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두 갈래 길
쿵, 우르릉.
동굴 안을 울리는 수상한 소리에 마그마단의 간부, 호걸이 입구 방향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곳곳에 설치된 등에 불이 켜지며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현재 리더인 마적은 주홍구슬을 훔치기 위해 부재중인 상태. 구열 또한 그를 따라나선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리더가 구슬을 가지고 돌아올 것을 기다리며 깨어난 그란돈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
그러나 왠지 소란스러운 상황에 호걸은 무언가 잘못되어감을 느꼈다. 자신이 있는, 그란돈이 잠들어있는 공간과 통로가 연결된 입구에서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는 조무래기 하나를 향해 그가 소리쳤다.
“뭡니까,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그, 그게, 침입자가-!”
으아악! 큰 비명에 보고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말을 하던 녀석이 통로에서 날아들어 온 또 다른 조무래기와 부딪혀 바닥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당황한 호걸이 한걸음 주춤 물러나며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통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덩치가 큰 가디안이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세 개의 인영. 호걸이 혀를 찼다.
“쳇, 그때 그 은발 가이와 스트레인지 차일드입니까?!”
“들었어? 당신 보고 차일드란다.”
“옆의 빨간 머리 차일드는 또 뭐죠? 그사이 동료가 늘었습니까?”
“누가 차일드야!”
실버가 모르페코급 태세 전환을 보였다. 그가 볼 하나를 왼손으로 굴리며 앞으로 나섰다.
“흥. 보아하니 네녀석은 제법 싸울만한가보지?”
“이 마그마단의 서브 리더인 이 호걸에게 그런 건방진 말투라니! 그 건방진 콧대를 눌러드리죠, 빨간 머리 차일드!”
“성인이라고!”
하긴, 해가 지났으니 따지자면 실버도 이제 성인이었다. 축하해 실버. 제노가 설렁설렁 손뼉을 치며 말하자 옆에서 성호가 거들었다. 축하해, 실버 군.
아무래도 그것이 그의 화를 돋운 것 같앗다. 실버가 몬스터볼을 던졌다. 쿠웅,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장크로다일이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었다. 동굴 전체를 울리는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호걸 또한 지지 않고 몬스터볼을 던졌다.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라에나. 폭타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뭐, 현실의 배틀은 게임처럼 흘러가지 않으니까.
제노가 완전히 관망하는 자세를 갖추자, 옆에 선 성호가 물었다.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나요?”
“네.”
날 쓰러트리겠다고 큰소리친 만큼 이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곧장 입을 다문 제노가 배틀에 집중했다. 그 눈빛을 성호가 바라보았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성호는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역시 ‘어쩌다 알게 된 사이’에 나오는 신뢰는 아니었다.
나도 윤진이 옆에 있었으면 저런 눈을 하고 있었을까? … 아니, 그건 역시 아닐 것 같다.
성호의 그런 생각을 멈춘 것은 호걸의 마지막 포켓몬이 패배하는 소리였다. 쿠웅, 폭타가 바닥에 쓰러지며 힘겨운 울음소리를 냈다. 호걸이 이를 갈던 그때, 세 사람이 들어온 입구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비틀린 미소를 지어냈다.
“우, 우효효효! 리더 마적! 돌아오셨군요!”
“이게 무슨 소란이지.”
무게감 있는 목소리. 아무래도 보스의 등장인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마적이 간부 하나, 그리고 조무래기 몇몇과 함께 대열을 맞춰 서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침입자 경보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붉은 조명이 비췄다. 마그마단의 리더라는 지칭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눈빛.
재빠르게 그의 곁으로 향한 호걸이 자신이 얼마나 힘겹게 시간을 벌었는지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제노와 마적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차피 이런 악의 조직은 머리를 잡아야 빠르게 와해되는 법. 호걸과의 배틀로 포켓몬들이 지친 실버를 뒤로 물린 제노와 성호가 다가올 싸움에 대비해 자세를 잡자, 마적이 흥미롭다는 듯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래… 단순히 평범한 트레이너는 아닌가 보군. 여기까지 오다니, 아주 놀라운 실력이야.”
하지만 그때의 경고를 잊은 건 아니겠지. 마적이 나지막이 말하자 마그마단의 또 다른 간부, 구열이 앞으로 나섰다.
어딘가 졸린 것 같기도 하고 멍한 것 같기도 한 구열의 눈이 제노의 것과 마주치자 크게 뜨였다.
“너… 나리의…. 그래, 그렇구나. 이것도 운명이란 거네.”
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몬스터볼을 꺼내 들었다. 어쩐지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너… … 타깃록, 했어.”
아하하하! 높은 웃음소리와 몬스터볼이 던져졌다. 상대는 이번에도 그라에나가 두 마리. 페어리 타입 기술을 열심히 연습해 준 가디안의 노력을 떠올리며 미소 지은 제노가 성호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포켓몬은 땅/에스퍼 타입의 점토도리. 아무래도 불 타입 공격을 견제한 선택인 것 같았다. 제노가 물었다.
“이번에도 지진을 사용하실 건 아니죠?”
“글쎄요, 일단 특성이 부유이긴 하거든요.”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게 받아친 성호가 눈가를 조금 찡그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성호가 오른팔을 뻗었다.
“점토도리, 원시의힘!”
“해치워라!”
사납게 울부짖은 그라에나들이 날아드는 돌들을 턱 힘으로 부수며 달려들었다. 점토도리를 물어뜯으려 입을 벌린 그라에나들의 공격이 무언가에 막혔다. 점토도리의 앞에 쳐진 투명한 장막, 리플렉터였다.
그라에나들의 움직임이 멈춘 그 짧은 사이를 노리고 새하얀 빛줄기가 쏟아졌다. 캥!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그라에나 한 마리가 저만치 날아가 돌바닥 위를 굴렀다.
구열이 재빠르게 폭타로 포켓몬을 교환하는 사이, 마적의 그라에나가 크게 울부짖었다. 커다란 소리와 동시에 가디안의 모습이 볼 속으로 사라지더니, 피카츄가 끌려 나왔다.
이런 귀찮은 기술을 배우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상성에 구애받지 않는 배틀이야말로 제노의 특기였다. 어리둥절해하던 피카츄가 금세 자세를 잡았다. 마침 아군의 포켓몬은 땅 타입. 성호와 눈을 마주한 제노가 앞으로 주먹을 뻗으며 외쳤다.
“날려버려!”
“피카-”
츄우우우! 깜찍한 기합 소리와 함께 강한 전격이 사방팔방을 향해 쏟아졌다. 피할 곳을 잃은 그라에나가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곧장 구열의 지시가 이어졌다.
“폭타, 피카츄를 향해 스톤사워!”
폭타 역시 전기 공격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건 마찬가지. 그러나 그 판단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성호의 점토도리가 강한 빛을 가르고 회전하면서 폭타에게로 온몸을 부딪쳤다. 콰앙-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폭타가 뒤로 밀려나며 피카츄를 향하던 바위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피카츄의 공격이 멎고, 바싹 지져진 그라에나가 바들바들 떨더니 결국 쓰러졌다. 마적의 다음 포켓몬 역시 폭타.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그림에 제노의 미소가 짙어졌다. 제노가 흥분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호 씨, 혹시 비행 타입 포켓몬은 있으신가요?”
“무장조가 있긴 한데-”
“교체 부탁드립니다!”
성호의 답이 끝나기도 전에 제노가 빠른 속도로 덧붙였다. 부탁이라곤 했지만 거의 명령에 가까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성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점토도리를 들여보냈다. 표정을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수가 궁금하니 이쪽에서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부탁한다!”
높은 울음소리로 답한 무장조가 볼에서 튀어나오자마자 거의 동굴의 천장에 닿을 듯이 날아올랐다. 아군의 포켓몬이 비행 타입이길 원한다는 것은 큰 공격이 온다는 뜻과 같았다. 그렇기에 무장조가 빠른 속도로 방해되지 않는 위치까지 이동한 것이었다.
“화염방사!!”
강철 타입 포켓몬의 등장에 곧장 불꽃 타입 공격이 쏟아졌다.
이때만을 기다렸다. 주먹으로 허공을 꽈악 붙잡은 제노가 외쳤다.
“지금이야!”
그리고 발밑에서 세찬 파도가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불꽃과 함께 폭타들을 삼켜버렸다. 물살이 가라앉고 드러난 것은 정신을 못 차리고 헤롱거리는 폭타들이었다.
특성 하드록이 적용되더라도 물 타입 기술은 3배. 이거지, 이거야! 두 마리를 깔끔하게 날려버렸다는 흥분에 제노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내내 유적의 조사로 굳어있던 몸에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거의 천장에 붙을 듯이 날아오른 무장조 역시 아래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적이 포켓몬을 교체하고 있는데도 제 파트너에게선 아무런 신호도 오지 않았다. 끼이이, 작게 울음소리를 흘린 무장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호를 확인했다.
그가 정장에 튄 물기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함께 배틀하는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적과 구열에게 남은 포켓몬은 각각 한 마리. 허나 성호와 제노의 포켓몬들은 교체가 이루어졌을 뿐 모두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 마적의 몸이 떨렸다.
충격을 받은 건 마적뿐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배틀을 지켜보던 실버 역시 말을 잃고 크게 눈을 뜨고 있었다.
뭐야, 이거. 그래도 어느 정도는 따라잡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 압도적이잖아. 용의굴에서 자신과 팀을 이루어 했던 태그배틀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이것이 정규시합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상대는 범죄 조직. 전력을 다해 쓰러트리지 않았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제노의 포켓몬들이, 그가, 이 정도의 실력을 보여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만약 그때 내가 챔피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그의 진짜 실력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지금의 실력으로 가능하긴 한가?
실버가 성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제노에게 닿아있었다. 실버는 저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큭… 후후… 크크큭, 후하하하하!”
순간 마적이 몸을 뒤로 젖히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구열마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뚝, 웃음이 멎고, 다시 자세를 바로 한 그의 눈에는 어떠한 광기가 들어있었다.
“감히 이 마적을 방해하는 녀석을 용서하지 마라-!!”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외침과 동시에 마적의 마지막 포켓몬, 또도가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 몸이 점차 빛나기 시작했다. 실버와 제노에겐 한번 겪어본 패턴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성호가 입을 열었으나 이미 늦었다. 또도가스가 대폭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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