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창작 소설

Judas

베른 단편 소설


빛났다가 스러지는 것들에 대해서.

대학의 화실에 불이 난 것이 지금으로 부터 딱 두 달 전이다.

목화와 엽은 같은 화실을 공유하고 있다. 불이 났을 때에도 불이 난 곳에서 이전해온 지금도 같은 화실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래서 목화는 엽의 대부분의 일상을 보고 듣고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엽이 주로 점심에 주로 먹는 샐러드라거나,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물감이라거나, 주로 사용하는 오른손에 아대를 차고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것은 엽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화실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엽의 일거수일투족은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 좋았다. 목화는 학생들이 저마다 무리를 만들어서 쉬는 시간에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태우며 하는 이야기들을 잘 알았다.

엽의 머리카락은 회색이다. 엽은 농담 삼아 목화에게 "너도 머리를 하얗게 탈색하는 게 어때."하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목화는 조용히 고개를 젓거나 엽에게 "너랑 세트로 묶이기는 싫은데." 하는 대답을 했다.

엽이 그런 제안과도 같은 농담을 하는 날은 대체로 그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다. 엽은 사람들이 없으면 화실의 창문을 열고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질겅이며 씹고는 했는데 목화는 그런 그를 보면 함께 옥상에 올라가자고 말하는 대신 옆에 서서 담배 대신 사탕을 꺼내 물었다. 입에 물리는 것은 사탕일 때도 있고 껌일 때도 있고 가끔은 초콜릿일 때도 있었다. 엽에게도 몇 번 권했지만 엽은 매번 그것을 거절했다. 그래서 목화는 더 이상 엽에게 담배 대신 먹을 걸 입에 물리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목화는 대학의 화실에 불을 낸 것이 엽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입에 담배를 물고 그저 짓이기며 씹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불을 붙였다가 기름 범벅인 화실에 불을 낸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목화는 이러한 추측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경찰들이 들이닥쳐 조사를 한답시고 학생들을 하나씩 불러 추궁했을 때에도 "화실에서는 화기 엄금입니다." 하는 식상하고 뻔한 대답이나 돌려 주었다. 경찰들은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 목화를 돌려보냈다. 목화가 뒤돌아 나가는 문틈 사이로 "이상한-" 하는 말이 들렸던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경찰들이 목화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대부분의 화실을 공유하는 학생들은 화실에 불이 난 것에 대해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몇 달을 공들이고 있던 작품이 하루아침에 불타 사라진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절반, 지루한 일상에 화재라는 대형 사건이 터진 것에 대한 흥분감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이 절반이었다. 목화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목화 역시 한 달 조금 넘게 잡고 있던 그림이 있었다. 불이 나기 전까지 어느 날은 손에 무엇이 들리기라도 한 듯 쉽게 그려 나가기도 했고 어느 날은 붓질 한 번 못하고 그림이 뚫어져라 캔버스를 노려보기만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니 목화가 그 그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화재로 소실된 작품은 총 11작품으로 진행 중인 것이 9 작품, 진행이 끝나서 바니쉬를 칠하고 말리고 있던 작품이 두 작품으로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완성한 작품을 자신의 집이나 여타 다른 공간으로 가져간 상태였다는 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들이 각각의 자리를 찾아간 이유다. 화실마다 다르지만 목화와 엽이 공유하는 이 화실에서는 6명의 학생들이 함께 화실을 공유하며 완성된 작품들을 화실 구석에 있는 선반에 임시로 보관해두는 것이 관례처럼, 또는 습관처럼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완성한 작품을 다른 곳에 보관하도록 건의한 것이 엽이었다. 해당 화실을 관리하고 있던 교수에게 무어라 이유를 댄 모양인데 그것까지는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엽이 그 교수의 교수실에 들린 이후에 교수가 화실로 내려와 작품을 옮기라고 공지했으므로 엽의 소행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학생들 중에는 최대 300호짜리 캔버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화실이 아닌 곳에 작품을 옮기는 것은 상당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일단은 본인의 자취방이나 본가나 학교 외부의 화실로 작품을 옮기기는 했으나 화재가 나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화실 공용 작품 보관실을 빌리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목화도 사이즈가 큰 캔버스가 몇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보관실을 대여하는데 서명하기도 했다. 학생들 6명 모두의 서명을 받아서 학교에 제출한 것은 다름 아닌 엽이었다. 엽은 200호 캔버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선동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엽의 말로는 그의 차기 구상작품은 300호보다 더 큰 맞춤제작 캔버스를 사용할 것이라 했으므로 아무도 엽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찰이 다시 대학에 들이닥쳐서 엽을 체포해간 것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 화재가 났을 때 왔던 경찰 두 명이 새로 배정 받은 화실에 들어와 엽에게 수갑을 채우고 미란다 원칙을 줄줄 읊을 때까지 아무도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 몰랐다. 딱 한 명, 목화만 제외하고.

목화는 엽을 고발했다. 단순한 의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전의 시간들과 또 엽에 대해서, 그리고 엽과 목화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말할 필요가 있다.

가장 처음 목화가 엽을 의심했던 이유는 화실에서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씹는 엽의 습관 때문이었다. 목화는 자신의 그러한 의심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가 기름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연 발화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화실에서는 화기 엄금."을 내세우고 다니는 것은 오히려 엽이었다. 엽은 평소에도 화실에 들어오기 전에 캐비닛에 가방과 함께 라이터와 담배를 넣어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엽은 원리원칙주의자적인 면이 있었고 그런 면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 덕에 인망이 있었다. 목화는 그런 엽을 조금은 부러워하고 조금은 신기하게 여겼다. 엽과는 달리 목화는 사람들과 좁고 깊게 사귀는 버릇이 있었다. 화실의 학생들과 대체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엽밖에 없었다. 그리고 엽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를 꼽으라면 하나 같이 목화를 지목할 정도로 둘의 사이는 좋았다.

엽은 목화를 잘 챙겼고 목화는 엽의 곁을 묵묵하게 지켰다. 물론 목화는 대학생이나 되어서, 군대까지 다녀와서,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혹은 챙김 받는 입장인 것을 그리 떳떳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엽의 살가운 면을 달갑게 받아들이기는 했다.

무엇보다도 목화는 엽을 선망하고 있었다. 선망과 동경 그 지점 어느 곳에 있는 감정이 언제나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목화도 잘 알고 있었다. 목화는 그런 선망과 동경에 큰 자격지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엽을 동경하는 사람은 목화 말고도 많았으니까. 엽은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유화 그림을 그렸고 몇 번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순수 미술계에서 엽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드물었다. 엽에게는 흔히 붙는 수식어로 '이단아', '영재', 또는 '천재'가 따라다녔다. 엽의 그림 세계는 그의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성격과 다른 궤를 그리고 있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엽의 작품을 두고 다정하다고 평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것은 원중혁 화백 겸 평론가가 한 말이었다.

"백엽의 그림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목화는 그 말에 동의했다. 많은 그림들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거나 그림이 만드는 세계 속에 들어간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엽의 그림은 그것과도 결이 달랐다. 엽의 그림은 단순하게 말하면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그림은 흑과 백의 논리를 따를 때가 많고 흑백 논리에 의하면 다른 한 쪽은 배제되기 쉽다. 그러나 엽의 그림은 정치적이되 흑백 논리를 따르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는 말이지만 목화는 엽의 그림이 '모두를 위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넘어서 엽의 그림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치유한다. 원중혁 화백이 덧붙인 말이 또 한 가지 있다.

"그림이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소유이거나 어느 공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공간에서 배제되는 사람, 혹은 그 공간에 들어설 수 없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그림으로 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배제라고 부른다. 그림을 보러 갤러리나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정해져 있다. 예술을 향유할 수 없는 사람들은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를 예술로부터 제외시키고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엽의 그림은 미술관에 적합한 그림이 아니다."

그렇다면 엽의 그림은 어디에 적합한가? 원중혁 화백의 말은 거기에서 끝이 났지만 목화의 의문은 그 지점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그림은, 공간으로부터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세상에 그런 그림이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물리적으로나 사념 적으로나 어느 한 곳에 정박하여 존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화는 원중혁 화백의 말에 동의했다. 엽의 그림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다정하게 품어준다는 사실에.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고 엽을 만난 것은 목화에게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목화는 엽의 그림을 중학교 때 처음 접했고 그것을 계기로 미술을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입시 미술 자체는 그리 늦지 않았다. 목화는 미술에 재능이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보다 먼저 붓을 잡은 학생들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목화는 학생 시절 내내 그림에 목을 맸지만 타고난 머리 덕분에 학교 성적도 어느 정도 무난하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 엽을 만났다. 엽의 입학은 인터넷 기사에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10살 무렵부터 전시회를 열고 세계적인 비엔날레에 출품을 하며 명성을 떨친 굴지의 천재가 대학에 진학한 것은 이야깃거리가 되기 좋았을 것이다.

대학 내에서 엽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교수들은 엽을 편애했고 때로는 엽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학생들 또한 엽을 좋아하고 선망했다. 사람들은 엽을 사랑했다.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하지만 그만큼 옆에서 지켜보기에 엽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사랑받는 만큼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쨌거나 엽의 지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놈들이 천지였다. 그러니 엽이 자신의 그림을 다른 곳에 보관하기를 바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엽의 그림에 해코지를 하려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CCTV가 있기 때문에 대놓고 작품을 훼손하는 짓은 하지 못했지만 실수인 척, 물을 뿌리거나 물감을 튀기거나 하는 짓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엽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렇다고 엽은 개인실을 쓰겠다거나 학교 화실이 아닌 외부 화실을 이용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어디까지나 여기 학생이야. 다르지 않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뿐이지."

엽이 말했다. 목화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 않은 채 담배를 씹는 엽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 나도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지?"

"글쎄. 네 그림 하나 값이 우리 화실의 그림 전체를 모은 것보다 비쌀 거라는데는 동의하는데."

목화의 말에 엽이 즐거운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엽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습관적으로 담뱃재를 터는 듯이 담배를 톡톡 쳤다. 태우지 않은 담배에서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난 내 그림이 비싸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동시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어야 해."

"이미 둘 다 불가능하지 않아?"

"맞아."

엽은 헛된 꿈을 꾸는 어린 아이처럼 말했다. 목화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았다.

"중요한 건 그림이 아니야. 그걸 보는 사람들이지."

엽은 때때로 뜻 모를 말을 목화에게만 비밀을 말하듯 말하곤 했다. 목화는 그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엽은 목화에게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도 말을 입 안에 가두지 않는 세상에서 그저 듣기만을 바라는 존재가 목화였기 때문에.

목화의 세상에서 엽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들어차 있었다면 엽의 세상에서 목화란 존재는 다른 세상으로 튼 길 같은 것이었다. 시답잖은 장난들, 사사로운 말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 엽은 목화의 세계에 그런 것들을 던져 두었다. 엽에게 목화는 휴식을 주는 존재였으므로 둘 사이가 각별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목화는 따지자면 자신이 살리에리이고 엽이 모차르트 같은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목화는 엽에게 그렇게까지 큰 질투는 느끼지 않았다. 자신과 너무나 다른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에 비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화재가 나기 2주 전.

점심 시간이었고 여느 때와 같이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화실이 위치한 곳에서 멀지 않은 학생 식당을 이용하러 가거나 과실, 또는 휴게실에서 식사를 하러 나갔다. 엽과 목화는 주로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었다. 목화는 도시락 보다는 그날 아침 편의점에서 사 온 음식으로 때울 때가 많았다. 두 사람은 대체로 옥상이나 또는 옥상으로 가는 계단 층계참, 혹은 날이 좋은 날에는 미술대학 앞의 잔디 밭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학기 초에는 종종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다가오는 학생들이 있지만 엽은 늘 그것을 거절하고 목화와 함께 식사를 했다. 학생 식당을 이용해야 하는 때에는 더러 함께 나가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날은 한 학기에 한 두 번 밖에 없었으므로 학기 초가 지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더는 엽과 목화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 날 목화는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사왔다. 엽은 평소와 같이 샐러드를 먹었다. 엽은 채식주의자였다. 그것도 아주 완강한 채식주의자. 그렇다고 엽이 목화에게도 채식주의를 강요하는 일은 없었다. 엽은 묵묵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지만 남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목화는 엽과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육류가 덜 들어간 음식을 골랐다. 편의점에서 사오는 음식들이 그렇다시피 육류가 들어 있지 않기는 어려웠지만.

날씨가 좋았다. 목화는 그날 에그 샌드위치를 사왔고 엽은 콩고기가 완자가 들어간 샐러드를 가지고 미술 대학 앞의 잔디 밭으로 나갔다.

엽은 육류가 들어간 음식을 보고 '맛있겠다'고 말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 날따라 엽은 목화의 샌드위치를 보고 "맛있겠네." 하고 말했다. 목화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엽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왜?"

"방금 맛있겠네, 그런 거야?"

"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

"아니... 그건 아니고."

"맛있게 먹어."

목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이의 모양대로 샌드위치가 둥글게 잘려 나갔다. 엽은 그 옆에서 도시락 통을 열어서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먹었다.

한참동안 아삭거리는 소리와 멀리서 학생들이 조잘대는 소리만 아득하니 들려왔다. 목화는 그 순간을 평화롭게 여겼다.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엽이 말했다.

"엄청 평화로운 점심이야."

"그래?"

목화는 저도 모르게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한 것인가 싶어 샌드위치를 삼키고 되물었다.

"다들 사이 좋아 보이고 아무런 사건도 없고. 그런데 그 속에서는 다들 어딘가 하나 쯤은 곪아서 썩어가고 있고. 재밌지 않아?"

목화는 엽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 건 아닌가 곰곰이 생각했다.

"또 누가 캔버스에 물감 뿌렸어?"

아닌게 아니라 며칠 전에도 엽이 진행 중인 그림에 검은색 물감이 흩뿌려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마치 사람의 적의를 한데 뭉친 것처럼 시커먼 색이었다. CCTV를 확인해보자고 난리가 났지만 범인은 온통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던 터라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미대에 다니다 보면 대부분 작업복은 검은 옷을 입기 때문에 따지자면 누구나 용의자가 될 수 있었다. 엽은 한두 번도 아니고 괜찮다고 일을 무마했다. 그 검은 물감을 지워내고 다시 덧그리는 작업을 하느라 엽의 그림은 더딘 속도로 진행 중이었다.

"아니. 오늘은 멀쩡한데. 그보다 같이 있었으면서 그런 걸 물어봐?"

엽이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목화는 머쓱하게 뒷목을 주무르려다 손가락 끝에 묻은 샌드위치의 부스러기만 털어냈다.

"혹시 뭐 다른 일이 있나 해서. 아니면 말고."

목화가 덤덤하게 말하자 엽이 샐러드를 금세 다 먹고 통을 풀밭에 내려 놓았다.

"지금 작업을 대충 마무리 지으면 새로운 걸 할 거야. 이번에 진짜 큰 걸로."

"큰 거? 얼마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랄 정도?"

엽이 씩 미소를 지었다.

"너는 잘 알잖아. 어떤 그림은 이름값 하나로 붓칠 하나에도 유명세를 타는데 어떤 그림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펼쳐도 몰라주는 때가 있잖아. 그러니까, 나는 그런 그림에도 이름을 붙여주려고."

엽의 말에 목화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림이라면 네 그림은 아니겠네."

"내 건 틀려먹었지."

"틀려먹었다는 말의 정의를 알기는 해?"

목화의 빈정거림에 엽이 하하, 하는 인위적인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엽은 가끔 그런 반응을 할 때가 있었다. 무언가를 묵과할 때의 버릇이었다. 그러나 목화는 엽이 무엇을 묵인하고 묵과하였는 지는 알지 못했다. 그 순간에는 그랬다.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네가 애들 그림에 붓칠 한 번씩 해주려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설마."

엽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건 모두를 상처 입힐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야."

엽은 목화가 원중혁 화백이 한 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종종 그의 말을 부정하곤 했다. 목화를 싫어하거나 또는 원중혁 화백을 싫어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엽에게 있어서 그 말이 사실로 통하지 않기 때문이리라고 목화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에 사건의 전말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화재가 난 당일의 CCTV를 돌려보면 불은 CCTV의 사각지대에서 시작되어 타오른다. 아무도 없는 시각, 아무도 없는 화실에서 난 불은 그 화실의 모든 그림을 소사시키고 건물을 몽땅 불태우기 전에 도착한 소방차에 의해 진압되었다. 다행히 그 화실 밖으로 불이 새어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날 엽의 그림과 함께 타올라 사라진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기사에 실리지 않았다. 엽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첨언도 하지 않았지만 실망한 기색이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고 목화는 떠올렸다.

엽은 다른 학생들의 그림이 불타서 사라졌으니 자신의 것도 더는 존재하지 않고, 이 이상 말 꺼낼 의미가 없다고 의사를 표방하며 불타서 사라진 그 그림에 대해 일언반구도 덧붙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엽의 기세에 눌려 기자들의 인터뷰에도 "기억나지 않는다" 또는 "표현할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목화도 기자에게 잡힌 적이 있지만 말을 꺼내지 않았다.

놀라운 점은 엽의 그림이 실제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화는 엽의 소사된 그림을 떠올리려고 해보았지만 어렴풋한 형상이 아른거리다가도 사라지고 흐릿한 색채가 떠오르려다가도 흐려졌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엽의 그림에 흩뿌려져 있던 검은색 물감 뿐이었다. 인간의 적의를 담은, 누군가에게 상처 입힐 의도가 가득한 자국.

그러므로 목화가 엽을 고발한 것은 결코 엽을 싫어하거나 엽에게 적의, 혹은 질투, 시기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목화는 엽을 선망했고 엽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런 그림을 불태운 엽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엽을 고발한 것이다.

명확한 증거가 있어서 경찰서에 간 것은 아니었고 단지 그런 심증을 가지고 경찰서에 찾아가 일전 화재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관에게 엽이 했던 말을 증언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들었지만 수사에 참고하겠다는 말을 하고 목화를 돌려보냈다.

그 날 밤 목화는 잠을 자지 못했다. 잠이 들면 꿈속에서 엽의 그림이 보이려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런 꿈을 화재 이후 몇 번이고 꾸었다. 간신히 눈을 감으면 CCTV의 사각지대에서 검은색 옷과 검은색 모자를 쓴 엽이 기름이 가득한 그 화실에서 담배를 뻐끔거리며 피우다가 바닥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유유히 사라지는 이미지를 보았다. 목화는 그 이미지에 상처 받았다.

이후 경찰이 발표한 증거는 엽의 집에서 발견된 유서 한 장이었다.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영구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죄다. 그러므로 나는 이름 없이 죽어가는 그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나는 그 그림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 이 유서를 발견한다면 나는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 운이 나쁘다면, 아마 아직 살아서 이 유서를 다시 읽을 것이고 불태울 것이다. 모든 그림은 누군가를 배제한다.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림은 없고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림도 없으니까. 사람이 누군가를 자신의 영역에서 제외시키듯이 사람이 만든 것 역시 그렇게 한다. 나는 이때까지 누군가를 상처 입혀왔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 입었듯이. 그러니 우리가 만든 이 상처라는 것은 빛난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곳에서 빛났다가 스러지는 것들에게 나는 나의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그러므로 목화는 자신을 배신자라고 칭한다. 엽은 이름 없이 빛났다가 스러지는 것들을 짊어지고 이름을 불태웠고 목화는 그런 그를 위해 모든 사실을 명백하게 알리기로 했으니까. 배신은 사랑했기에 가능한 것이므로.

Judas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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