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 오펜

OC2

Sorcerous Stabber Orphen - Ohphen/Crio * 약속의 땅에서 전후

회유기록 by 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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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자체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끝났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는 마술사니까. 작은 말 한 마디로 보통 사람들은 하지 못할 일을 해낼 수 있는 흑마술사. 모든 일을 마술로 해결하지는 않는다지만 마술사라면 몇 명 몫 정도의 일은 혼자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 거기다, 심지어 그는- 그리 좋은 꼴은 못 보고 있긴 하지만 이 원대륙에 있어 최강 최악이라 불리는 마왕이다.

항간에서는 이름보다는 마왕으로 더 많이 불리었고 지금은 스베덴보리 마술학교 교장으로 더 많이 불리는 남자, 오펜은 가볍게 이마를 훔쳤다. 땀이 구슬지게 흘러내리진 않았지만, 소싯적과 달리 드러난 이마에는 아무 것도 대고 있지 않아서 손등에 축축함이 묻어났다. 손바닥에도 땀이 차있다. 저 너머 산에 들어선 나무 사이로 여기까지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작업 종료를 외치듯 그를 스쳐지나갔다.

 “좋아, 이정도면 되겠지.”

그는 어깨를 풀면서 자신이 갓 완성한 작품을 바라보았다. 무난하게 다듬어진 나무 구유는 마감작업만이 남아 있었다. 나무는 마술로 잘라 옮기고, 대강의 모양새를 만든 이후에는 직접 다듬었다. 작업을 위해 옷차림 역시 평소의 마술학교 로브가 아니라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였다. 어찌 되었든 딸들의 싸움에 희생되어 마술에 스친 나머지 수복할 조각도 남기지 않은 채 불타버린 구유는 이것으로 회생했고, 말들은 새로운 밥그릇을 얻었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로군, 나만 빼고. 오펜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간단하게 시동어를 읊었다. 나무로 된 구유는 원래 그렇다는 듯이 가볍게 떠올랐다. 그는 땀이 찬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마굿간으로 향했다.

  

산길을 올라가면 나무 울타리조차 치지 않은 그의 집 끝 언저리가 있다. 외길 끝에는 핀란디, 라고 간단하게 쓰여 있는 표시용 바위가 있고, 목재 표식도 별 다를 게 없다. 마굿간은 길에서부터 봤을 때 가장 앞쪽에 있고, 더 들어가면 헛간 밑 그가 작업하는 공터가,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 그들 가족이 사는 집이 있다. 마굿간에 구유를 내려놓자 우둑거리는 등허리를 두들기며 구겨진 얼굴로 다시 길을 되돌아 집으로 향하자, 마침 집을 나오고 있는 그의 아내와 마주쳤다. 레키와 함께였다. 바구니를 들고 있는 그녀에게 오펜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어머, 일찍 왔네. 어서 와.”

“음, 뭐,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한 손은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그는 설렁설렁하게 대답했다. 예전처럼 건들거리던 모습은 이 십 수년간 다망한 일과 중임을 거치면서 많이 죽었지만, 이런 모습엔 여전히 그 때 모습이 묻어나는 것도 같았다. 아내 되는 사람으로서 그 모습을 쭉 봐온 크리오는 작은 바구니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러면 좀 더 이것저것 시켜먹어도 될 것 같네.”

“힘들어 죽을 것 같구마안. 배고파 쓰러질 것 같아.”

대답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금방 죽상을 하고 어깨를 내리는 남편에게 크리오는 흐응, 하고 콧바람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당신도 나이는 나이니까.”

“뭐냐, 그건…. 아직 젊은 놈들보다는 한참 멀쩡하다고.”

자극받자 안 그래도 더러운 눈매가 더 확 치켜 올라갔다. 입을 비죽 내민 채 투덜거리는 그 표정만큼은 옛날과 똑같은 게,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크리오는 그런 남편을 무시하며 바구니를 덮은 보온용 덮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이렇게 일찍 올 줄 알았으면 따로 도시락으로 싸지 말 걸 그랬네.”

“도시락? 어디 나가던 게 아니었나?”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아이들이랑 나는 먼저 먹었거든. 대신 도시락이라도 가져다줄까 했지.”

가까이 다가와서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는 오펜에게 그녀가 덮개를 젖혀 안을 보여주었다. 따뜻함이 오래 가도록 천을 깐 바구니 안에는 먹음직스럽게 고개와 야채를 끼운 두툼한 샌드위치 두어 개와 한입 크기의 빵이 세 개쯤 같이 들어 있었다. 구석에 눕혀놓은 병은 스프나 마실 차겠지. 그 전에도 출출하긴 했으나 직접 눈앞에 음식을 두자 한창 노동을 끝낸 직후의 몸에 식욕이 돌았다. 오펜은 두세 단 밖에 안 되는 짧은 계단에 걸터앉고는,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는 부인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맛있어 보이는데? 여기서 먹자고.”

“오-펜. 집에 테이블이 있는데 바닥에서 먹으려고?”

“상관없잖아? 어차피 도시락인데, 여기가 더 먹는 맛이 나겠지.”

크리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결코 소리 내지 않는 칠흑의 개는 그녀를 흘끗 올려다보더니 오펜과의 사이에 그녀가 앉을 만한 공간을 두고는 화단에 몸을 눕혔다.

“어머, 레키도?”

결국 그녀도 바구니를 끌어안은 채 그의 옆에 앉게 되었다. 어깨에 걸친 모직 숄을 정리하면서 크리오가 툴툴거렸다.

“오늘은 모처럼 맞은 휴일에 일했으니까 넘어가주는 거야.”

바구니의 덮개를 풀면서 “아이들이 이런 걸 닮으면 안 되는데-.” 하고 덧붙이기까지 했지만 표정을 살피자 그리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는다. 이정도면 아직 안전선 안이지. 오펜은 못 들은 척 하며 그녀가 안은 바구니에서 둥그런 샌드위치를 꺼내들었다.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야채와 고기, 빵이 섞여 만족스러운 맛을 냈다.

“맛있어?”

“음.”

맛있다는 말까지는 음식을 우물거리느라 생략한다. 온화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는 아내를 보면서 오펜은 입에 든 음식을 씹어 삼켰다. 레키는 음식을 먹지 않고, 그녀는 아이들과 이미 먹었다고 했으니 바구니에 있는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뺏길 걱정 없이 느긋하게 샌드위치를 씹다가, 문득 자주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그의 전 제자를 떠올렸다.

“그 녀석을 시켜먹을 걸 그랬나… 아니, 얼마 전에도 굴렸으니 됐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중얼거린다. 시켜먹는 거야 편하지만, 목공 일은 취미인 만큼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이 대륙에서 떠안은 문제들로 거의 휴일 없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탓에 휴일 시간을 써먹는 것이 아깝게 느껴졌을 뿐. 옆에서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크리오가 눈을 껌벅였다.

“매지크 말이야? 얼마 전에 랫츠와 있었던 그 일?”

“음. 월급 올려달라고 하길래 사무처에서 승인해주면 올려주겠다고 했지.”

“그거, 그냥 안 된다는 말이잖아?”

“바로 그거다.”

대답은 빵을 베어 무는 것만큼이나 단호했다. 나도 월급이 안 오르는데. 하고 보태자 아내에게서 웃음기 섞인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랜만에 보내는 느긋한 휴일이었다. 아내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고, 싸 준 샌드위치도 맛있다. 요 근래 자신도 책잡힐 만한 일은 하지 않았으므로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아마. 안락한 휴일에 떨어질 수 있는 몇몇 불상사를 점검한 오펜은 점심 식사를 손에 쥔 채 편안한 마음으로 부인과의 잡담을 이어 나갔다.

 

거실에 나왔을 때는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없었다. 딱히 어머니에게 용무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까지 있던 어머니가 보이지 않자 랫츠베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과 거실을 살폈다. 안방까지 슬쩍 살펴보고는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도시락을 싼다고 하셨던가?

엣지와의 말다툼에서-지금도 그녀는 엣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확 질러버린 마술로 구유를 날려버린 것은 그녀였으므로, 아침에 엣지와 함께 아버지 일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아버지에게 즉답으로 거절당했다. 덤터기를 써버린 아버지에게 미안해서 어제 저녁에도 어깨를 주물러드리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모자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랫츠베인은 으~음, 하고 미간을 구겼다.

“어쩌지~ 아까 어머니가 도시락 싸시는 거라도 도와드릴 걸 그랬나봐.”

그렇게 툴툴거리며 다시 거실로 향하자, 이번에는 현관에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했다. 동생 엣지였다. 문을 약간 연 채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엣지, 뭐해~?”

“쉿,”

평소 그녀의 텐션대로 크게 묻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부른 동생이 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슬쩍 보인 표정이 기분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또 덜컥 솟아오르는 걱정에 랫츠베인은 작은 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동생에게 다가갔다.

“뭐야 뭐야, 나도 볼래. 누가 오기라도 했어-?”

동생이 연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려 달라붙자, 엣지가 바로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랫츠베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을 조금 더 열어 밖을 내다보자 익숙한 뒷모습이 세 개, 줄지어 앉아있었다. 사람의 형태가 아닌 한 쪽이 소리도 없이 고개를 들어 그녀들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두 분은 딸들의 존재를 못 알아챈 것인지 뒤돌아 앉은 채 그대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혹은 알아채고도 신경 쓰지 않고 있거나. 호기심을 채운 것과 달리 기대치에 배반당한 그녀가 김이 빠진 캔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 어머니랑 아버지잖아. 왜 저기 앉아 계셔?”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말하는 동생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랫츠베인의 짐작으로는 아버지에게 마술을 더 배우고 싶은데, 모처럼의 휴일을 즐기고 계신 것에 초칠 수가 없어서 초조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여간 엣지도 참. 랫츠베인은 악어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에게 혼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나~”

“…흥.”

동생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집 안으로 돌아섰다. 레키는 들어오고 싶으면 어디로든 들어올 수 있다. 뒤에서 언니가 문은 제대로 닫지 않으며언~ 하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들렸지만 깨끗하게 무시하며 엣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뒤에서 철딱서니 없는 언니의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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