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어두운 기억이라 할지라도

주제 : 추억

* 단금전력봇(@ 60Dnkb)님께서 올려주신 주제입니다.문제가 발생하면 게시물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드리스, 이건 뭐야?”

먼지가 수북이 쌓인 선반에서 눅눅한 종이상자들을 하나둘 빼내던 앨빈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가? 이상한 거라도 찾았니?”

잔뜩 일어난 먼지들을 손으로 쫓던 이드리스가 콜록거리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괜찮으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을 받고 나서야, 앨빈은 제 발치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유독 오래되어 보이는 상자는 밀봉된 다른 것들과는 달리 윗면이 살짝 열려있었고, 그 틈으로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드리스가 머리를 살짝 기울이고는 자리에 꿇어앉아 상자를 완전히 열어젖혔다. 

“와, 이게 여기 있었네?”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내용물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주뱃 모양의 인형이 이드리스의 손에 힘없이 들려 올라왔다. 관리를 하지 않아 천은 본래의 색을 잃었고, 군데군데 찢어진 부분에서는 뭉텅이로 솜이 튀어나와있어 인형의 인상은 꽤 꾀죄죄했다. 

“웬 인형이야? 네가 이런 걸 가지고 다니는 건 예전에도 지금도 본 적 없는데. 너네 집에서도 본 적 없었고.”

 그러면서 앨빈은 곁눈질로 상자 안에 쌓인 다른 것들을 바라보았다. 새비퍼, 아보크, 마디네, 카스쿤 등등 여러 가지 포켓몬들의 형상을 한 인형들은 주뱃보다 심하면 더 심했지, 결코 더 나은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드리스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일일이 손에 들어보고 품에 안아보며 말했다.

“지금은 그렇지. 옛날에 내가 쓰던 것들이야. 여행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내 일에 바빠서 버렸겠구나 했었는데, 아직 가지고 있었네? 진짜 오래된 건데.”

“그래 보인다. 진작에 발견했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아깝네.”

앨빈이 그녀의 품에서 인형 하나를 빼내었다. 끄트머리가 일어나고 표면이 반질거리는 택에 새겨진 상표는 언젠가 광고에서 본 적이 있는 회사의 이름이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나 굿즈를 만드는 회사였지, 아마.

인형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앨빈은 얼마 안 가서 그것을 다시 본래 자리에 넣어두고 다른 상자를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아직도 정리할 게 한가득인데 이런 것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근데 신기하긴 하다. 이렇게 오래된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작게 기합 소리를 내며 제 몸의 반 정도 되는 높이로 쌓은 상자들을 가뿐하게 들어 올린 앨빈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인형 상자를 정리하던 이드리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얘가 뭐라니. 다 커서도 인형 모으는 사람은 많아. 어릴 적 장난감을 안 버리고 계속 간직하거나 물려주는 경우도 많고. 애착 인형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니?”

“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보다는 밖에서 뛰어놀던 경험이 더 많아서 그럴 만한 물건이 없거든. 내 주변엔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나이대의 어린애도 없고. 그래서 그런가 보지.”

‘거기에 상태도 상태고.’,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은 앨빈이었다. 저걸 누군가한테 물려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과연 없을 테니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는 이드리스는 인형 상자를 들어 구석에 놓고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신기할 건 없지. 자기가 경험이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 신기하게 보는 거 안 좋은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라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해 본 말이지.”

복도에 상자들을 내려놓자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들이 공기 중으로 날아올랐다. 안 그래도 눈 따가워 죽겠는데 조심 좀 할 수 없냐는 이드리스의 잔소리가 날아오자, 앨빈이 머쓱하게 웃으며 휘휘 손을 내저었다.

가볍게 혀를 찬 이드리스가 다시 선반 위의 물건들을 빈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아직 남은 병과 빈 병들이 부딪치며 상자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미리 창고 정리 좀 해 둘걸 그랬어. 마침, 네가 연구소에 놀러 와서 천만다행이었지 뭐야.”

잡동사니들이 실린 수레 위에 상자를 내려놓은 이드리스가 손을 털더니 부지런히 창고에서 남은 짐들을 빼내고 있는 앨빈을 향해 말했다. 근 한 시간째 노동에 시달리던 앨빈이 방금 꺼낸 상자 더미 위에 팔을 올리고 기대어 서서 기가 찬 웃음소리를 뱉었다.

“내가 무슨 필요할 때마다 불러 쓰는 일꾼이야? 일주일 내내 사무실이랑 현장 끌려다니다 금쪽같은 휴일에 시간 내서 얼굴 보러 왔더니만, 당연하다는 듯이 끌고 와서 일 시키는 건 무슨 경우야. 너무하잖아. 아르겐 씨나 너네 애들한테 도와달라고 해도 됐었잖아. 독개굴이랑 염뉴트 이런 거 잘하던데.”

“우리 귀한 애들 먼지 구덩이에서 구르는 꼴은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못 봐. 그리고, 뭐, 어때. 이제 좀 있으면 끝나는데. 좀만 더 힘내 주시죠, 인간 포켓몬 씨. 그 좋은 체력 뒀다 어디 쓰니? 내가 음료수 쏠 테니까 입 다물고 움직여.” 

“진짜 너무하시네. 악덕 사장이 따로 없어, 아주?”

“알다시피 내가 좀 독하잖니? 바다같이 마음 넓은 네가 참으렴.”

“말이나 못 하면.”

통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붙는 아쉬움에 앨빈이 입맛을 다셨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말대로 그 많던 물건들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어서 끝내고 휴식이라는 달콤한 보상이나 받자며 애써 불만을 걷어낸 앨빈이 목장갑을 끌어당겼다.


“그럼 수고해 주세요.”

이드리스의 말에 남자가 모자를 살짝 들었다 내리는 시늉을 하며 운전석에 올랐다. 폐기물들을 한가득 실은 트럭은 잠시 덜컹거리는 소음을 내더니 이내 매연을 뿜으며 내리막을 따라 도시로 향했다. 트럭의 뒷모습과 배경으로 걸린 석양을 바라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정오에 시작했던 창고 정리는 저녁이 다 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 덕에 드디어 앨빈도 반강제로 동원되었던 중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상한 신음을 늘어놓으며 기지개를 켠 앨빈이 이리저리 목을 꺾으며 중얼거렸다.

“내일 몸살 날지도 몰라.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앓다가 형이 뭐라고 하면 다 이드리스 너 때문인 줄 알아.” 

그러자 이드리스가 허,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있는 힘껏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엄살 작작 피우시지? 네가 이 정도로 까딱이나 하겠냐고. 아오, 손이야. 아르겐은 말랑한 부분이라도 있는데 넌 어떻게 된 게 몸에 순 근육밖에 없니? 빨리 들어오기나 해.”

이드리스는 연신 투덜대며 손을 휘저었다. 조금은 고소한 기분에 미소를 한껏 머금은 앨빈이 그녀를 따라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노동의 대가를 받는 때는 언제나 짜릿했다. 그게 월급이든, 물건이든, 음식이든, 감사의 말이든. 자신이 느끼기에 합당하기만 하다면, 달콤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적어도 앨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현관을 지나갈 때 그는 아예 콧노래까지 흥얼대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커피면 돼?”

“나 원두커피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리고 몇 시간이나 부려 먹었으면서 진짜 음료수로 퉁 치게? 신인 관장님 너무 인색하시네. 좀 더 써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이드리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작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냥 주는 대로 곱게 마셔라. 거기서 기다려.”

앨빈의 이마를 검지로 꾹 눌러주고서 이드리스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애초부터 불만 따위 없었던 앨빈은 그녀가 등을 보이자마자 소파에 앉아 잠자코 보상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건 좀이 쑤셨는지, 근 한 달 만에 들어와 본 연구소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앨빈의 시야에 익숙한 것이 잡혔다.

조금 전, 창고에서 본 인형 상자가 연구소 책상 옆 구석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앨빈이 몸만 살짝 주방 쪽으로 기울여 외쳤다.

“이드리스, 저거 왜 안 버렸어? 이젠 안 쓴다며.”

“안 쓴다기보다는, 쓸 일 없지. 근데 그냥 두려고.”

마침, 주방에서 나오던 이드리스가 인형 상자를 곁눈질하더니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그에게 음료수가 담긴 유리잔을 건네었다. 하지만 그런 대답만으론 의문이 풀리지 않았던 앨빈이 테이블에 도넛을 내려놓던 이드리스에게 되물었다.

“저렇게 낡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말했잖아.‘옛날에 쓰던 거’라니까. 그래서 그래.”

순간 앨빈의 행동이 멎었다. 골루그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앨빈을 바라보던 이드리스가 피식 소리를 내고는 일인용 소파에 걸터앉았다.

“왜? 그야 좋지 않은 추억이지만, 어쨌든 우리 애들이랑 보낸 시간이 서려 있는 물건인걸.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아니,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됐어.”

“싱겁긴.”

자신이 꺼낸 화제로 거북해진 앨빈이 말을 얼버무리며 잔을 들이켰다. 너무 급하게 마신 탓에, 다시 뱉어낼 기세로 기침이 터져버려서, 반대로 이드리스는 시원하게 웃어젖혔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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