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육체와 영혼을 저울에 올리고

식사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참이다. 크루즈 직원이 때맞춰 들어와 빈 식기를 치웠다. 깔끔해진 식탁에 디저트가 놓이는 동안 루모흐에게는 답변을 유예할 틈이 주어졌다. 반지 없이 빈 손가락을 본 것을 모른 척할 수 있게 침착한 태도를 취할 틈도. 넉넉한 시간이었다. 둘이 먹을 것 치고는 양이 많은 간식류가 양측의 앞에 가지런히 서빙되었다. 루모흐는 비너스가 메뉴를 고르는 문제로 질문을 하였을 때, 같은 것이면 충분하다고 답한 것을 떠올렸다. 비너스는 태연히 포크로 케이크를 떠 입에 넣었다. 루모흐 역시 과자를 입가로 가져갔다.

"싫어요?"

비너스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당겼다. 깜빡깜빡 눈빛을 반짝이며 내심 일렁이는 불안을 숨겼다. 거절하면 상처일 것 같은데.

혼자서 극을 볼 생각이 없냐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 편할지도 몰랐다. 비너스는 처음, 15살이었을 적 아스라이의 뮤지컬을 관람했던 날을 떠올렸다. 지금은 이름도 희미한, 같은 사립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데이트를 신청했을 때, 그는 비너스와 극장을 방문했다. 비너스는 아직도 무대를 가득 채우던 아스라이를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스라이의 한 줌의 숨조차 낭비하지 않고, 온 심장이 찢어질 듯 강렬하면서도 정제된 감정을 연기해냈다. 데이트로서는 형편없었지만. 비너스는 객석이 전부 빌 때까지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녹화되고 송출될 수 있는 종류의 아름다운 애수는 못 되었다. 극장 밖 파파라치를 의식한 그는 파트너를 울린 사람이 되기 싫어 빌고, 윽박지르고, 회유하고, 투덜거리다가, 상황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다시 약속을 잡지 않았다.

"저는 루모흐 씨랑 공연 보고 싶은데."

하지만 비너스에게 그 무대는 영원한 꿈, 사그라지지 않을 갈망을 심어준 기회였다. 아버지가 지시하던 활동만을 수행하던 비너스가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한 목표였다. 비너스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이 마음을 온전히 이해받을 방법은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알았다. 그래도 상관없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지금 비너스는, 루모흐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들이밀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이해받을 수 있다면, 기꺼울 터였다. 배에서 내린 후 또 한참을 캥 인리언과 그 무리 속에서 살아내야 한대도. 그런 기억만 얻는다면, 데뷔를 허가받을 때까지는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미친 게 아니라는 걸 증명받고 싶어.

루모흐가 망설였고, 비너스는 초조해졌다. 그러니 빨리 답해줘, 빨리. 아버지도 약혼자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기능으로서만 존재하는 건 그만두고 싶어. 입술을 씹고 싶은 욕구를 억누른다.

"저도 그래요, 비너스 님. 하지만 비너스 님의 약혼자 분께서 상심하실까 걱정이 되는군요. 그분은 바쁘신가요?"

비너스는 자신의 얼굴이 절박해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부러 당당한 미소를 띠고 목소리의 텐션을 올렸다.

"그 사람도 밤만 되면 이 방 저 방 들쑤시고 다니는데, 약혼자가 누구랑 공연을 보든 상심할 자격이 있나요?"

루모흐는 다소 과격한 언행에도 동요하지 않았고, 그 대신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하기야, 겨우 세 시간이죠."

"그래요!"

"다르게 말하면 무려 세 시간입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괜찮으시겠어요, 비너스 님? 평판이 문제가 됩니다. 저에게는 별반 가치 없는 것이지만, 비너스 님께는 다를 텐데요. 다른 사람들이 이 일로 비너스 님을 거론해도 상관 없겠어요?"

냉랭하게 들릴 법한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비너스는 루모흐가 말을 하는 내내 깍지를 낀 손에 손등의 힘줄이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 설득을 하려고 꺼내는 근거는 전부 상대에게 해가 될지 모른다는 것뿐.

"신경 안 써요. 정말. 뭘 하든..."

비너스는 상황에 맞지 않게 행복해졌다. 가장 빛나는 금성, 미의 여신이라는 숭앙 속에서도, 나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는데도. 한 명도.

"뭘 하든 종알거릴 사람들 비위를 내가 왜 맞춰야 해요? 어차피 삼 년만 있으면 이혼장을 던질 건데, 그때 떠드나 지금 떠드냐의 차이죠."

비너스가 물잔을 들었다. 진정하기 위해서였다. 심장이 새파랗게 얼어붙는 듯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혼장에 대한 건 항상 하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로 나와, 자신의 귀에 들렸을 때, 의식에 미치는 파급력은 강렬하고 두렵다. 이를 다른 사람이 듣는다는 건 더욱 겁이 났고. 모든 모서리, 모든 벽 틈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마이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비너스는 태연히, 할 수 있는 한 가장 고고한 표정을 그려냈다. 당신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봐. 내가 더 이상 불안하지 않도록. 한 잔의 물을 필요한 것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 삼켜내고, 비로소 루모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집요하고 강렬한, 그래서 아름다운. 금성을 닮은 눈이었다.

"삼 년이요."

반면에 가는 입술에서 새어나가는 음성은 건조하다. 창백하리만치 흰 얼굴에 드러난 감정이 무엇인지 읽어낼 수 없었다. 그간 비너스가 충분히 상대의 마음을 독파하는 걸 해내도록 훈련받았음에도. 비너스가 입 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감흥이 없는 건가? 그럴지도. 그냥 길에 있던 누구에게도 똑같이 친절했을 사람한테 나 혼자 필요 이상 의지한 거면 어쩌지. 캥 인리언과 알던 사이인 것 같은데, 내가 한 말을 전한다면? 녹음되고 있었다면? 각오했어!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더 나빠질 수도 없어. 남에게든 어찌 되든 상관없었을 일을 혼자서 주절거린 것보다 괴로운 일이 있을 리가...

경멸하는 걸지도 모르지. 약혼자를 두고 밖으로 나다닌다고 캥을 흉보는 주제에, 막상 본인은 혼자 있는 방에 식사를 하자 초대한 것도 모자라, 사랑 극을 둘이서 보자고 하니까. 하지만, 하지만. 내가 선택해서 이룬 관계는 없었어. 아버지와 캥 인리언이 결정한 문제라고. 둘의 거래였어. 물건처럼... 약지에는 이제 반지 자국도 남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내 현재는 죄가 되나? 정제되지 않은 생각이 찰나의 시간 동안 급류처럼 흘렀다. 비너스는 손톱을 물어뜯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려 탁자 위에 두 손을 포개어 놓았다. 그러다 비너스는 루모흐의 시선이 얼핏 비너스 자신의 왼손 약지에 가닿은 것을 느꼈다. 물길에 내다 버린 반지가 자리하고 있던 빈 손가락에.

"삼 년."

루모흐가 다시 한번 읊조렸다. 비너스는 부러 왼손을 잘 보이는 위치에 그대로 두었다. 마른 손가락으로 얼굴을 쓸어올리자 수여 개의 반지가 조명에 반짝였다. 루모흐, 당신은 바라지 않는 것을 손가락에 낄 필요가 없겠지. 이미 무언가에 얽매여 있는 내가 꺼려질지도. 하지만 나의 약지도, 당신의 것처럼...

비너스가 루모흐의 손에서 금빛 실반지를 보았다. 비너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경악으로 변모하려던 때. 루모흐는 소리 죽여 웃으며 어깨를 떨었다.

"좋아요. 응원하죠. 응원할게요, 비너스 님."

다시 고개를 든 루모흐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악의가 보이지 않는, 그래서 천진하기까지 한 그 표정은 지극히 낯설었고 어울리지 않았다. 루모흐에게도, 이 상황에도. 비너스가 할 말을 잊고 루모흐를 바라보는데, 루모흐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쳐 입었다.

"어, 어디 가요?"

이런, 목소리가 매끄럽지 못했다. 비너스는 루모흐와 함께 반사적으로 일어난 것을 조금 후회했다. 동요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일 만나 뵈려면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요."

그러나 루모흐는 비너스의 태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루모흐는 이 배에서 상류사회의 표면적인 덕목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였으니. 군더더기 없이 움직이고 어투에서 모난 구석을 갈아내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루모흐는 크루즈의 인원들과 겉으로는 흡사하게 보였으나 파고들 수록 낯선 일면을 드러냈다. 루모흐가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비너스가 주춤하다가도 천천히 루모흐에게 다가갔다. 명목 상 배웅이었는데, 외우고 있던 인사말은 막상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상황. 이미 당장 받아들인 정보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던 탓이다. 루모흐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비너스를 응시하다, 금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사락 귓가를 스치는 손길이 청각을 간지럽혔다. 소스라치게 달콤한 자극이었다. 비너스가 손가락을 움츠렸다. 루모흐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원하시는 대로 될 겁니다. 극장 앞에서 기다리죠."

"...좋아요. 저녁 7시에 만나요."

루모흐는 후련한 표정을 하였다. 묵례 후 문을 닫고 사라지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 보이는 직원이 테이블을 깔끔히 닦고 떠났다. 탁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휑하게 깔끔했다. 공간에 남은 것은 페퍼와 자스민. 코에 익숙해져 잊고 있던 향이 설탕과 크림의 부드러운 향취와 섞여 빈 방을 맴돌았다. 비너스는 머리를 짚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에 가 앉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자신이 루모흐를 부른 것도, 식사 자리를 함께 한 것도. 상대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탓일까, 아니면 겸상하던 중 일어난 수많은 일 때문일까. 아무래도 둘 다인 것 같았다.

털썩 드러눕자 천장이 보였다. 결국 반지 얘기는 못 물어봤잖아. 물어보아서 뭘 했겠냐만. 적어도 다시 확인이라도 할 걸. 아직 낯선 천장을 노려보고 있자니 놓치고 지나간 지점들이 아른아른 생각났다. 허술했다. 그러나 손아귀에 잡힌 이불자락을 움켜쥐면서도, 비너스의 미간은 찌푸려지지 않았다. 심박이 빠를 뿐이다. 술렁이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배워둔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두뇌는 루모흐의 모습을 재연한다.

'...이상해.'

비너스가 뒤척였다. 생생한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늘씬하게 큰 키, 백석 같은 피부. 곧게 뻗은 손가락에 도드라진 손뼈와 그것을 가리려는 듯 고의로 배치한 듯했던 반지. 약지에는...

'그만 생각하라고.'

비너스가 이불에 팍팍 주먹질을 했다. 얼굴이 홧홧했다. 비너스가 습관처럼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루모흐의 손길이 닿았던 쪽이었으나, 거기까지는 의식하지 못하고. 루모흐의 머리칼을 떠올렸다. 부드럽게 곱슬거리던 단발, 그것이 품은 깊은 붉은빛을. 낮지 않은 명도로 타오르는 빨강, 온기나 정열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 색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 쿡 박혀 나오지 않는. 사프란.

비너스는 루모흐의 눈빛에 불안감을 느꼈다. 루모흐는 분명히 적의적이지 않았다. 그 반대였다. 기름빛 눈동자에 유록색 불빛이 튀었다. 수많은 감정이 고요히 들끓고 있었다. 억눌려 있던 마음이 한계치를 넘은 것처럼. 몸을 뒤척였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비너스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적절히 상대하고 활용할 방법을 알았다. 하지만, 루모흐는? 깊이가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고개를 넣은 듯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상황을 제어할 수 있나? 루모흐의 감정을 이용할 수 있겠어? 지금까지 체득한 어떠한 방식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비너스는 루모흐의 것과 같은 마음을 접해본 적이 없다.

비너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지름길을 찾을 수 없는 문제, 도리어 마음이 잔잔해졌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하나지. 내일의 만남을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 약속을 정한 건 절반 정도 충동적인 행위였다. 그만큼 변수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괜찮은 모습을 연출해야 했다. 외적인 면이든, 태도와 대처에 관한 면이든. 그리고 그것만큼은 비너스가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루모흐의 뜻 모를 감정을 풀이하는 것보다는 익숙할 터였다.

비너스는 슬리퍼를 사박이며 걸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습관처럼 한 곡조를 허밍했다. 먼 옛날 아스라이의 무대를 채웠던 음악이었다. 준비는 완벽할 것이었다.

***

순금 밀리그램을 지평선을 겨눠 던졌다.

거기에서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었다. 루모흐는 갑판을 벗어나 객실로 들어가며 문을 단단히 닫았다. 착장한 장신구를 모조리 탁자에 쏟아부었다. 반지 알이 달그락거렸다. 방을 나설 때와 비교해 둘이 줄었다. 각각 식사와 간식을 배달한 직원의 손에 쥐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프랭키 메이와 빌리 헤이우드. 그들에 대해 몇 줄의 설명을 적은 것이 떠올랐다. 맡은 일은 잡음 없이 완수하는 데 비해 사교성과 성실함이 부족한 이들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렇기에 승객들이 식사를 마쳐갈 때 즈음, 즉 직원들의 휴게 시간이 시작되었을 때쯤 추가된 잡무를 떠맡은 거겠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VIP 객실에 찾아오지 않았을 이들. 보석 반지 하나면 팁으로 적절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입단속을 시키기에. 지나온 지금은 세팅되어 있던 보석알의 색깔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어차피 받은 이도 금세 되팔아 치울 물건, 생김새가 어땠 중요할 건 없었다.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루모흐는 두 개의 반지를 집어 들었다. 하나엔 이미 속을 비운 로켓이, 다른 하나엔 아직 내용물이 찰랑이는 펜던트가 있었다. 액체 방울이 들어찬 짙은 붉은색 반지 알에 시선을 두었다. 뱀의 독에 기타 성분을 세밀하게 배합하여 지은 독이었다. 크루즈에서 받은 의뢰에 가장 어울렸다. 비너스 첼 러블리가 가장 추한 죽음을 맞게 하는 것. 한 방울을 복용하면 첫 24시간은 경미한 피로감만을 일으키다, 3일째에는 전신의 살갗이 허물어진다 하여 '탈피'라고 부르는 약제였다. 루모흐는 독을 파는 노인이 멋대로 붙인 명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도취적이라는 이유였다. 다만 그가 만들어낸 해독제의 성능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음독 후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미량을 섭취하였어도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모흐는 비너스의 물잔을 채워줄 적 해독제가 든 반지를 비웠다.

금빛 실반지를 숨겨 착용하고 나간 것과 맥락이 상통했다. 순전한 충동이었다. 스스로 이유를 납득할 수조차 없는 돌발적인 행동이었고. 암살 의뢰를 받은 이상 그것을 이행해야 했다. 명료한 규칙이었고,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도덕성을 배반하는 암흑이었다. 그 속에 던져 놓은 삶은 대체로 잡음 없이 굴러갔다. 아무도 손을 적시고 싶어 하지 않을 하수는 안식처도 되었다. 깨끗한 영혼을 찾는 입장이 이런 구석을 살피지는 않을 테니. 적어도 그 순서는 마지막일 게 마땅했다. 루모흐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주 먼 거리를 쉼 없이 달린 사람들이 그러듯이. 루모흐는 도망자였다. 하지만 지금 루모흐는 잠시 멈춰 볼 생각이었다.

'3년.'

당연하게도, 비너스는 3년 후 이혼장을 적을 수 없었다. 약혼을 기념하는 여행에서 약혼자를 살해하고자 하는 인내심을 가진 이가 캥 인리언이었다. 루모흐 그 자신이 의뢰를 포기한다 하더라도 인리언은 즉각 새로운 암살자를 고용할 게 분명했다. 넉넉한 재물만 있다면 암살자 하나쯤 더 찾는 건 해변에서 모래알을 건지듯 쉬웠다. 남의 목숨과 돈 가방을 바꿀 수 있다면 콧노래를 부를 족속들이 세상에는 질리도록 많았으니까.

비너스 첼 러블리.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캥 인리언을 약혼자라고 여기는 한 나설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비너스가 반지를 빼고 나타나, 먼저 인리언과 연을 끊겠다고 선언한 이상, 약간의 희망은 가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의 비운한 삶을 어떻게든 도와도 좋을 거라는, 그럴 권한을 받았다는 믿음을.

비너스를 잠적시켜주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다. 가방 속의 증거를 모조리 꺼내 보이며, 인리언에게 고용된 일부터 자신의 정체까지 모조리 발설하고.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설명하고 설득한 후에는 새로운 신분을 갖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비너스가 미디어에 등장하는 횟수를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어떻게든 실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비너스를 도망자로 만드는 것밖에 못 되었다. 실체 없는 무언가에 쫓기고 쫓기는 것. 완전히 꺾이지 않은 적에 대해 쉼 없이 상상하는 것. 언제라도 손을 뻗칠 것 같은 감각에 시달리는 것. 루모흐는 비너스의 삶을 그런 지하로 끌어내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잠적하는 생활과 스크린에 그려지는 삶은 아득하게 큰 차이를 가졌다.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아주 긴 시간 숨어 지내야 하겠지. 그리고 불행해할 것이다. 그런 결과는 바라지 않았다.

효능 없는 항목을 하나씩 줄 쳐 지우다 보면 하나의 결론에 닿았다. 달그락, 달칵. 석류색 반지를 탁자에 굴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캥 인리언을 죽여야겠어.'

담담한 결론을 내었다. 일상 속에 흘러가는 잡상처럼 가벼운 무게였다. 루모흐가 도구를 천천히 나열하며 머릿속으로는 계산을 이어갔다. 중요한 순간을 앞둔 이성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걸지도 몰랐다. 혹은 이 일련의 과정이, 뿌리 모를 감정에 시달리느라 앓는 것보다는 더 일상과 가까운 행동이었기 때문일지도.

크루즈를 나가는 건 캥 인리언의 시체다. 후련하고 고요한 마음. 루모흐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준비는 완벽할 것이었다.

***

인리언이 어기적어기적 복도에 발자국을 찍었다. 1층은 간만이었다. VIP 객실이 있는 이곳엔 비너스와 인리언의 이름이 등록된 방이 있었지만, 인리언은 대부분 다른 이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선택했다. 그래도 호실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 자리를 비운 건 아니라, 인리언은 올바른 문을 찾아 카드키를 찍었다.

"와, 왔어요?"

열기 전 두어 번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더니 비너스가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 얼굴색에 반가움이란 통 없고 공손한 구석도 찾아볼 수 없으니. 취기를 물리지 못하였음에도, 남들이 자신에게 조아리는지 아닌지는 특출나게 감지하는 인리언은 비너스가 자신의 등장을 순수하게 기뻐하지 않는단 걸 파악했다. 인리언이 대답 대신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비너스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린 듯이 예쁜 미소를 연출했다.

"아이, 왜 말이 없어요? 저는 당신 기다린다고 이렇게 예쁘게 꾸몄는데."

사뿐사뿐 발걸음에 맞춰 오간자가 요정의 날개처럼 살랑였다. 가는 팔이 목을 끌어안자, 장갑 천이 부드럽게 마찰하며 달콤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피진 못했지만, 비너스는 반듯하게 화장을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던 것 같다. 캥 인리언은 대접받는 기분을 만끽하며 너그러운 마음을 발휘했다.

"그래. 말도 더듬지 말고. 배우가 되겠다면서 침착하지 못해서야 쓰나. 소꿉장난에도 격이 있는 법이야. 당당하게, 당당하게."

비너스가 소리 내 웃었다. 인리언은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알아들었다.

"그래."

뿌연 정신에도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으나, 이내 떨쳐냈다. 캥 인리언은 자신이 충분히 근엄하고 존경받을 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믿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비너스가 애교스럽게 속살거렸다. 속뜻은 '마시던 술이나 마저 퍼마시다 어디 난간에나 걸려 엎어질 것이지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느냐'와 흡사했으나, 비너스는 이를 잘 숨겼고 인리언은 눈치를 못 챘다.

"미래의 내 아내를 보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러고는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다.

"준비해. 배우자 동반 모임이 있어."

"네?"

캥 인리언이 투실한 손가락으로 비너스의 목덜미를 지분댔다.

"관리하는 모습은 좋지만 사사로운 사치로 남편의 시간을 뺏으면 안 되지. 적당히 빨리 준비해서 로비로 나와. 중요한 사람들이 나오니 흠 없이 꾸미고. 그래."

이내 캥은 본인의 손을 제 셔츠 깃으로 옮겨 펄럭펄럭 미풍을 냈다.

"덥군. 방 온도를 관리하지 않고 뭘 했어? 바람을 쐬고 있을 테니 알아서 따라 나와. 기다리게 하지 말고."

그러더니 구두 뒤축을 구겨 가며 방을 떠나 버렸다. 부연 설명 없이 남은 비너스는 황당한 기분으로 현관을 보다가, 불결한 걸 닦아내듯 장갑을 낀 손으로 목덜미를 문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날카롭게 불평하며 외관을 점검했다. 낮에 엘리아나와 일으킨 소란이 있으니, 또 사람들 앞에 서고 싶지 않은데. 그러나 인리언이 용건만 남기고 떠나 버린 이상, 그리고 약혼 계약서에 '대외적으로 사이 좋은 관계를 꾸며낼 것'을 명시받은 이상, 발을 빼는 건 불가능했다.

불길한 예감,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많아 복잡한 심경인데. 벌써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비너스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정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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