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다처제 왕국의 공주는 아버지를 선

일처다부제 왕국의 공주-2

첫 날

웹소설 by 도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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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분위기가 무서워서 자는 척을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주 푹 잠들어버렸던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나자 마주한 것은 바닥부터 벽까지 폭신폭신한 넓은 방. 쌓기놀이 장난감과 나무 목마부터 그림책과 필기도구까지, 방은 제 주인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키메라처럼 통일성 없는 아동 용품들로 가득했다.

"열 살이라니. 내가 키가 작긴 하지만."

어제 들었던 편지의 내용을 생각하자 또다시 한숨이 나온다. 홍역을 크게 앓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온 이후로 도저히 길어지지 않는 팔다리가 나는 항상 원망스러웠다.

사실 나는 열 살이 아니다. 나는 무려 열두 살이나 먹었다. 자그마치 분수의 덧셈까지 할 줄 아는, 사실상 어른이라고 봐도 무방한 나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제부터 열 살. 정치도 모르고 분수의 덧셈법도 모르는 꼬맹이일 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서웠지, 그 아저씨들..."

무릇 많은 아이들은 자신이 숨겨진 왕가의 공주라는 망상을 즐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또래에 비해 머리가 상당히 굵었고, 눈치가 좋았으며, 어제 저녁 마주한 어른들의 눈 속에 흠뻑 담긴 욕심을 읽을 줄도 알았다.

고향의 짚더미보다 따뜻한 침대나 까끌거리지 않는 비단옷이야 물론 기쁘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생존 본능이 강한 나는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눈치챘다.

이 궁전, 천장은 화려하지만 바닥은 살얼음판보다 얇다는 사실을.

"괜찮아. 나는 열 살이다, 아직 열 살이다. 싸움은 어른들끼리만 하면 되는 거야."

나는 머릿속으로 보통 열 살 짜리가 어떻게 행동하던가 고민했다. 혀 짧은 소리 낼 나이는 아니겠지. 그런 걸 억지로 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테니까.

침대에서 폴짝 내려와 책상으로 다가갔다. 새 것처럼 보이는 필기구가 잔뜩. 가장 멋들어지게 생긴 금속제 필기구를 집고 싶었지만 쓰는 법이 복잡했기에, 일단 색색의 밀랍조각을 집고 어제 본 세 명의 이름을 적어내렸다.

[광대.

- 엄청 요란한 아저씨.

- 이상함.

천둥.

- 엄청 시끄러운 아저씨.

- 친절한 것 같음.

- 좀 멍청한 것 같음.

큰왕.

- 엄청 커다란 아저씨.

- 화가 많아 보임.]

딱히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조금이나마 아는 것을 적어 내리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나는. 앞으로 여기에 뭔가 더 적어나가다 보면 평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그때,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잡념을 방해했다.

"아침밥입니다."

문 반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들어와" 하고 말했는데, 사람 목소리라기 보다는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 같다고 느껴졌다.

드르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아침 햇살이 눈으로 곧장 쏟아져 들어왔다.

"들어갑니다!"

빛덩어리의 정체는 어제 '광대왕'이라고 불렸던 남자, 아니, 남자가 차고 있는 장신구였다.

그는 마흔 개는 될 장신구들을 온 몸에 달랑거리고 있었는데, 특히 양팔은 다양한 황금 팔찌로 그득그득 덮여있어 대체 어떻게 팔 관절을 굽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빛나는 남자는 활짝 웃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시종 몇 명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뻘뻘거리며 뒤따라왔는데, 아마 그들이 원래 식사를 옮기는 담당이었을 것이다.

"좋은 아침, 공주님!"

광대왕은 활기찬 태도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너무나 밝은 표정에 불안감이 순간 옅어졌고, 나도 소심하지만 정중하게 "안녕하세요."라고 답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기이한 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의 귀였다.

남자의 양쪽 귀는 가로로 길게 찢어져 있어, 마치 작은 귀 네 개가 달린 듯이 보였다. 깨끗한 절단면을 따라 귀걸이가 다닥다닥 달려있다.

"예쁘지?"

내 시선을 느끼고 남자가 웃었다.

"내가 자른 거야. 이렇게 하면 귀걸이를 남들보다 두 배는 더 걸 수 있지."

"...원래 아침 식사는 이런 식으로 하나요?"

"아니! 그치만 어제 처음 왔는데 혼자 밥 먹는 건 외롭잖아. 아, 말 놔도 돼? 너도 놓고."

그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달그락달그락 수저를 내밀기 시작했다.

"나는 꽤 젊거든. 그 커다란 아저씨랑은 다르게... 물론 네 아버지라고 해도 이상할 나이는 아니긴 하지만, 뭐."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남자는 말을 놓았다. 재잘거리는 입이 쉴 줄을 몰랐다.

"해안가 마을에서 자랐다고 그랬지? 짜게 먹는 편? 아, 간의 기준이 다르려나. 일단 그쪽 음식 느낌으로 준비해봤는데."

광대왕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잔뜩 재잘거리며 아침 식사가 든 작은 그릇들을 내려놓았다. 녹그릇을 든 손가락에는 하얀 명주천이 질끈 묶여있었다.

"아."

그는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급히 숨기며 머쓱하게 웃음을 지었는데, 붕대의 끝에 희미하게 붉은 얼룩이 비쳐 보였다. 방금 전에 손 끝을 베인 듯 했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요리는 잘 안 해봐서."

소반에 올라온 것은 다진 생선살을 뭉쳐서 국물에 넣고 끓인 것. 익숙한 요리다. 다만 원래 알던 요리에 비하면 국물이 적고 완자의 크기가 상당히 제멋대로다.

본인이 만든 걸까?

"밥 다 먹으면 뭐 해?"

"글쎄요..."

"오늘은 건물 안내와 주변부 소개를 받을 예정입니다."

뒤에서 잠자코, 그러나 부담스럽게 서있던 나이든 여자 시종이 말했다. 왕에게 말하는 것 치고는 다소 강한 어조였다.

"잘 됐네. 내가 맡지."

"예정이 있습니다."

"나는 어차피 성 싸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하는 일도 없잖아?"

광대왕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웃음을 터뜨렸고, 시종은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나도 좀 불편한데. 분명 깔고 앉은 침대보는 구름처럼 푹신푹신한데, 마치 가시 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별로 맛 없네, 이거.'

나는 반박도 지지도 하지 못한 채 싱거운 완자 조림을 묵묵히 긁어 먹을 뿐이었다. 별로 맛은 없었지만, 남이 애써 만들어준 음식이란 썩 기분 좋은 것이었기에.

***

안내는 생각보다 지루했고 기대보다 즐거웠다.

저택이라고 해봤자 이 곳의 건축이란 자고로 별 게 없다. 광활한 사막 위에 놓여진 성은 그 크기만으로 자아내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 뿐이랄까, 외피는 결국 지루한 상아색 덩어리일 뿐이었다.

광대왕의 재치 있는 안내만이 솜씨 좋게 흥미를 돋구었는데, 이 남자 대신 그 나이 든 시종들과 산책해야 했다면 얼마나 지루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저기는 창고. 근데 네가 쓸 일은 아마 없을 거야."

"저 탑은 아주 높네요."

"큰 왕이 쓰는 곳이니까. 어제 봤지? 키가 되게 크잖아, 그 사람은."

암만 그래도 저 정도로 크지는 않았을텐데. 그러나 농담을 하는 말투는 아니었기에 입 밖으로 딴죽을 내뱉지는 않았다.

"아저씨가 쓰는 건물은- 아니, 음, 그쪽이..."

"광대라고 불러."

남자는 덧니를 보이며 히죽 웃었다.

"지금 시점에서 누구만 아빠라고 부르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아빠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본명으로 부르는 것도 좀 그러니까... 뭐, 난 괜찮은데, 큰 왕이 절대 안된다더라."

"왜 광대인지 물어봐도 돼요?"

"글쎄, 왜일까?"

"큰 왕이랑 천둥왕은 알겠는데..."

"천둥왕은 알겠어? 왜 천둥일 것 같은데?"

"목소리가..."

광대는 문장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젖혔다. 아까까지 봐왔던 예쁜 미소가 아니라 콧잔등이 잔뜩 찡그려지고 얼굴이 빨개지는 웃음이었다.

"아니, 하하하! 아니야,"

재미있는 비밀을 말하는 아이처럼, 그가 무릎을 살짝 굽히고 속삭였다.

"걔는 말이지, 귀 줘봐, 사실-"

그 때, 스쳐 지나가던 복도의 옆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누구냐!"

"아! 씨..."

깜짝이야. 저거 미닫이 아니였나? 예상치 못하게 앞으로 벌컥 열리는 문에 깜짝 놀라버렸다.

다시 한 번 살펴본 문은 분명 미닫이가 맞았다. 거세게 열리는 바람에 문짝이 틀에서 빠져나와 앞으로 고꾸라졌을 뿐.

문 뒤에는 목소리가 엄청 크던 남자, 천둥왕이 칼을 빼들고 돌진할 듯이 서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뭐야, 너였나... 너야말로 뭐지? 여긴 내 방 앞이다."

"...건물 소개."

천둥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그제서야 나를 내려다 보았다. 으음, 으음, 소리를 내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뭘 말하면 좋은 건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야. 아이야, 천둥 아저씨한테 안녕히 계세요~ 하자."

"주방 쪽은 나중에 가도록. 주방장이 너를 후려치고 싶어서 안달이던데."

"하하, 날 후려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

광대왕은 남자를 밀치고 제 갈 길을 가려 발을 서둘렀지만,

"적당히 맛있고 적당히 못생긴 식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며?"

천둥은 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일방적인 대화를 계속 해나갔다.

"-아이, 내 방은 어디냐고 했지? 거기 가볼까? 구경시켜줄게!"

"요리사에게도 자긍심이라는 게 있다. 식사를 '초보자가 열심히 만든 것 같은 순준'으로 만들라니, 화가 날 만도 하지!"

"다리 아프지 않아? 내가 업어줄게. 영차!"

대답을 할 새도 없이 나는 덥썩 들어올려졌다. 업힌다기보다는 개가 강아지를 옮기는 자세인데, 이거.

천둥같은 목소리는 뒤에서 계속 울렸다.

"그 손가락은 또 뭐지! 거기 묻은 건 피인가? 피가 아직까지 변색되지 않고 잉크처럼 새빨갛다니 뭔가 이상하다! 너 또 어디서 이상한 병이라도 걸려 온 건-"

"저 아저씨는 천둥왕! 여기는 천둥궁! 비 안 오는 날에는 볼 거 없음! 이상! 다음 곳으로 가자!"

"복도에서 뛰지 마라! 애가!! 보고 배우잖아!!!"

그는 끝까지 떽떽 소리를 지르며 의사를 찾아가라고 쫓아왔지만, 떨쳐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천둥왕은 복도에서 차마 뛰지 못하고 경보로만 추격해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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