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창작 소설

구원과 반짝임

Sit down beside me -3


늘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관용구로 말하는 그런 깨어 있음이 아니라 진짜로 잠에 들지 않는 사람. 진혁은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자지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는 스스로도 잘 몰랐다. 낙화가 "왜 계속 깨어 있어." 하고 물을 때면 언제나 "그냥. 잠이 잘 안 들어." 하고 대답했다.

밝고 별이 성근 밤을 많이 지냈다. 진혁의 밤이 길게 지나는 동안 세상은 저물었다가 다시 피어나기를 반복했다.

낙화가 처음 조직에 들어왔을 무렵에 진혁은 심한 불면에 뒤따르는 피곤 탓에 몇 가지의 일을 그르친 상태였고 말하자면 좌천의 위기에 있었다. 진혁이 낙화의 사수가 되어서 잡일을 가르치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는 뜻이겠다. 진혁은 아직은 어리고 덜 여물은 어린아이 같은 낙화를 보고 첫 눈에 '이거 큰일이다.' 하고 생각했다. 어린 애들이 조직에 굴러 들어오는 일은 허다하다. 그런데도 낙화를 보고 그런 인상을 가졌던 이유는 아마 낙화가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징역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절망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았다. 그래서 가르칠게 많겠다고 생각했다. 가르치고 싶지 않은 것들도, 많이 알려주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낙화는 일을 곧 잘 배웠다. 키만 멀대 같이 크고 말라서 아직 성장기처럼 보이는 녀석이 생각보다 일머리가 좋고 몸으로 하는 일은 더 잘했다. 말단인 만큼 몸 쓰는 일이 많아서 낙화는 쉽게 일을 배우고 자랐다. 낙화가 자라면 자랄 수록, 손에 피 묻는 일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진혁의 불면은 더 심해졌다.

혼자만을 감당하는 것은 상관 없는 일이었으나 낙화가 자신의 뒤에 붙은 후로 낙화가 짊어져야 하는 짐까지 자신이 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낙화가 미웠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진혁은 책임을 느낄지언정 낙화를 미워하지 못했다.

성격이 무르다고 말을 많이 들어서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낙화도 "진혁 선배는 이래가지고 여기서 살아남겠어?" 하고 말할 정도였으니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봐야 했다.

진혁이 폭력 조직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다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불우한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니라는 것이지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은 또 아니었다.

진혁은 그럭저럭 잘 나가는 테니스 선수였다. 테니스라는 게 그렇다. 근육이 다칠 일이 많은 운동인지라 부상 은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나이가 꽤 들어서까지도 열심히 코트 위에서 뛰는 사람도 많다. 진혁은 전자의 사람이었다.

테니스는 팔로 라켓을 들고 공을 치는 운동인데 동시에 다리도 쉴 틈 없이 움직이고 달려야 했다. 반사신경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온 몸의 근육이 잘 다져져 있으면서도 가볍게 뛸 수 있는 민첩함도 필요했다. 진혁은 반사신경이 좋았다. 그래서 어이없게도 날아드는 공과 라켓을 피하려다 몸을 굴렀고 그러다 다리가 부러졌다.

공은 그렇다 쳐도 라켓은 왜 던진 건지 모르겠다. 운동 선수 중에는 화가 많은 사람이 많고 테니스 선수 중에는 특히 더 많은 것 같다. 진혁처럼 수더분한 사람은 적었다. 일대일로 경기를 뛰다 보면 사람들의 승부욕은 분노로 표출되는 것 같다고 진혁은 생각했다. 진혁은 한 명과 개인전을 뛰면 오히려 차분해져서 냉정하게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공과 라켓을 동시에 던진 그 선수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테니스를 치다보면 상체, 특히 주로 쓰는 팔과 연결된 근육들이 많이 발달하게 된다. 다리에 근육이 붙는 것은 상박의 근육이 붙는 것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고 사용량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진혁은 억울했다. 팔은 여전히 쓸만한데 다리가 부러져서 은퇴하게 되었다는 게.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하면 할 만한 것들은 많았다. 코치를 해도 될 기량은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발 들일까 했는데 우연히 보고 만 것이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이었다. 완전히 자연스러운 거동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물리치료는 계속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듣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가족과는 사이가 멀어서 사실상 홀몸이었던 터라 누가 마중을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내린 후 건물 안으로 들어 가려는데 신음 소리 같은 게 골목길 안에서 들렸다. 진혁은 그 소리를 듣고 익숙하다고 생각해버렸다. 다리가 부러졌을 때 자기 입에서 꼭 저런 소리가 났던 것 같다. 그래서 진혁은 그 골목길 사이에 버려진 자신의 몸뚱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참하게 꺾인 미래가 나뒹굴고 있을 것이라고.

"누구 있어요?"

진혁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 도와줘... 살려줘.."

가냘프게 이어지는 헐떡이는 소리에 진혁은 골목길로 달려 들어가다 통증을 느끼고 앞으로 넘어졌다. 고개를 들자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진혁은 그대로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119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진혁을 피 묻은 손으로 덥썩 잡으며 만류했다.

"안돼. 일반 병원은 못, 가.."

"그럼 어떻게..."

"내가 아는 곳이 있어, 거기로. 거기로..."

남자가 불러준 주소는 서울 외곽, 그러니까 경기도에 면해있는 외진 곳에 있는 작은 동물 병원이었다. 진혁은 자신이 입고 있던 블레이저를 벗어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의 복부를 지혈하고 그를 일으켜 택시를 잡아서 달렸다. 택시 기사가 경악하며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다 주려는 것을 말리고 3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20분만에 주파해서 도착했다.

동물병원에 도착했는데 병원에는 동물들은 없었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망한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수상한 느낌이 풀풀 풍기는 것에 진혁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떤 일에 휘말린 것인지 깨달았다. 수의사라고 자신을 칭하는 의사는 알고 보니 면허가 정지되어 불법적인 루트로 돈을 받고 수술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진혁은 남자를 데려다 준 후 빨리 그곳을 떠나려 했다. 그때 의사가 진혁을 붙잡았다. 의사는 진혁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들어본 적 있는 물류 회사의 이름이 박힌 명함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해. 우리도 은혜는 갚을 줄 알거든."

진혁은 집으로 돌아가서 명함을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별 다른 고민은 없었다.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라 했는데 진혁은 당장의 먹고 사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 동안 벌어 놓은 돈은 병원에 쏟아 부어졌고 남은 돈으로는 다시 재취업 할 시간이 빠듯했다. 진혁은 이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면이 시작된 건 조직에 들어오게 된 후였다. 생각보다 일에 대한 압박이 심했다. 애초에 양심 같은 걸 내려놓은 사람이었다면 쉬웠을 텐데 진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진혁이 사람들을 죽음의 경계까지 몰아 넣는 동안 그는 그 스스로도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야 하니까. 그런 이유로 모든 죄악감을 묻어두고 맡은 일을 처리했다. 피로한 기분에 몇 번 일을 망치거나 거의 파투 낼 뻔한 경우가 쌓이니 조직에서의 신뢰도가 많이 낮아졌다. 위태로웠다. 스스로 서 있는 것도 어려웠는데 그 와중에 뒤에서 떨어지라고 밀어내는 꼴이었느니 넘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서 도망쳤다. 조직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그런데 정작 나오고 보니 편치도 않았다. 배신자를 처단하려고 조직에서 사람을 풀었고 진혁을 순식간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되는 대로 알음알음 친분이 있던 다른 조직의 사람에게 거둬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다시 밑바닥으로 들어가게 될 거였으면 차라리 나오지도 않는 거였는데 잘못 선택했다고 후회했다.

조직에서는 두 번의 배신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진혁의 새끼 손가락을 잘라갔다. 그 손가락이 어떻게 됐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배신자의 손가락은 소중하게 수집 되고 있으려나.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려졌으려나. 진혁은 여전히 가끔씩 손가락에 통증을 느꼈지만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때 들어온 것이 낙화였다. 진혁은 낙화가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수금을 하고 사람들을 협박하고 때로는 죽이거나 사지로 내모는 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결국 스스로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아버렸던 것 같다. 알량한 선심이나 거기에 따르는 자기 위로 같은 것들을 버리고 나니 조금은 편했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지만.

낙화는 사무실 한 켠에 딸린 소파에서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진혁은 그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아서 낙화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일이 생기는 경우가 아닌 이상 낙화가 자연스럽게 꿈에서 벗어나는 사이를 지켜보았다. 그 애가 자신처럼 느껴지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낙화는 진혁과는 많이 달랐다. 자신 보다 더 일을 잘 했고 빨리 배웠고 동시에 죄책감은 덜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해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또 아닌 것 같아서 그 점이 신기하기도 했고 마음에 들었다.

낙화랑 있으면 그나마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 아니 어쩌면 스스로 목을 꾹 잡고 숨구멍을 틀어 막고 있을 때에도 낙화가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하면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그 사이로 컥컥대는 숨이 들어찼다. 그러니 진혁이 낙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딘가 멍하니 멀리를 보는 낙화를 보다가 그 시선을 따라가면 코앞에서 아우성 치는 고통들은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낙화가 진혁을 의지하는 만큼 진혁도 낙화를 의지했다. 둘은 좋은 콤비였다. 다른 사람이랑 일을 나가면 일일히 손발을 맞춰야 했는데 낙화와 나가는 날에는 어떤 합의도 필요 없이 자신 몫의 일을 하면 됐다. 그래서 자연히 낙화와 진혁 둘이서 진행하는 업무가 늘었고 나중에 되어서는 진혁 옆에는 당연히 낙화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혁은 낙화에게 미안했다. 이런 일을 시키게 만들어서.

낙화는 괴로운 얼굴을 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진혁이 마지막으로 본 낙화의 얼굴은 쥐어 짜내는 듯한 고통으로 물들어 있어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툭 치면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낙화가 울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어쩌면 자신이 죽고 나서 울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류낙화 하나 뿐이겠지만 그래도 그가 울지 않았으면 했다. 겨우 이딴 죽음에 눈물 흘리지는 말았으면 했다.

강릉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죽기 전에는 주마등이 스친다더니 진짜였다. 근데 그 주마등의 대부분에 낙화가 나왔다. 웃기지도 않았다.

진혁과 낙화는 일을 마치고 강릉만 갔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 날 일이 힘들었어서 그랬나, 아니면 낙화가 잠결에 뜬구름 잡듯이 자신을 못 알아 봐서 그랬나. 그게 꼭 죽음 같이 느껴져서 그랬나, 진혁은 강릉의 어두운 바다에서 낙화와 시덥잖은 이야기나 했던 것들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어둠이 넘실대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짙은 분홍 빛과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예뻤다. 해가 저쪽으로 지지는 않을 텐데, 왜 저런 색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낙화는 장시간 운전을 한 터라 피곤한지 뒷목을 주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차문이 둔탁하게 닫히는 소리 말고는 적막했다. 사람도 별로 없었다.

'사냥' 임무를 맡은 날에는 일부러 사람 많은 곳은 피하는데 그래서 낙화가 이곳으로 데려왔나 싶었다. 배려인가, 아니면 그냥 평소대로의 변덕인가 싶어서 낙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자 낙화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왜?"

"아니, 피곤한가 해서. 많이 피곤해?"

"조오금. 걷다 보면 풀리겠지."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해변을 안 걸으면 무슨 소용이겠어."

"드라이브도 나쁘지 않지 않나?"

"근데 너 피곤하다며."

"그치."

낙화가 흐늘하게 웃음을 짓는 것에 진혁이 따라서 웃었다. 공기가 좋았다. 역시 강원도라 그런가.

진혁은 해변으로 들어가서 구두를 벗은 후 손에 들었다. 낙화도 따라하듯 자신의 구두를 벗어서 검지와 중지에 걸치고 진혁의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낙화는 사람 눈치를 잘 안 보는 타입이었는데도 기분 나쁘게 말하거나 실수하는 일은 적었다. 그게 신기한 녀석이라고 생각해서 곁에 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한 번쯤은 꼭 말 얹고 가는 자신의 잘린 새끼 손가락에 대해서도 한 번을 묻지 않아서 그게 좋았던 거 같다. 사람을 죽이고 나면 몰려드는 피로나 정신적인 박약을 모르는 척 해줘서, 어쩌면 진짜로 모르고 넘어가서 그게 좋았다.

"바다에 왔는데 안 들어가려니 조금 찝찝하지 않아, 진혁씨?"

진혁씨라고 부르는 경우는 대체로 애교를 떨거나 장난을 칠 때였다.

"왜, 넣어줄까?"

"내가 들어가는 거야?"

"들어가고 싶어서 물어 본 거 아니냐?"

"같이 들어가자는 거지. 완전히 푹 잠기면 찝찝하니까 발만 담그자. 어때?"

"싫다고 하면 날 들고 물에 던져 버릴 생각이겠지."

"정답."

낙화는 자리에서 멈춰 서서 들고 들고 있던 구두를 모래사장 위에 내려놓고 맨발로 푹푹 꺼지는 모래를 밟아가며 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인데도 차갑다. 들어 와. 생각보다 기분 좋아."

진혁은 너를 어떻게 이기겠냐. 하는 생각이나 하며 낙화의 구두 옆에 나란히 자신의 구두를 내려두고 성큼성큼 파도가 밀려드는 물을 밟아 들어갔다. 낙화의 말대로 차가운 물이 발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밀려 사라지고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보다 더 안쪽에서 발 장난을 치고 있던 낙화가 즐거운 소리를 냈다.

"여기 해파리 있어. 얼른 와서 봐!"

낙화는 자신의 옆을 손가락질 하며 얼른 오라고 성화를 내었다. 그것에 못이긴 진혁이 낙화의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딨는데? 해파리가."

"안 보여? 투명해서 잘 구분이 안 되나? 아니면 어두워서 그런가..."

"그런데도 넌 잘도 봤네. 쏘이기 전에 나가자."

"안 쏘여, 안 쏘여."

그렇게 말하며 낙화는 손가락에 물을 적시고 진혁의 얼굴에 물방울을 튕기며 웃어댔다.

"나중에는 거기도 가보고 싶어. 어디였더라. 발광 플랑크톤이 있다는 바다."

"몰디브? 뭐 그런 데였던 거 같은데."

"이름 들어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보고 싶지 않아? 나중에 휴가 내고 갈래?"

"거기까지 너랑 붙어서 가야겠어, 내가?"

"자꾸 밀어내지 말아줄래? 좋잖아, 진혁씨도. 어?'

"애교 떨지 마라."

"왜, 귀여워 보였어?"

"기어오르는 걸 보니 귀엽긴 하다."

낙화는 뚱한 얼굴을 하고 물을 한웅큼 퍼서 진혁에서 퍼부었다. 진혁은 피하려고 몸을 숙였다. 물 속이라 제대로 피하지 못해서 셔츠가 잔뜩 젖고 말았지만.

"귀엽다고 해줘도 난리. 안 귀엽다고 하면 또 삐질거면서."

"좋아.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진혁씨가 사는 걸로."

"그런 의미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

낙화와 진혁은 물에서 나와서 젖은 발을 말리기 위해 구두를 벗어둔 사구 위에 앉았다. 완전히 어둠에 잡아 먹힌 바다 위로 별빛이 밝게 반짝였다. 낙화는 뒤로 손을 짚고 그것을 올려다 보았다.

"발광 플랑크톤이 있는 바다, 꼭 저럴 것 같지 않아?"

진혁은 그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작은 점들.

"발광 플랑크톤이라는 거 파란색 아니야?"

"색이 문제가 아니지. 어두운 데서 둥실둥실 빛나는 거면 저럴 것 같은데. 안 그래?"

"그럴 것 같기도 하네."

하늘을 오랫동안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어질어질한게 별빛들이 둥실거리며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확실히 그런 바다를 본다면 오늘의 하늘을 떠올릴 것 같았다.

"나 배고파. 이제 피자 먹으러 가자."

"피자? 바다에 왔으면 당연히 해산물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진부한 생각이 우리 사이를 틀어 놓는 거라고."

"나 때문이라 이거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 날은 결국 진혁이 피자를 샀다. 낙화는 파인애플이 안 들었다며 투덜거리는 것치고는 잘만 먹었다.

웃겼다. 마지막에 이런 기억이나 떠올리고 있자니 웃음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낙화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해야 했다.

"버려지는 건 익숙해."

그래도 이건 내가 버린 거잖아. 너를, 내가 버렸잖아.

"그러니까 낙화야,"

네가 나를 원망해도, 미워해도, 진절머리 내고 욕하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고 하더라도.

"괜찮아."

그런데도 나중에, 먼 미래에 네가 다시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다. 배신자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등짝이나 때리고 바닷물에 나를 밀쳐 넣어도 용서할게. 아니, 용서 해줄래?

낙화가 마지막으로 본 진혁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혁은 조직을 배신했고 낙화를 배신했다. 배신자를 처형하는 것은 배신 당한 낙화가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원치 않더라도 낙화의 손에는 총이 쥐어졌고 그는 방아쇠를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를 망쳐놓을 지라도.

모든 책임은 진혁에게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낙화가 지게 될 죄는 진혁이 얹은 것이었으므로 모든 책임은 진혁이 지는 것이 맞았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단 한 발의 총알에 죄를 씻어내며 구원 받는다면 이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진혁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낙화야, 너도 후회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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