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육체와 영혼을 저울에 올리고
"조금 늦을 거라고 하네요. 기다리는 거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주문할 사람은 진작 룸서비스를 불렀을 시간으로, 음식이 오기는 온다는 건 VIP 객실의 특혜일 터였다.
비너스는 안심한 듯 가벼운 몸짓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루모흐가 의자를 뒤로 빼내어 주자 비너스는 잠깐 멈칫하다가, 눈웃음을 지으며 앉았다.
"제 약혼자보다도 다정하신데요?"
비너스는 그 말을 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꺼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과찬이세요, 비너스 님."
루모흐는 비린 조소를 숨겼다. 약혼자를 암살하는 의뢰를 넣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누구나 다정하겠지. 하지만 그 범주에 자신이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비너스 님이야말로 사려 깊으신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 때문에 기다리셨는데도요?"
"그것 또한 기쁜 시간이죠."
비너스는 예의 매혹적인 미소를 띠다. 하지만 동작이 미묘하게 딱딱하다. 루모흐는, 어쩌면 경험으로 알아차린다. 겁을 먹었나 본데. 본의 아니게 약점을 내놓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있죠, 루모흐 씨는 인기가 많으실 것 같은데."
"비너스 님만 할까요?"
루모흐는 비너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반듯한 이마를 따라 오똑하게 떨어지는 코. 도톰한 입술에 난 가벼운 잇자국. 살짝 붉은 눈가. 막 물기를 닦아낸 흠 없는 피부에 붙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몇 가닥마저도 찬란하게 반짝여서...
"이 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신데요."
"어머."
비너스는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장난스레 눈썹을 내리깔았다.
"이 배에서만요?"
루모흐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변화였다.
"더 큰 걸 원하세요?"
"전 언제나 최고가 좋아요."
"실제로도 그러시죠."
고의로 두루뭉술한 답을 내놓았다. 왜냐하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찬사는 연인 사이 주고받을 말이지, 비슷한 두께의 금반지를 몰래 끼고 나온 쪽이 할 소리가 아니니까.
"후후, 기쁘게 들을게요."
그러나 루모흐가 살핀 비너스의 낯빛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저 달콤한 말로 받아들인 건지도 모른다. 애초 비슷한 종류의 사탕발림을 지겹도록 들어본 사람일 테니, 별다른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레드 카펫에 발을 올리는 사람들은 보통 그렇지 않던가.
그리 넘겨짚은 루모흐는 여러 요소를 고려하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게도 다정이 깃든 목소리는 더 이상 건조하다 부르지 못할 음성이었고, 표정이 언뜻언뜻 풀어졌으며, 무엇보다.
'눈빛이...'
비너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껏 저런 눈빛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얼굴선을 따라 내려가다 그대로 머물던 시선을 떠올렸다. 탐욕, 혹은 그 비슷한 죄도 섞이지 않은 눈빛이, 그토록 진득한 점도를 가질 수 있나? 불꽃이 목 안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달콤하다.
비너스는 문득 오래전 들은 말을 떠올린다. 이름이 잘 어울린다던 루모흐의 말. 다시 의미를 묻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세요."
비너스는 그 대신 해야 할 말을 정했다.
"저, 비너스 님."
"네?"
딩동-.
현관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식사 배달이다. 루모흐는 문가와 비너스를 번갈아 보더니, 머쓱한 웃음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세요, 제가 받으러 갈게요."
비너스는 혼란스러워한다. 갑자기? 나를 왜 부르고, 왜 날 보고 그런 얼굴을 해? 아니, 루모흐. 처음에 나 위로해 주러 온 거 알지만, 지금 나 완전 괜찮은데. 불안하게 왜 그래?
불안을 감지한 시점부터 비너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너스는, 뺨을 더듬대며 한 손으로는 손거울을 열었다.
그러지 말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더욱 뜨겁다.
'미쳤지, 비너스.'
누군가의 관심을 받아본 게 처음이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별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나는 왜 이런담. 비너스가 찹찹 뺨을 두드렸다. 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괜히 배우를 지망한 게 아니니까. 마음을 숨기는 건 실패한 것 같지만, 바로 가라앉힐 것이다. 나 좋다는 사람, 잘해 주던 사람, 널리고 널렸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될 거니까. 그러니 괜찮아...
그사이 루모흐는 식탁에 음식을 놓고 있었다. 직원이 맡은 업무였으나, 루모흐가 돌려보낸 탓이다. 비너스는 뒤늦게 이를 발견했다.
"아, 감사해요. 같이 해야 했는데..."
"오늘은 쉬셔도 괜찮아요, 맡겨 두세요."
비너스는 애꿎은 접시들만 다시 돌려 보았다. 타인과 식사하는 건 오랜만이라더니, 세팅에 흠 잡을 구석이 하나도 없을 건 뭐람.
"술보단 물이 낫겠죠?"
액체와 크리스털이 서로 부딪히며 깨끗한 음성을 내고, 마르고 늘씬한 손이 얼핏 잔 위를 스쳐 지나간다.
반지 로켓의 속이 비었다.
***
한편 홀에서는 작은 파티가 열렸다. 벽면을 메운 수여 개의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음악 소리가 갈비뼈를 울렸다. 요란한 조명과 회전하는 미러볼 아래, 캥 인리언의 넓은 이마가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번들거렸다. 왁스로 쓸어넘긴 숱 적은 머리카락은 땀을 흘려 다소 흐트러진 채였는데, 알코올의 여파다. 캥은 입 안을 두드리는 샴페인의 탄산,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탈출하며 내는 진동, 넉넉하지 못하게 남은 위장 공간이 주는 충만함 같은 것들을 즐겼다.
"내일 약혼자님과 공연을 보러 가십니까?"
하나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요사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이름. 캥 인리언이 돌아보자, 알리에르가 눈꼬리를 내려 웃으며 두 손을 맞잡고 있다.
"나의 비너스를 말하는 거군."
캥 인리언이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캥은 주목받는 걸 좋아했다. 체질이 그렇지 않았다면 정계에 발 담글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리언은 당선되는 것을 목표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쓸 수 있었다. 아름다운 배우에게 첫눈에 반해 구애하는, 세기의 순애보 이미지를 덧쓴다든지. 어린 것의 밉살맞고 싹싹하지 못한 성격을 참아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공연이라면 뭘 말하는 거지?"
"아스라이의 뮤지컬 말입니다. 유명한 배우가 아니라 할 수 없지요."
인리언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면 크루즈 표를 받자마자 비너스는 아스라이의 무대 얘기를 하며 좋아했다. 순진하게 따라와서는, 곧 무덤이 될 걸 모르고.
"물론, 나는 예술 활동을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내일은 중요한 분들과 만남이 있거든. 내 사랑하는 약혼자야 크루즈를 즐길 시간이 있겠지만..."
알리에르가 손을 비볐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발이 쉬지 않지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고 말고요."
인리언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많았다. 캥은, 어느 객실에서는 알코올과 함께 진중한 대화를 할 예정이었고, 어느 방에서는 초면과 입을 맞출 것이었고, 어느 순간에는 고용된 암살자에 대해 떠올릴 터였다.
인리언은 역시, 목표를 위해서라면 모든 방법을 쓸 수 있었다. 가장 성대한 마지막 날의 폭죽놀이 때 가장 역겨운 몰골로 죽어 있을, '캥 인리언의 약혼자'. 언론을 장식하며 동정표를 받고, 범인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시늉으로 강한 이미지 역시 챙길 수 있다. 적당하고 똑똑한 일처리다. 후한 자기 평가와 알딸딸한 취기에 들뜬 인리언은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판단을 내린다.
잠깐의 자유는 방관해도 좋겠지.
"내일 비너스는 혼자 공연에 가야 하겠어."
***
비너스는 말을 많이 했다. 루모흐는 비너스의 빈 잔에 물을 부어주며, 천천히 말하게 하려면 잔을 더 자주 채워 주어야겠다고 결론지었다. 나쁜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루모흐에겐 그렇게도 궁금한 게 많은 말 상대를 만날 일이 없었다. 심문관이 유일한 예외일까. 하지만 루모흐는 그 둘이 비교 대상이 아님을 안다.
"이제 슬슬 술 마실 때 되지 않았어요?"
"내일 일정도 생각하셔야죠."
루모흐는 비너스가 손을 뻗지 못하도록 와인병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 비너스는 필요 이상으로 허술했다. 조금 전 마신 물에 뭐가 든 줄 모르고, 술이라니.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 루모흐가 입술을 축였다. 반지 로켓에 넣어온 그 약은 당장 사람을 죽일 성분은 아니다. 그러나 암살자를 고용한 약혼자와 한 객실을 쓰는 쪽이 무슨 술을 마신다는 말인가? 7일이 끝나기도 전 해를 입을 짓을 쉽게도 한다고, 루모흐는 생각한다.
"그럼, 다음에 마셔요! 또 만날 일 있겠죠?"
"그래요, 비너스 님."
루모흐는 선선히 대답했다. 방금 비너스에게 내놓은 답은, 어째서인지,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뤄지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비겁하게도.
비너스는 처음부터도 발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보아 왔던 면모는 가공된 반짝임이었다면, 지금은 태생적인 밝은 성격이 드러난다. 미간을 찡긋하며 카나리아처럼 웃는 얼굴이나, 천연의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에서. 비너스는 루모흐에게 사소하고 재미있는 주제를 질문했다. 사는 곳, 좋아하는 색깔, 반려동물 여부와 취미 같은 것. 그때마다 루모흐는 착실하게 대답했고,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루모흐 씨는 어떤 일 하세요?"
"특정한 직장이 있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있죠."
"아, 중요하죠!"
"최근엔 아는 친구가 맡긴 원고를 봐주고 있어요. 투고를 앞두고 있다고 해서요."
"멋진데요?"
...이렇듯, 전부 거짓말이다.
"루모흐 씨, 제목은 뭐예요? 나중에 읽어볼래요."
"재밌는 내용은 아니에요. "천체의 궤도와 변화의 관측 및 기록"이라는 책인데, 사실 저는 오타를 검수할 뿐이죠."
"그, 난해하네요."
"그렇죠? 언젠가 다른 책도 소개해 드릴게요."
"기대할게요!"
비너스가 연어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나이프가 백설 같은 사기 접시에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루모흐는 지금 자리에서 한 거짓말을 복기했다. 취미는 독서, 4살짜리 흰 고양이를 키우고, 고양이 눈 색을 닮은 녹색이 좋고, 사는 곳은 한적한 근교의 저택.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부유한 사람의 이미지를 덮어쓴다. 루모흐는 이 대화에서 어설픈 연극을 본다. 그러나 비너스는 눈빛을 빛내며 듣는다. 이 사소한 시간도 비너스에게는 즐거운 걸지도. 하기야 약혼자를 잘못 얻은 탓에 멀쩡한 대화가 오갈 일이 적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용한 일은 아니겠다고, 루모흐가 막연히 생각했다.
"루모흐 씨, 내일 뮤지컬 하는 거 알고 계세요?"
비너스가 여상히 물었다.
대화를 시작하는 차원에서 던진 의문문일 뿐, 상대가 아스라이를 모른다는 전제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이런 태도의 상대라면 대략적인 긍정만 한대도 정보를 즉시 꺼내어 준다. 물론, 얕은수를 고려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루모흐는 기억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얼마 전 본 얇은 홍보 책자에 적힌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스라이 배우님의 공연 말씀이죠? 그럼요."
"알고 계셨구나!"
별을 닮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엄청나지 않아요? 아스라이 님이 각본, 연기를 다 맡는 극이에요! 무대에 자주 안 나오는 분인데, 여기 크루즈에서 뵙게 되었으니!"
"더 없을 영광이죠."
얼굴에 띤 미소처럼 정형적인 답이었다. 루모흐는 캥 인리언을 떠올렸다. 비너스와 동석하겠지, 아무렴,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한 뮤지컬'인데. 루모흐가 입가를 닦고, 비너스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질문을 던질 때 침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아, 정말. 아스라이 님이 아니었으면 크루즈에 오르지도 않았을 거예요."
"제게는 기쁜 일이네요."
"어머? 하하!"
비너스가 깔깔 웃었다.
"멘트 괜찮은데요? 역시 인기 많으실 것 같다니까, 루모흐 씨."
"이 배에서 저랑 친한 분은 비너스 님 뿐이에요. 아무한테나 그러지는 않다 보니."
루모흐의 시선이 무심코 비너스의 손가락에 가닿았다. 하얗고, 가늘고,
반지 자국도 남지 않은 빈 왼손 약지.
언제부터? 루모흐는 자신이 본 것이 정확했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약혼식을 치른 이의 손엔 금빛 실반지가 없었고, 루모흐에게는, 있었다. 보석이 박힌 반지 위로 끼운 얇고 얇은 반지가.
루모흐가 물잔을 든다. 순식간에 마음이 진창으로 가라앉았다. 오판이 수치스러운 건 아니었다. 약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받은 반지를 보편적으로 착용하고 다니니까. 짝없는 약혼반지를 가진 인리언에게 연민한 탓은 더욱이 아니었다. 그의 방탕하고 형편없는 생활이 이 상황의 원인일 게 뻔했으니 말이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비너스가, 웬만한 계기 없이 정표를 떼어 놓지는 않았을 테다.
루모흐에겐 제 왼손 약지를 감싼 금속이 지독하게 볼품없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함께 식사하던 순간에마저도 모호하던 감정이 날것으로 밀려 들어왔다. 더러운 마음을 엉성하게 포장해 봤자, 페퍼와 꽃향기는 어지러울 뿐이고 로켓엔 약이 들었었는데...
"있죠, 루모흐 씨."
루모흐가 잔을 내려놓고 표정을 정비한다.
"말씀하세요, 비너스 님."
동요한 감정을 눈치채지 않았길 바라는 수밖에. 루모흐는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랐다. 항상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비너스가, 본인의 빈 손가락에 가닿은 시선 하나 모를 리가 없다. 이에 느낀 감상만은 감지하지 않았기를. 물 한 모금을 넘기는 찰나에 스쳐 간 잡상을.
비너스는 바로 용건을 말하는 대신 두 손으로 고개를 받치고 루모흐를 빤히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눈이 무슨 마음을 품었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 이에게는 당연할지도.
"뮤지컬, 저랑 같이 보러 갈래요?"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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