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끝에 흰 꽃잎을 뿌리고

우린 단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던 것처럼

- 게임 '더스크우드'의 제이크 드림입니다. 드림주O

- 류백화 × 제이크. 수배된 기자와 수배된 해커. 태그 #류젴

- 전반적인 스포일러 주의

- 원작에 없던 대화문을 추가했습니다.

- 화이트데이 이벤트로 적은 if 소설입니다. 사건이 끝나고 행복한 시간이 왔다면-이라는 전제하에 적은 글입니다.

- 본문 약 4000자

나는 평소 개방적인 사람이라 자부하지만, 더스크우드에 대해 말할 때는 두루뭉술한 어휘를 썼다. 어떤 순간을 '그날'이라고 지칭하고, 이름 대신 '그 애'를 불렀다.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 할 사람은 우리의 적 많은 해커 보이 하나였지만, 기억에 남도록 불운한 순간은 수없이 많았다.

릴리 던포트의 가짜 뉴스가 초대박 조회수를 찍은 날이 그랬다. 류와 제이크에 대한 충격 폭로 영상, 그거. 덕분에 나는 기껏 찾은 은신처를 버려야 했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백팩 옆 주머니에 막 주운 여행 책자를 꽂아 엉성하게 관광객 코스프레를 하면서.

언제나 통하는 방법은 아니다. 어느 악취 심한 심야 기차에서 브이로그를 찍는 1인 관광 루트는 어느 패키지에도 없으니까. 그래도 별 수 있나. 나에겐 하나뿐인 목숨이 있었고 그것보다도 더 지켜야 할 노트와 카메라가 있었다. 소음 공해 끝내주는 모텔이 은신처로서의 의미를 소실했다면 바보 같은 연기에라도 기대 봐야 했다. 후드를 쓰고 현지인인 척 하기엔... 이 동네에 아시안은 나뿐이니까. 젠장.

그렇게 나는 릴리 던포트의 가짜 뉴스에 정신없이 쫓겨 다녔다. 몇 명의 바보들에게 사이버 악담을 듣고(이 부분에선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취재 채널 구독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걸 목격하고(해명이 언제나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선글라스 군단과 끝내주는 추격전을 벌이고(내 명줄이 끝나는 줄 알았다), 잠을 줄여가며 한나 던포트의 클라우드를 해킹했다.

사람이 실종됐으니까. 그만둘 수 없었다.

지독한 천성이다.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떠드는 기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내 기나긴 도주 생활이 그 증명이다.

어쨌건 더스크우드의 명탐정 모임은 요주의 인물을 내쫓지 않았고, 나는 '???'와 계속 문자를 이어갔다. 영상은 삭제되었고, 나는 그 내용을 종종 곱씹었다.

그러면서 릴리 던포트가 부른 낯선 이름 하나를 잊기로 했다.

어떤 도망자는 나와는 다르게 물음표 세 개만 달고 활동하는 걸 선호하고, 알리기 곤란한 걸 떠드는 기자는 미움을 받으니까.

다짐한 새벽에 문자음이 울렸다.

[ 류. ]

[ 나 불렀어? 🙂 ]

[ :) ]

[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 쉬고 있었나? ]

나는 스위치가 고장 나 여태 껌뻑거리는 백열등을 잠시 노려봤다.

[ 아니야, 나 원래 잠 없어. ]

급하게 짐을 싸다 안대를 잃어버렸지만, 아무튼 나쁘지 않다. 사건 취재 중에는 종종 밤을 새우지. 오늘도 그런 날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 그런데 웬일이야? 이 시간에. ]

[ 단서 찾았어? 사건 관련 얘기? ]

[ 아니, 지금은 다른 용건이다. ]

나는 장갑을 벗고 타자를 했다. 터치가 되는 종류라지만 맨손이 더 편한 게 사실이었다.

[ 아하. ]

[ 그럼 혹시 스몰톡 시간인가? 😗 ]

[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 ]

이후 문자를 썼다 지우는 마크가 반복적으로 떴다. 무슨 거창한 주제길래? 뭐라 재촉해 보려다가 금세 그만두었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하게 되면 손해니까.

[ 류. ]

[ 지금껏 너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

[ 너는 자신을 류라고 소개했지. ]

[ 그러나 내가 너를 그렇게 부르는 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떨리던 심장이 진정되었다. 난 또, 처음에 이름 똑바로 안 말했다고 추궁하는 줄 알았네.

[ 날 신경써 준 거야? ]

연필 마크.

[ 나는 네 감정이 상하지 않길 바란다. ]

[ 우리는 앞으로도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

[ 소통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를 짚고 넘기고 싶었다. ]

[ 이것이 네 신경을 쓴 것이라면, 아마도 그런 것 같군. ]

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새로 만난 해커 친구는 종종 이상한 짓을 하지만 제법 섬세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나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새벽 공기와 백열등 빛은 지독하게 서늘한데, 글자 뒤 감정을 읽다 몸을 데워서인지. 나는 마이크 모양을 클릭해 스피커에 입을 가까이 했다.

"내 이름은 백화야. 류-백-화-. 한국 이름이고, 영어 이름은 없어. 번역하면 하얀 꽃."

전송.

[ 마지막은 괜히 덧붙였나? (땀 흘리며 웃는 임티) ]

답이 즉각적으로 왔다.

[ 아니, 중요한 정보였다. ]

[ 내게 알려줘서 고맙다, 백화. ]

고맙기까지야, 누구나 알 수 있는 건데.

[ 😁 ]

[ 또 보자, 해커. ]

[ 👋 ]

화면을 끄고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조금 전 보낸 음성 메시지, 즉각적인 답, 오타 없이 정확하던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영상 속 릴리는 나를 류라고 불렀고, 기사 아래에 이름을 적지 않은지 꽤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본인의 정보를 숨기면서 남의 이름을 묻는 것에 답변해줄 처지가 아니었다. 저쪽은 대단한 해커라 이미 내 이름을 수여 번 읽어 봤을 거고, 어쩌면 어느 겁 없던 과거의 내가 올렸을 기사도 훑어보았을 테다.

하지만 나는 불빛이 점멸하는 방에서 천장을 구경하며, 재차 시려지는 공기에 숨을 내뱉고, 조금 전까지는 이 온도를 눈치채지 못했던 이유를 되짚다가 액정 너머 '???'를 떠올리고. 스스로 이름을 캐낼 용기도, 가짜 뉴스에서나 겨우 주워들은 이름을 다시 불러줄 용기도 없다는 걸 상기한 후 휴대전화를 손으로 짚었다. 기기가 때맞춰 진동했다. 친구들과 더스크우드의 문자는 알림음과 함께 오게 설정되어 있다. 즉, 지금 연락을 보내는 야행성 인간은 가짜 뉴스를 주워들은 사람이거나, 화가 난 독자거나, 어쩌면 둘 다일 텐데. 어쨌건 지금은 읽고 싶지도 답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시시각각 따라붙는 추격자들을 막연하게 감지하며 도망치느라 바빴다. 해킹과 각종 프로그램 등을 쓰는 것보다 몇 배는 아마추어 같지만, 기묘하게도 아슬아슬하게나마 먹히는 이 짓을 몇 년째 하고 있는데. 이를 감안한다면, 몇 주 정도 문자를 읽지 않고 씹어도 정상참작이 될 것 같았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것도 용서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누구랑은 다르게 도망치는 게 항상 버겁고, 휴대전화를 빼앗겨서 정보가 노출될 게 인생 최대의 걱정이 되어 버린 사람이니까. 안 그래도 수배되어 있다는 해커 친구를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기만족이었다.

나는 더스크우드와 연관된 이후 어떤 하루를 그날이라 칭하고 어떤 사람을 그 애라고 불렀는데, 그날 그 애 이름을 적지 않음으로써 그의 적들에게 협조하지 않았지만 액정 너머의 누군가에게 미안해질 짓을 했다.

***

그런 시기도 분명히 있었다.

[ 나랑 오늘 만나자고 한 사람 찾아요 ]

지금은, 글쎄.

[ 😚 ]

이러고 있다.

이모티콘은 괜히 보냈나.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어디 애교를 부려 봤어야지. 메시지를 길게 눌렀다가, 곧 그만뒀다. 귀여운 이모티콘을 창피해할 사이가 아니게 된 지 꽤 지났으니까.

그럴 시간에 외관을 점검하기로 했다. 나는 몸을 굽혀 호수 표면을 보았다. 머리? 도착해서 가발 벗었고, 원래대로 검은색. 얼굴에 묻은 거 없고, 안경도 안 깨졌고. 주름도 찢어진 흔적도 없는 하얀 셔츠. 로우테일을 고정한 반달 모양 핀도 손끝에 멀쩡히 닿는다. 훌륭해. 나무에 몸을 기대고 푹 숨을 내쉬었다.

제이크가 그 멍청한 광산에서 탈출한 이후로 많은 게 바뀌었다. 물론 제이크는 언제나처럼 도망쳐야 했다. 지금 내가 그렇듯이. 하지만 제이크는 몸 성히 광산을 빠져나왔고, 포위망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반년이 들었지만 제이크가 해낸 일을 생각한다면 되려 짧았다. FBI를 따돌린 것만이 아니다. 내 휴대전화에 원격으로 니모스를 설치해 아주, 아주 많이 나를 도와주었다. 겹겹이 깔아둔 보안 프로그램이 배터리를 살살 녹이기 시작한 지 꽤 긴 시간이 흘렀는데, 어떻게 그걸 뚫고 내 폰을 갖고 노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나는 그걸 용인할 수 있게 되었고, 그건 익숙함보다 더 깊은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마음속으로 그 애를 제이크라고 불렀고, 그 애도 나를....

-파삭.

작년의 낙엽.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문득 바람이 불어 손바닥으로 앞을 가렸다. 청량한 물의 향, 봄 숲의 내음, 그리고.

"늦어서 미안하다, 백화."

전자음 없이 사람의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네 이름이 하얀 꽃이라고 했지."

나는 어느 날 전송했던 음성 메시지를 떠올렸다. 내 이름은 류백화인데, 번역한다면 하얀 꽃이라고.

장갑을 낀 손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백합, 자스민, 목련, 백장미. 각기 다른 향에 에워싸였다. 하얗게 달다는 것만이 같은 점인 꽃내음.

그리고 제이크가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그런 풋내 나는 얼굴이 어울렸던 것처럼, 희게.

"화이트데이 축하해, 백화."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던 것처럼, 봄볕에 투명하게 뼈대를 드러내는 꽃잎에 파묻히듯 안겨서.

"고마워. ...제이크."

숨기고 아끼던 이름을 꺼내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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