이왕이면 육고기가 더 좋아."

"그래. 너 하고 싶은대로 다 해라. 내일 엄청 깨지겠구만."

진혁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작게 푸념한다. 하늘은 흐린 회색이다. 서울은 맑은 날이 별로 없다. 있어도 미세먼지에 뒤덮인 하늘은 그다지 깨끗한 파란색으로 빛나지 않는다. 언제나 어두운 필터가 하나 끼여든 것처럼 묘하게 뿌옇다. 낙화는 그런 하늘을 힐끗 바라본다. 해가 지려면 아직이다. 강릉까지 가면 밤이 되어 있겠지만 괜찮다.

차가 점점 더 좁은 골목길 사이로 진입한다.

"총이야, 아니면 칼?"

"칼. 총알 아깝다고 쓰지 말라더라."

"우리만 쎄빠지는거지."

진혁이 그 말에 우스운 듯 크게 소리내서 웃는다. 예전부터 진혁은 낙화의 진심어린 투덜거림을 듣는 걸 좋아했다. 그런 점에서는 영 성격이 나쁘다고 혼자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보고서에는 쓰지 마. 내가 욕했다고."

"썼다간 나만 곤란해지는데 내가 왜 그러겠냐?"

"혹시 모르잖아. 우리 사이에 우정이 이렇게 없었나?"

"없지, 없어."

진혁은 웃음을 갈무리하며 입을 손으로 가리고 쿡쿡 거린다. 차가 멈춰 선다. 작은 빌라 앞이다. 몇 대 되지 않는 차들이 불법 주차 되어 있는 골목에 어렵사리 차를 댄다.

"이래서 한국인들은 안된다고. 여기에 차를 대면 어떡해?"

낙화는 작게 짜증이 섞인 말을 뱉으며 차에서 내린다. 맞은 편에서 내린 진혁이 쾅 소리가 나게 차 문을 닫고 습관적으로 자켓의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문다.

"한 대만 피고 들어가자."

"그러다 눈치 채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매번..."

"알겠냐? 우리가 자기 잡으러 온 사람들인지. 네 꼴을 봐. 그냥 멀대 같아선... 대학생? 그렇게 보인다."

"진혁 선배는 아저씨 같아."

"어쭈. 나 아직 서른 둘이다."

그런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눈다. 진혁은 담배를 절반도 다 태우기 전에 재떨이에 비벼 끄고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런 점을 보면 이 사람은 어떻게 해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다니다가는 미쳐버릴 거다. 낙화는 그렇게 미래를 본다. 그는 진혁 역시 도망칠 걸 안다.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내버려 두기로 한다.

"가자."

후미진 빌라의 내부는 음습하기 그지 없다.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건가 싶지만 생활감 있는 소란이 느껴진다. 세탁기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소리. 사람들끼리 대화하고 싸우는 소리. 티비에서 들리는 잡음이 섞인 목소리들과 어린아이들이 저들끼리는 소곤거린답시고 나누는 비명같이 높고 새된 소리. 낙화는 그 인간들에 대해서 상상하기를 포기한다. 그만둔다. 깊게 알면 알 수록 일이 어려워질 뿐이다.

진혁은 서류 봉투 안에서 챙겨 두었던 사진 한 장을 꺼내 낙화에게 내민다. 낙화는 그것을 받아 들고 한참을 보다가 다시 돌려준다. 다시 진혁의 자켓 앞 주머니에 접혀 들어가는 사진을 보며 접이식 칼을 꺼내 등 뒤로 숨긴다. 진혁은 초인종을 누른다. 내부에서는 작은 기척이 느껴진다. 숨으려고 하지만 숨겨지지 않는 숨이 만들어내는 기척이다. 낙화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가스 점검원인데요, 안 계세요?"

진혁이 익숙하게 말한다. 이건 진혁이 자주 써먹는 래퍼토리다. 낙화는 조금 전 차안에서 들었던 신나는 곡조의 음악을 떠올리며 속으로 흥얼거린다. 전주 부분이 끝날 무렵 문이 느리게 열린다. 진혁은 열린 틈 사이로 발을 밀어넣고 닫지 못하도록 한 후 부드럽게 웃는다.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한, 어딘가 어색한 미소.

문 안의 남자는 눈치를 챈 듯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발의 습한 발자국 소리를 뒤따라서 진혁의 구둣발 소리가 이어진다. 낙화는 경계하는 태세를 유지하며 그 뒤를 밟는다. 바닥에 더러운 자국이 묻어 있다. 낙화는 그 자국을 따라가듯 방으로 들어간다. 진혁이 남자를 제압하고 있고 그의 손에 들린 칼이 심장으로 천천히 꽂혀 들어간다. 입을 손바닥으로 꾹 막고 있지만 처절한 비명이 답답하게 울려퍼진다. 남자는 버둥거리다가 생명을 잃고 바닥에 늘어진다. 남자의 움직임이 멎으면 진혁은 나이프를 심장에서 뽑아낸다. 동시에 피가 울컥 솟구치며 순식간에 바닥은 거대하고 둥근 웅덩이가 생긴다. 낙화는 진혁의 얼굴을 살펴 본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죽은 것이 진혁인 것처럼.

"자."

낙화는 방 안에 걸려 있던 수건을 진혁에게 던져준다. 진혁은 그것을 받아서 칼을 대충 닦는다.

"시체는 어떻게 하래? 두고 와도 된다고 했어?"

"'경비견'이 순찰하러 오면 그때 처리한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여기서 일 끝."

진혁은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로 느릿하게 들어간다. 그의 구두 모양대로 붉은 발자국이 찍힌다. 낙화는 점점 더 넓어지는 웅덩이를 보다가 방문을 닫아버린다.

한참을 손에 밴 핏기를 빼려는 물소리가 들리고 구두를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 들려온다. 낙화는 소파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머리 속에서 울리는 음악은 이제 클라이막스만을 반복한다. 뒤가 생각이 안 나.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반복되는 어지러운 클라이막스의 궤도를 무한히 반복하며 돌 뿐이다. 진혁은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낙화를 보고 작게 코웃음을 흘린다.

"일은 내가 했는데 왜 네가 지친 얼굴이냐?"

"나도 일 했거든..."

"뭘 했는데?"

"문 닫기?"

"잘 했다."

낙화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진혁에게 어깨동무를 한다.

"강릉에 가서 피자 먹자. 어때? 돌아오면 밤 늦겠지만."

"굳이 강릉까지 가서 피자를 먹어야 되겠어, 너는?"

"나는 피자를 먹어야겠어. 하와이안으로."

낙화가 굳은 결심이라도 한 것 마냥 결연하게 말하자 진혁이 낙화의 턱을 툭 치고 성큼성큼 걸어서 집 밖으로 나간다. 낙화는 닫힌 방문을 무언가 확인하듯 돌아보고는 현관문을 닫고 나온다. 다시금 세상은 소란함으로 가득 찬다. 슬리퍼가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달리는 어린아이의 소리가 밖으로 지나간다.

"이 늦은 시간에 애 혼자 다니네."

"집 근처인가보지."

진혁은 담배를 무는 것처럼 입가를 만지다가 다시 손을 내린다. 대신 입가에 미소를 건다. 낙화는 그의 볼을 쿡 찌른다.

"자연스럽게 좀 웃어봐. 그러니까 다 티가 나지."

"내 얼굴은 원래 이렇게 타고 났어."

"내가 웃는 것도 가르쳐줘야겠어?"

"누가 보면 네가 내 사수인 줄 알겠어?"

둘은 다시 차에 탄다. 흥겨운 음악의 끝부분이 흘러나온다. 아, 그래. 후렴이 이랬었지.

"이 노래 안 지겨워?"

"다른 거 틀어줄까?"

진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낙화는 다음 곡으로 넘겨버린다. 애절한 발라드가 흘러나온다.

"이건 누구 취향이야? 내가 이런 걸 너랑 같이 들어야겠어?"

"좀만 참아 봐. 우리 우정이 이것밖에 안돼?"

"아까부터 자꾸 우정 타령이나 하는 거 보니까 외로운가보지?"

"웃기고 있어."

낙화는 운전대를 돌려 능숙하게 차를 좁은 골목길에서 빼낸다. 진혁은 음악을 몇 차례 넘겨버리더니 이내 처음 들었던 곡으로 다시 돌아온다.

매끄럽게 흘러가던 기억이 다시 이지러진다. 그래서 그 뒤는 어떻게 되었더라. 진혁과 강릉에 갔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늦은 밤에 밤바다를 보고 어울리지 않게 청승을 떨며 잡담과 웃음으로 시간을 허비했던 거 같다. 그러다 길가에 있는 프렌차이즈 피자가게에 들어가서 하와이안 피자 대신 여러가지 토핑이 화려하게올라간 피자를 먹었던 것 같다. 그 피자에는 파인애플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 낙화는 투덜거렸지만 진혁은 조용히 하고 먹으라고 혼자서만 맥주를 마셨다. "너는 운전 해야 하니까 내가 너 대신 많이 마셔줄게." 뭐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진혁은 낙화와 일하면서 단 한 번도 괜찮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걸 어떻게 일일히 기억하냐 싶지만 낙화의 기억엔 그랬다. 그래서 마지막에 들었던 괜찮다는 말이 그다지도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여상한 척이나 하는 주제에 그런 소리를 했다. 괜찮다고. 나를 죽여도 괜찮다고. 버려지는 것은 익숙하다고. 

생각해보면 그건 위로의 말이었던 것 같다. 낙화야, 괜찮아. 

눈을 뜨면 침대 위다.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는지 머리가 아팠다. 이마를 짚으며 삐걱이는 매트리스를 짚고 일어난다. 누군가 옆에서 그의 이름을 부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낙화야." 하고.

낙화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언제나처럼 뿌옇게 흐린 회색빛 하늘. 구름이 낀 건지 아니면 먼지가 자욱한 건지 알 수 없는 색깔이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문득 묘한 기분에 부엌을 돌아본다. 레인지가 켜져 있다. 그는 다급하게 일어서서 레인지를 끈다. 후끈한 열기가 얼굴 위로 훅 끼쳤다가 흩어진다. 손목 시계를 확인하니 1시간이 조금 넘게 지나있다. 용케 불이 나지 않았구나 싶다. 안도감이 드는 걸 보니 아직은 그다지 죽고 싶지는 않은가 보다.

그는 다시 시계를 확인한다. 지금 출발하면 강릉에는 밤이 되기 전에 도착 할 것 같다. 그러면 이번에는 그때 먹지 못했던 하와이안 피자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방해꾼이 없어서 다행이지."

작게 중얼인다. 주머니에 든 차키를 꺼내 손아귀 안에서 무게를 가늠하듯 굴리고는 집 밖으로 나선다. 까맣게 선팅된 차에 올라탄다. 습관적으로 음악을 켠다. 시끄러운 락 발라드가 흘러나오는 것에 얼굴을 찌푸리고 노래를 넘긴다. 그러다 익숙한 전주에 멈칫한다. 

밝고 통통 튀는 곡조의 음악이 흘러 나온다. 어딘가 늘어지다가도 갑자기 튀어 오르는, 흐린 듯 하다가도 선명하게 밝아지는 음악. 낙화는 멍하니 그 노래를 듣는다. 노래는 클라이막스를 향해서 달려간다. 낙화는 저도 모르게 그 부분을 따라 흥얼거린다. 진혁의 등. 입을 틀어 막은 힘줄이 솟아 오른 두꺼운 팔.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손을 찍어 누르며 심장을 향해 내리 꽂히는 칼. 둥글게 원을 그리며 흘러 넘치는 붉은색의 피 웅덩이.

낙화는 운전대에 팔을 걸치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댄다. 이름표가 붙지 않은 퇴적되어 있던 감정들 아래에 파묻혀 있던 이름표가 하나 둘 떠오른다.

류낙화.

권진혁.

류낙원.

서미희.

류경석.

크래딧이 올라가는 것 같다. 그렇게 느끼며 낙화는 다시 고개를 들고 차의 시동을 건다. 이건 인생의 한 부분이 끝나는 분기점이다. 낙화는 흘러 나오는 이름들에게 말한다.

"괜찮아. 익숙하니까."

아픔마저 익숙해지진 않을지라도 괜찮다. 사라져도 괜찮다. 언젠가 사라질 이름들이었으니까. 그러니 맨 마지막에 남는 이름이 류낙화 하나이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 언젠가 지나간 이름들이 맞이하러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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