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가 지키는 섬 (2)
집에 돌아온 실감이 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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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정도가 지나자, 어느덧 도착 지점 근처에 왔음을 알리는 경적이 울렸다. 선내를 뒤흔드는 소리와 진동에 일행들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페이는 하마터면 굴러떨어질 뻔했으나 앨빈이 얼른 잡아낸 덕에 바닥에 엎어지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와아…, 귀가 먹먹해. 이 소리는 대체 어떻게 적응하는 거야?”
이드리스가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가 떼기를 반복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 앞의 아르겐은 차분히 앉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있었으나 보아하니 아직 잠기운도, 놀란 기운도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과 달리, 앨빈은 아직 비몽사몽한 페이의 옷매무새를 만져주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단기간에 한 세 번 정도 왕복하면 적응되던데. 잠도 쭈욱 잘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해져.”
“나도 배는 많이 타 봤는데, 그냥 네가 특이한 것 같아.”
“진짠데. 이걸 안 믿어주네.”
이드리스가 눈을 흘기자, 앨빈은 익숙하다는 듯 하하 웃어넘겼다. 그동안 루카리오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천장에 달린 선반에서 앨빈과 페이의 가방을 꺼내며 내릴 준비를 했다. 이드리스와 아르겐도 잠기운을 떨치고 일어나 각자의 캐리어를 챙겼다.
서서히 배의 속도가 느려지더니 곧 작은 부두에 닿았다. 문이 열리고, 햇빛이 쏟아지자, 페이가 표정을 찡그리며 손날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조금 걷는 동안 눈이 빛에 적응되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섬에 무사히 입항한 것을 축하하는 표지판이었다.
[등대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표지판이라고 하기도 조촐한 나무판 위에 쓰여있는 글자를 웅얼댄 페이의 옆에 일행들이 줄지어 섰다.
“이 표지만 저번에 치운다고 하지 않았어? 그대로 있네. 주변도 예전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고.”
“그러게요. 처음 왔던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꼭 어제 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드리스와 아르겐이 한 마디씩 꺼내며 조용한 바닷가를 쭉 둘러보았다. 처음 왔을 때 보았던 것과 지금의 풍경은 사진을 찍어놓은 것 마냥 그대로였다. 사람 없는 하얀 백사장은 여전히 갈모매의 끼룩거리는 울음소리와 시원한 파도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오는 게 다였고, 심지어 표지판은 칠이 벗겨진 자국마저 그때 그대로라 정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어른들이 추억에 젖고 있을 무렵, 페이가 앨빈의 바짓단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이가 편히 볼 수 있도록 시멘트로 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춘 앨빈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뭐 궁금한 거 있어?”
“아, 그게…, 섬 이름이 왜 등대섬인가 궁금해서요…. 특이한 이름이다 싶어서….”
“아하하, 그치. 특이한 이름이긴 해. 이드리스랑 아르겐 씨랑 오션도 처음 왔을 때 다들 물어봤었어. 왜 하필 등대냐고.”
사실 그렇게 특이한 이름도 아니다. 강철섬만 봐도 참 적당하게 지은 특이한 이름이었으니까. 그러나 등대섬은 그닥 유명한 섬도 아니거니와, 만월섬이나 신월섬 같은 멋진 이름을 가진 섬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느낄거라고, 앨빈은 생각했다. 페이를 안아 든 앨빈이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여전히 바닷가를 둘러보던 이드리스와 아르겐도 앨빈을 따라가던 루카리오의 부름에 서둘러 따라붙었다. 저 멀리 마을로 올라가는 아스팔트 도로를 걸으며 앨빈이 아까 페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했다.
“여기가 신오지방에서 처음으로 등대가 세워진 곳이라서 그렇대. 예전에 신오지방이 히스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오랫동안 무인도였던 이 섬에 사람들이 이주했대. 근데 이 근처 물살이 장난이 아니거든. 거기에, 그 시절엔 멀리까지 밝게 비추는 전등이 없었으니까, 날이 어두워지거나 날씨가 안 좋았을 땐 사고도 잦았고 사람도 꽤 죽었었대.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적었던 본도와의 왕래가 서서히 잦아들어서 거의 고립되다시피 했었는데, 기술이 발전하고 나서 다른 지방에서 건너온 기술자들이 이 섬의 사연을 듣고 등대를 설치해 줬다는 설이 있어. 이거 말고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지.”
“뭔데요?”
“이 섬의 첫 이주자가 여기에 마을을 만들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 이름을 등대(等待)라고 지었다나? ‘등대하다’라는, 미리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뜻의 단어가 있거든. 거기서 따왔다는 얘기도 있다고 하더라고. 뭐가 진짜인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페이가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 아이에게는 별거 아닌 설화도 꼭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듣는 것 같았는지 청회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페이가 들뜬 목소리로 앨빈의 품에 기대었던 몸을 살짝 일으키며 물었다.
“그럼, 그때 지어진 등대는 아직 있어요?”
“물론이지. 우리 섬 랜드마큰데. 이젠 다 잊혀가는 이야기에 나오는 등대지만, 보수는 확실히 해서 아직도 쌩쌩 잘 돌아가. 저어기 꼭대기 보이지?”
앨빈이 손을 쭉 뻗어 울창한 활엽수 숲 너머를 가리켰다. 일행이 아직 저지대에 있었으며, 숲이 워낙 울창해 전체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저 멀리 풍성한 잎사귀 덩어리들 위로 작은 첨탑 같은 것이 삐쭉, 하고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본 페이는 더욱 흥분해서 앨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그럼…, 가 볼 수도 있겠네요?”
마치 은하수처럼 눈동자에 수놓아진 기대의 빛이 앨빈을 향했다. 창백한 얼굴에 드물게 핏기가 도는 것이, 지금 당장 가고 싶어 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앨빈은 괜히 ‘음~’, 하면서 뜸을 들였다. 그럴수록 페이는 기대감과 초조함에 심장이 마구 달음박질쳐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만 같아 급기야 숨까지 작게 헐떡이기 시작했다.
이러다 정말 숨이 넘어갈 것 같다고 느꼈을 때쯤,
“오늘은 안 되겠는걸?”
“네에?!”
앨빈의 상큼한 미소와 목소리가 페이의 가슴을 순식간에 차갑게 식혔다. 냉각제는 바로 실망이라는 것으로, 기대가 펄펄 끓으면 끓어오를수록, 더욱 강하게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아주 효과 좋은 녀석이었다.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린 페이를 보며 쾌활하게 웃던 앨빈의 뒤에서 한 데 섞여 출처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등을 친 주먹의 주인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앨빈이 뒤를 돌아보자, 이드리스가 내질렀던 팔을 다시 제 쪽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한껏 눈썹 사이를 찡그리고서 다그쳤다.
“네가 철부지 꼬맹이야? 너보다 10살 넘게 어린애 놀리고 재밌어하게. 제대로 설명 안 해?”
“아이, 그치만 귀엽잖아. 그리고 마침 설명하려던 참이었단 말이야.”
“그럼 그냥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하라고! 왜 쓸데없이 애 실망시키고 난리니?”
가녀리지만 묵직한 주먹이 한 번 더 굳건한 앨빈의 등줄기를 후려쳤다. 몸 한 번 흔들리지도 않았던 주제에 앓는 소리를 내며 앨빈은 이드리스에게서 몇 발짝 떨어졌다. 이대로면 실랑이가 길어질 거라는 걸 짐작한 아르겐이 중재에 나섰다.
“이건 케니스 군이 나빴어요. 그치만 페이 군, 저도 케니스 군 말에는 찬성이에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여기까지 몇 시간이나 배를 타고 왔잖아요?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케니스 군 집에서 쉰 다음, 내일이나 그 다음 날에 가는 게 어떨까 싶어요.”
페이와 눈을 맞추며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아르겐을 루카리오가 거들었다.
“그래, 페이. 모처럼 놀러 왔는데 아프면 큰일이잖아. 그럼 너희 어머니도 걱정하실 테고, 너도 남은 시간 동안 누워만 있어야 할지도 몰라. 못해도 일주일은 여기 있을 테니까 오늘은 쉬도록 하자.”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과 포켓몬이 침착하고 상냥한 어조로 타이르자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페이는 결국 꼬리를 내렸다.
“네에….”
힘이 쭉 빠진 대답이 아이의 속내를 온전히 다 내보였다. 그런 페이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드리스가 눈길을 돌려 앨빈을 쏘아보았다. 앨빈은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돌리고서 가볍게 무시할 뿐이었지만.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 이드리스는 더 힘을 빼는 대신에, 앨빈의 옆을 바짝 따라 걸으며 페이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데 온 힘을 쏟기로 했다.
경사로 끝에 도착하자 앨빈이 쭉 품에 안고 있던 페이를 땅에 내려주었다. 알 케이스를 바로 든 페이는 앨빈의 옆에 꼭 붙어 일행과 함께 한산한 대로를 걸었다. 지나다니는 차도, 행인도 없는 조용한 촌락 마을의 모습이 낯선지, 페이는 앨빈의 바짓단을 붙잡고서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이드리스도 페이와 같은 것이 신경 쓰였는지 두어 번 고개를 휘적이다 입을 열었다.
“거리가 너무 조용하지 않아?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아직 낮인데 어르신들도 포켓몬도, 애들도 안 보이고…. 무슨 일이 있나?”
앨빈과 저 사이에 페이를 두고 걷던 루카리오가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이 계절이 되면 정오에 가까운 시간에는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자칫하면 온열질환의 위험이 있으니 가급적 일을 피하라는 권고가 있어 한산한 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한산한 건 아마 오늘 행사가 있어서 그럴 겁니다.”
“아~ 오늘이 그날인가? 마을 장터 날.”
“장터?”
이드리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묻자, 앨빈이 설명을 덧붙였다.
“전보다 사람이나 인프라가 늘어났다지만, 기본적으로 섬이다 보니 아무래도 심심하잖아. 그래서 계절마다, 시기마다 마을회관에서 행사를 열어. 이때쯤이면 장터가 열리지. 장터라고 해봤자 제대로 된 건 아니고 바자회 정도라서 이웃들끼리 얼굴 보면서 편하게 즐기는, 이른바 소소한 마을 잔치지.”
“행사 날이 되면 어른들이 수확한 과일이나 나무 열매를 잔뜩 들고 오셔서 간식거리를 만들어주시죠. 잘 못 만나던 아이들도 실컷 놀 수 있어서 이런 날이면 섬 전체가 회관을 제외하고 한산해집니다.”
“그런 행사도 있군요? 신기하네요.”
아르겐이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이런 쪽의 경험이 없다보니 전에도 앨빈이 고향에서 있던 일들을 들려줬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럼, 우리도 그쪽으로 가는 게 좋을까? 너네 부모님도 거기 계실 거 아니야.”
이드리스가 합리적인 추론을 내놓았다. 앨빈과 루카리오도 무언으로 긍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섬이라고 해도 사람 꽤 많다? 등대섬 전체에서 모였다고 생각해 봐. 애들, 어른, 포켓몬 할 것 없이 바글바글…. 우리 엄마랑 아빠 찾겠다고 거기 가는 건 좋은 생각이라고는 못 하겠다. 인사도 못 하고 인파에 떠밀려버릴걸. 그리고….”
말을 끊고, 걸음을 멈춘 앨빈이 뒤따라오던 일행을 돌아보았다.
“우리 섬사람들 성격 알잖아? 외지인, 특히 내가 데리고 온 사람들이면 몰려와서 이것저것 해주려고 하는 거.”
“…하긴.”
정신없었던 광경을 회상하며 두 남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엄청났었죠. 전 제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요.”
이드리스도 아르겐의 말에 동의했다. 이 섬에 처음 왔을 때, 오션을 포함한 두 사람은 이 섬에 대해서 하나같이 ‘인심이 좋다면 너무 좋아서 문제인 곳’이라는 평가를 내렸었다. 이 섬에서 앨빈의 가족은 남녀노소, 그리고 종에 상관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돌 같은 존재였기에, 그들의 손님이었던 그들은 까딱 방심했다간 삼 일을 통째로 끌려다녀도 모자랄 정도로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웬만한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터였다. 개인 시간도 없이 어딜 가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이것 좀 먹어봐라.’, ‘안내해 줄테니 같이 가자.’, 하면서 별의별 이유로 사람을 붙잡고 끌고 다니는 게, 감사는 해도 결코 유쾌하기만 한 경험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설명을 마무리하고 일행이 다시 움직이려던 때였다. 잠자코 있었던 페이가 앨빈의 바짓단을 꼭 잡았다. 앨빈이 내려다보아도 손을 놓지 않은 채, 아이는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짐작한 앨빈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친구들을 빨리 만나고 싶은 거지? 네 마음은 잘 알겠어. 그런데 지금 장터에 가면 친구들을 사귀기도 전에 어지러워져서 뭘 하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할 거야. 거기에다가, 이제 슬슬 끝날 시간이기도 하거든. 일단 아저씨랑 약속했던 일은 내일부터 하기로 하자.”
“…내일부터면 너무 늦지 않을까요?”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내일도 약속이 미뤄질까 걱정돼?”
페이가 알 케이스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을 어찌 헤아리지 못할까. 쭉 병원에서만 갇혀 지내던 아이. 또래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는 채로. 포켓몬도 한 마리 곁에 없는 채로. 그렇게 외롭게 살았으니, 조바심이 날 만 하지. 거기에, 당시 페이의 몸 상태를 짐작해보건데, 병원에 있을 적에는 남에게는 사소한 일이라도 큰일이 되어 약속이 깨지는 일도 파다했을 거다.
그래서 앨빈은 더욱 자신 있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경험을 깨주고 싶었다. 어떤 종류의 좌절은 여러 번 경험했더라도 한 번의 성취로 회복되는 경우가 있다. 앨빈은 이것 또한 그런 종류라고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여겼다. 투박하고 거친 새끼손가락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페이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앨빈은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저씨가 언제 페이한테 한 약속 어기는 거 봤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아저씨가 잘 아는 애들부터 천천히 소개해 줄게. 꼭!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나면 같이 트레이너 스쿨로 가자. 가서 신나게 놀고 친구도 많이 사귀는 거야. 등대도 보러 가고. 아저씨 말 믿고 기다려 줄 수 있지?”
“네…!”
앨빈과 비교하면 반의반도 안 되는 짧은 새끼손가락이 앨빈의 손가락에 걸렸다. 이드리스와 아르겐은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걸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애 보는 실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사실 경찰보다는 보육교사가 적성에 맞았던 게 아닐까요?”
“정신연령이 비슷해서 저럴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라, 그것도 그렇네?”
“저기요, 다 들립니다만?”
굳이 숨기지 않은 속닥거림에 앨빈이 눈치를 주자 셋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가까이 붙었던 상체를 슬쩍 떨어뜨렸다.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일어난 앨빈이 다시 안내를 이어가려고 하던 때였다.
“컹-!”
커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형체가 순식간에 일행의 앞을 덮쳤다. 가장 앞에 있던 앨빈이 피해자가 되었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이 옆에서 튀어나온 습격자에 의해 뒤로 나동그라져 바닥에 처박혔다. 앨빈과 가까이 있던 페이는 루카리오가 얼른 감싸안고 뒤로 물러난 덕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이드리스와 아르겐도 당황한 나머지 잡고 있던 캐리어 손잡이를 놓고 튀어 나가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큭, 흐히…, 아하하하!!! 할아버지! 그만! 으하학!!!”
루카리오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그만 넋을 놓고 굳어버렸다.
거대한 바랜드가 앨빈을 완전히 깔아 눕힌 채, 얼굴이며 머리, 목 할 것 없이 커다란 혀를 쉴 새 없이 놀려 침 범벅으로 만들고 있었다. 축축하고 미지근한 공격에 치명타를 입었는지 앨빈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크게 웃어젖히기만 했다. 팔을 들어 저항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작은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매서운 공격에 신장 190cm의 건장한 성인 남자는 시합 시작도 하기 전에 시합 불가능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 아저씨? 괜찮으신 거예요…?”
“하하하! 으응? 괜찮아, 괜찮…, 좀, 할아버지! 나 말 좀 할게요! 으하학, 그만!! 간지러워!!!”
말을 이어가려는 앨빈의 노력은 바랜드의 애정 어린 핥기에 번번이 저지되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드러누워 거대한 털 뭉치에 깔린 앨빈의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할아버지?”
그 난리 가운데서도,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중얼거림은 무심코 툭, 튀어나왔다. 기민한 청력으로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은 바랜드가 고개를 들어 아이와 눈을 맞췄다. 풍성한 털에 파묻힌 검은 눈과 마주치자 흠칫하는 페이를, 날쌘 포켓몬은 놓치지 않았다.
“컹!!”
한번 우렁차게 짖은 바랜드가, 상당한 노령이라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페이를 향해 도약했다. 아르겐과 이드리스가 깜짝 놀라 막아보려 했지만 인간의 몸으로는 포켓몬의 민첩함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커다란 몸에 깔려 앨빈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3초 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페이는 루카리오에게 더욱 파고들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쿠당! 타격음과 함께 흙먼지가 주변으로 퍼졌다. 페이는 몸을 더 웅크려 알을 보호하려 힘썼다. 아예 루카리오를 밀치고서 바닥에 드러누울 기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도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픈 곳도 없었다. 설마 기절이라도 한 걸까?
페이가 천천히 눈을 뜨니, 흥분한 바랜드를 막아선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페이를 끌어안고 있던 루카리오가 어느새 바랜드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60kg에 육박하는 대형 포켓몬의 활강을 가뿐히 흘려 저지한 루카리오는 이내 정중하게 몸을 낮추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님. 아무리 반가우셔도 앨빈 말고는 덮치시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았나요? 자칫하면 아이가 크게 다칠 뻔…,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할아버님께는 마냥 어리게 보일지 몰라도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루카리오가 바랜드와 대화를 나눌 동안, 겨우 자리에 앉은 앨빈에게 아르겐이 다가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항상 올 때마다 이러시니 원.”
그것을 받아든 앨빈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르겐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고는 두 포켓몬과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상황을 살피는 페이에게 시선을 향했다.
“나이도 상당하신데 여전히 기운이 넘치시네요. 마지막으로 뵈었던 때랑 달라진 게 없으셔요.”
“그러게. 어떻게 하면 저런 게 가능한 걸까. 그걸 두 발 딱 붙이고 막아내는 너네 형도 형이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네 포켓몬들은 정말 대단하다니까.”
이드리스의 감탄에 웃음으로 답한 앨빈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훔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리에 모터가 달린 듯 붕붕 흔들며 헥헥거리는 바랜드와 상반되게 쩔쩔매는 루카리오를, 멍한 시선을 하고서 지켜보고 있는 페이에게 다가간 앨빈이 살며시 작은 어깨를 감쌌다. 화들짝 놀란 페이가 고개를 들자, 앨빈이 부드럽게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페이는 마구 날뛰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많이 놀랐지? 우리 할아버지야. 랜디 할아버지. 우리 아빠 포켓몬이고, 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 쭈욱 나한테는 할아버지셨지. 우리 형한테도 그랬고.”
“아, 네….”
앨빈의 설명에도 페이는 얼떨떨하게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앨빈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실감이 잘 안 나지? 포켓몬이랑 가족처럼 지내는 경우는 많아도 이런 호칭까지 붙이는 경우는 드무니까. 우리 집이 좀 독특해. 내가 형을 단순히 파트너로만 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집에 있는 포켓몬들은 나한테 있어서, 그리고 우리 가족한테 있어서 한 마리도 빠짐없이 소중한 가족이거든.”
마침, 루카리오와의 대화가 마무리되었는지, 바랜드가 천천히 둘에게로 다가갔다. 제 트레이너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앨빈이 소중히 품고 있는 아이를 자세히 보고 싶었던 것인지, 커다란 포켓몬은 지긋이 페이를 응시했다. 여전히 꼬리를 바쁘게 휘저었으나 아까와는 달리 달려들 생각은 없는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페이는 일단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만남도 그렇고, 지금까지 자신이 마주했던 이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관계에 혼란스러웠다. 인사를 먼저 건네야 할지, 그게 아니면 아까 그 일로 다치지 않았다고 확인을 먼저 시켜줘야 할지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작은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이 정도 혼란은 이미 예상했던 앨빈이 페이의 뒤에 쪼그려 앉더니, 제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겨 페이와 뺨을 붙이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여기는 페이야. 잘생겼지? 이번에 우리랑 같이 놀러 왔어. 아직 이것저것 모르는 게 많으니까 여기 있을 동안 잘 돌봐줘야 해. 우리 할아버지니까 걱정은 안 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덮치는 건 앨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다쳐요. 정말 크게 다친다고요. 그리고 할아버님 연세도 생각하셔야죠. 뼈라도 부러지면 어떡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아버지 우십니다.”
루카리오의 단호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내용을 가만 되새기던 앨빈이 이내 제 형에게 눈을 흘기며 볼멘소리를 뱉었다.
“잠깐만. 나는 괜찮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다쳐!”
“안 다쳐. 기껏 해봐야 까지는 정도겠지.”
그 틈에 이드리스와 아르겐도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귀여운 손자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랜디가 그들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리자 먼저 아르겐이 정중하게 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어르신.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가슴에 손을 가져가 가볍게 허리를 숙인 아르겐이 고개를 들자, 랜디는 그를 알아봤다는 의미로 가볍게 짖었다.
“기억하시나 보네. 저도 왔어요, 랜디 할아버지. 다른 분들도 다 건강하시죠?”
이드리스가 무릎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이번에도 대답 대신 기운차게 짖어 보인 랜디가 헥헥거리며 그들을 반겼다. 저러다가 저 작은 꼬리가 똑 떨어져나와 제멋대로 펄떡이는 게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상상을 한 아르겐이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때마침, 말로는 제 형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우친 앨빈이 백기를 들고는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리기로 했다. 바로 아직까지 쭈뼛거리며 굳어있던 페이를 챙기기로 한 것이다.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우왓!” 하는 소리와 함께 페이가 뒤돌아 앨빈을 보았다. 동그란 눈을 마주 본 앨빈이 눈가를 휘며 장난스럽게 제안했다.
“페이도 인사해야지? 랜디 할아버지 기다리는데?”
그 말에 페이가 다시 제 앞쪽을 바라보았다. 랜디는 이미 까만 눈을 페이에게로 향한 채, 긴 혀를 빼물고 헥헥대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페이가 천천히 랜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실제로 본 적 없는 포켓몬을 만나고, 심지어 조금 전 그 포켓몬에게 깔려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한 경험은 다시금 아이의 손을 긴장으로 뻣뻣하게 만들었다. 결국 하얀 손은 랜디의 북슬북슬한 수염 끝에도 닿지 못했다. 대신, 다른 것이 아이의 손바닥에 닿았다.
미끈하고 물컹한 살덩이가 손바닥을 핥아 올리자, 페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페이가 랜디를 보자, 잠시 멈췄던 랜디가 다시 혀를 움직여 페이의 손바닥부터 팔을 핥더니 어느새 성큼성큼 다가와 페이의 얼굴까지 사정없이 핥아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얼굴과 앞머리가 침 범벅이 된 페이는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대신, 비어 있는 팔을 들어올리고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뜨뜻하고 간지러운 공격을 피하기 바빴다. 마치 아까 앨빈이 그랬던 것처럼.
“흐, 히히히..! 자, 잠깐, 간지러, 으히힛..!! 하하!”
랜디가 한 번 핥을 때마다 페이의 깡마른 몸이 휘청였지만, 넘어갈 걱정은 없었다. 앨빈이 무릎을 세워 페이의 등을 단단히 받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가 안고 있던 알 케이스도 떨어지지 않게 아래로 손을 넣어 꼼꼼하게 받쳐 들었다. 제 품 안에서 맑게 웃으며 랜디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페이를 내려보던 앨빈은 이내 고개를 들어 루카리오에게 물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뭐래? 엄마랑 아빠는?”
루카리오가 앨빈의 곁으로 다가가 랜디와 페이를 떼어놓으며 대답했다.
“아직 안 돌아오셨대. 할머님이랑 삼촌들도 다 같이 갔고, 집에는 부우랑 할아버님만 계셨다네.”
앨빈이 페이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여운이 남았는지, 페이는 얼굴이 닦이면서도 히히거리면서 실낱같은 웃음을 흘렸다. 끈적거리는 침을 말끔히 닦아내고 알 케이스를 제대로 안겨주고 나서야 일어난 앨빈이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부우는 어차피 자고 있을 테니까 아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네. 지금 가야 짐 풀기 딱 좋겠는데?”
“동감이야. 언제 돌아오실 지 모르니까 서두르죠.”
이드리스와 아르겐을 바라본 루카리오가 팔을 움직여 집으로 향하는 길목을 가리키고는 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움직이자, 이번엔 랜디가 선두에 서서 성큼성큼 나아갔다.
“꼭 처음 왔던 때 같네요. 어쩜 하나도 다른 게 없지.”
“사람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 있죠? 포켓몬도 똑같거든요.”
앨빈의 능청에 일행은 가볍게 웃으면서도, 놓칠세라 랜디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앨빈의 집은 ‘ㄱ’자 형태의 2층짜리 목조건물이었다. 밝은 갈색 원목으로 지어진 기와집은 넓은 마당이 딸려 있었고, 그 옆으로 커다란 1층 건물이 붙어있어서 한눈에 보아도 유복한 집처럼 보였다. 앨빈은 가족의 조상 중 누군가가 막 개척지일 무렵에 이 섬에 정착한 덕에 시간이 지나면서 커진 거라고 말했지만, 단순히 규모만 봐서는 지역 유지라고 해도 믿을 규모였다.
“아저씨, 부잣집 아들이셨군요….”
“아니, 아니라니까. 부잣집 아들은 내가 아니라 아르겐 씨지. 난 그냥 도장집 둘째 아들이라니까.”
페이의 감탄을 서둘러 정정한 앨빈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당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점 말고는, 흔한 시골집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바닥에 점점이 깔린 둥근 포석을 밟고 다다른 미닫이 현관을 옆으로 열자, 깨끗하고 훤한 실내가 드러났다. 대청마루로 통하는 창문이 전부 통유리라서 더 그렇게 보였다.
자기 배낭을 현관 앞에 내려놓은 앨빈이 이드리스의 캐리어를 받아 들고는 페이에게 말했다.
“방은 2층에 있어. 남는 방이 많지는 않아서 페이는 아저씨가 쓰던 방 쓰자. 이드리스랑 아르겐 씨는 전에 썼던 방으로 안내할게요.”
“그럼 난 할아버님 모시고 부우 좀 보러 다녀올게. 안 보이는 걸 보니 또 어디 거꾸로 뒤집혀서 자고 있을까 겁난다.”
랜디와 루카리오가 마당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앨빈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페이가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제가 아저씨 방을 쓰면, 아저씨는요?”
“아, 난 거실에서 자면 돼. 내 방 침대는 이제 나한테는 너무 작아져서 쓰기 불편하거든. 페이가 쓰기에는 충분할 거야.”
“그래도….”
“괜찮다니까. 여름이기도 하고 거실 마루에서 시원하게 자면 나야 좋지.”
그제서야 페이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 뒤를 이어 아이의 표정에 드러난 것은 설렘이었다. 동경하던 사람이 예전에 쓰던 방이라니. 이맘때 아이에게는 로망으로 여겨질 법한 일이지 않은가. 앨빈이 2층 복도 제일 안쪽 방문을 열어주었을 때, 페이의 설렘은 숨길 수 없이 부풀어 자기도 모르게 발을 동동거릴 정도였다.
앨빈의 방은 책상, 책장, 침대, 포켓몬 관련 용품, 뱃지 액자 등이 놓여있는 평범한 트레이너의 방이었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박하고 어딘지 모르게 휑한 방. 그렇지만 아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 서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렇게 신이 날까.’
그 모습을 보며 살풋 웃은 앨빈이 페이의 배낭을 책장 옆에 내려놓았다.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남은 두 사람과 자리를 비켜주었다.
뒤따라 걷던 이드리스가 걸음을 서둘러 앨빈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좀 부럽다? 앨빈 케니스.”
“부럽긴 뭐가. 귀엽다는 말은 백번 동의하지만.”
“저 좁은 방을 꼭 보물창고라도 되는 듯이 구는 거 봤잖아. 누군가한테 저 정도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거, 정말 행운인 거다? 특히나 그 누군가가 저맘때 아이들이라면 말이야. 페이한테는 네가 꿈이나 마찬가지일걸. 여느 포켓몬 트레이너들이 챔피언이나 톱 코디네이터를 그렇게 여기듯이, 페이한테도 네가 그런 걸 거 아니야.”
“흐음….”
예상치 못한 밋밋한 반응에 이드리스가 눈을 두어 번 꿈뻑였다.
“뭐야. 고맙다거나 그런 말도 없네?”
“아니. 당연히 고맙지. 엄청나게 기쁜 일인 것도 알고. 근데, 좀 복잡하네.”
“어? 뭐가?”
앨빈은 대답 대신 방문을 열어젖혔고, 깨끗하게 정돈된 방구석에 캐리어를 가져다 놓은 뒤 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르겐의 방문을 열어주는 앨빈을, 이드리스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앨빈의 마지막 말이 차마 질문을 건네지 못하게 그녀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복잡하다고?’
그가 제 옆을 지나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이드리스는 그를 붙잡고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언제나 앨빈은 페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참을 수 없을 만큼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었는데, 왜 저런 얼굴로 저런 대답을 하는 건지 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고 봐! 언젠가는 내가 반드시 뛰어넘고야 말테니까! 그때 가서 후회하지나 말라고!”
주방 조리대에 손을 짚고 선 앨빈이 눈을 감았다 떴다. 잠시 과거의 조각이 스쳐 지나간 탓이다. 티 내지 않으려고 신경 썼건만, 피곤했던 탓인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내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점심거리를 찾으며 앨빈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되짚었다.
‘꿈이라….’
참 가슴 벅차면서도 그렇기에 덧없는 단어라는 생각이 스치다 사라졌다. 그것이 얼마나 찬란한 희망과 동기를 불어넣어 주는지는 앨빈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광스러워야 할 일이었다.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의도가 좋다고 언제나 좋은 결과만 낳지 않는다는 것 역시, 어른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우유와 달걀, 햄, 치즈, 채소 몇 종류를 꺼내 조리대에 늘어놓고 스테인리스 볼을 꺼내 달걀을 풀었다. 식탁에 놓여있던 식빵을 삼각형으로 잘라 하나씩 담갔다. 간단하게 프렌치토스트나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 아침 식사 때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고, 점심을 먹기에도 조금 늦었으니, 간단하게 때우고 저녁에 푸짐하게 차려 먹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사람이 늘어났다지만, 간만에 돌아온 집은 별다를 게 없었다. 소란스러운 손님들도 아닌지라, 바깥의 소음들이 지워지지 않고 흘러와 마치 음악을 틀어놓은 것처럼 귀를 간질였다.
이 주방에서 혼자 요리를 하는 게 얼마만의 일이었더라. 한동안 바빠서 제대로 얼굴도 비추지 못한 불효자식이라고 한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니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부모님이 그렇게 여기실 리가 없다는 건, 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입에도 담지 않을 분들이시니까.
토스트는 달걀물에 담가둔 채 냉장고에 잠깐 재워두기로 하고 채소를 물에 씻었다. 슬라이스 햄이랑 치즈도 떼어 놓고 마르지 않게 접시로 덮어두었다. 한 10분 정도 있다가 다들 모이면 본격적으로 만들기로 하고 물에 젖은 손을 바지춤에 문지르며 앨빈이 마루로 나갔다.
여름 하늘은 참 푸르렀다. 구름이 싹 가셔서 그런가 유독 높고 넓어 보였다. 마침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처마에 걸린 풍경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린 것처럼 평화로운 한때가 아닐 수 없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푹 쉬고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야, 부우! 누가 여기서 자라고 했어. 너 그러다 진짜 목 이상하게 꺾인다니까?!”
…그럴 리가 없지. 익숙한 목소리에 크게 한숨을 쉰 앨빈이 슬리퍼를 신고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도장으로 사용하는 1층 건물 뒤쪽 나무에 사람 세 명과 포켓몬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아니, 한 마리는 모여있다기보다는…, 뒤집혀 박혀있었다.
앨빈 어머니의 포켓몬인 야부엉, 부우는 밤에는 여느 야부엉들과 마찬가지로 쌩쌩하지만 해가 떠 있을 때면 정신을 못 차리기 일쑤였다. 얌전히 잠만 잤다면 어디에나 있는 야부엉이구나, 싶었을 거다. 그러나 부우는 참으로 독특한 녀석이라서, 큰 각도로 목을 꺾고 돌릴 수 있는 장기를 요상한 데서 발휘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 취미란 바로 자던 곳에서 거꾸로 떨어져서 목이 옆으로 꺾인 채로,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단잠에 빠지는 것이었는데, 때문에 언제나 부우가 집에서 보이지 않을 때면 찾아다니는 것이 케니스 가족의 일과 같은 것이 되었다. 의도치 않은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어물쩍 넘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루카리오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랜디와 함께 부우를 찾으러 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수색대가 몇 명 더 있었던 모양이다. 허리에 양손을 짚고서 부우를 향해 씩씩대는 아이린과,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나길, 그리고 빵빵하게 부푼 에코백을 든 오브리가 딸각거리는 슬리퍼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엄마, 걔한테 화내봤자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요. 몬스터볼 또 두고 나왔지?”
앨빈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세상모르고 침까지 질질 흘리며 자는 부우의 표정이 참 볼만 했다. 그와 반대로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긴 아이린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진짜 못살아. 램이 그렇게 구워삶았는데도 도통 고쳐지지를 않는다니까. 대체 누굴 닮았는지.”
“포켓몬이 트레이너 닮지, 누굴 닮아? 내가 볼 때는 당신을 쏙 빼닮았어. 하하하!”
“조용히 안 해, 나길?!”
“아야야야!"
타들어가는 속을 몰라주는 남편이 못마땅했는지, 아이린이 바락 소리를 지르며 나길의 귓볼을 잡아당겼다. 그 틈에 루카리오는 부우를 들어 랜디의 등에 태워 집으로 보냈고, 오브리는 옆걸음으로 앨빈의 곁을 향해 다가왔다.
“늦게 올 거라더니, 먼저 와 있었나 보네? 가서 예쁨 실컷 받고 왔냐?”
앨빈의 물음에 오브리가 씨익 웃으면서 에코백을 벌려 보였다.
“당연하지. 어르신들은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시니까. 가져다 먹으라고 나무 열매도 엄청 싸 주셨어. 좀 있다 우리 애들 나눠주려고. 넌 지금 온 거야?”
“어. 방금 도착했어. 점심 준비 끝나서 쉬려고 했는데, 소리가 나길래 와 본 거야. 여전하네, 부우. 좀 있다 램 할머니한테 엄청 혼나겠는데.”
“그렇겠지? 이따 구경이나 해야겠다. 근데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넌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도 안 하고 점심 메뉴부터 물어보냐? 매정한 동생 같으니.”
“어차피 잘 지냈을 거 아니야. 얼굴 보니까 잘 먹고 잘살았겠구만. 그리고 네가 어디 가서 잘 못 지낼 일 있니.”
“참 나, 말이나 못 하면.”
앨빈의 탄식에 장난스러운 미소로 화답한 오브리가 손나팔을 만들어 아이린과 나길 쪽으로 외쳤다.
“고모~! 고모부~! 앨빈이 토스트 해준대요! 얼른 가서 밥 먹어요, 저 배고파요!”
나길의 귓불을 빨갛게 만든 아이린이 그제야 손을 떼고는 말했다.
“당신, 브리 때문에 봐주는 거야.”
“히잉…,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해. 난 그냥 기분 풀어주려고 한 건데.”
“분위기 좀 봐 가면서 해. 쉰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철이 안 들어서는, 으휴!”
아내의 핀잔에 나길이 꿍얼거리자, 아이린이 눈총 한 방을 쏴 주었다. 그러자 나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시선을 저 먼바다로 던지며 딴청을 피웠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아이린은 곧 앨빈에게로 직진했다. 앨빈이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그녀가 냅다 얼굴을 덥석 잡아 제 눈높이로 끌어내렸다.
“어, 엄마?”
당황한 아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피던 아이린은 곧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떼고 웃었다.
“어디 또 다쳐오지는 않았구나. 다행이다. 이번에도 상처가 늘었으면 너희 형 대신에 내가 혼낼 생각이었거든.”
“와아…, 살벌한 인사 고마워요. 우리 집사람들은 다 왜 이럴까. 평범한 인사면 난 족한데.”
“이게 우리 집에서는 평범이잖니? 아무튼, 오느라 고생했다. 친구들 데려오는 것도 고생했고.”
아이린이 앨빈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듯 쓰다듬었다. 말로는 질색했지만, 앨빈은 이것이 엄마의 애정임을 알았기에 잠자코 있었다. 아까까지 심란했던 마음이 서서히 가벼워져 갔다.
“자, 자. 이제 그만. 우리 여사님이랑 관장님, 그리고 형님이랑 아주 귀한 동생분. 어서 가시죠. 오랜만에 얼굴 비춘 아들이 식사 한 번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머리칼을 정리한 앨빈의 능청에 방금까지 뚱해 있던 나길이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서있던 루카리오의 어깨를 잡아 제 몸에 붙이며 그가 말했다.
“오냐! 얻어먹기 힘든 토스트 맛이나 좀 보자!”
“아버지, 제가 혼자 걸을 수 있습니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잖냐. 우리 큰아들 얼굴 보기가 좀 힘들어야지.”
나길의 능청에 루카리오는 그저 헛웃음을 흘리며 어깨 위에 놓인 손에 제 손을 올려놓고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걸 보며 쿡쿡 소리 내 웃은 앨빈이 집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네. 이쪽입니다. 이쪽.”
“나 샐러드도 만들어 주라, 앨빈.”
“그건 브리 네가 알아서 해 먹어.”
“쩨쩨하긴!”
오브리가 볼을 뿌우, 부풀리자, 오랜만에 다시 만난 가족들은 크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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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인 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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