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샛길 둘
오 박사의 집에 지내게 되면서도 제노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아침이 되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난다. 이불을 정리하고, 곧장 부엌으로 향한다.
“좋은 아침.”
“안녕히 주무셨어요.”
커피를 끓이고 있으면 뒤이어 일어난 남나리가 부엌에 나온다. 아침을 준비하는 그를 도와 식기를 나르고 커피를 잔에 따르고 있으면 곧 오 박사와 그린이 식탁에 모였다.
자기 몫의 우유 한 컵을 비운 제노가 서둘러 이를 닦고 외출 준비를 했다. 제노가 남은 양말 한 짝을 발에 끼우는 것을 확인한 피츄가 먼저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오 박사가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츄를 데리고 그를 따라 연구소로 출근한다. 자잘한 심부름을 하고 연구원들이 주는 간식을 받아 피츄와 나눠 먹거나, 벽 하나를 가득 메운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골라 읽는다. 해가 떨어질 때쯤에 그와 함께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일찍 잠에 든다.
그렇게 제노는 거의 하루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연구소에서 보냈다. 마치 오 박사의 집에 들어가게 되기 전처럼.
처음 그와 함께 연구소로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은 제노였다. 물론 집에 있으면 편하겠지. 하지만 그린의 존재와 자신의 위치가 신경이 쓰여 도저히 마음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연구실의 지박령이 되는 방향이었다.
최대한 오 박사님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얌전히 있어야지. 그렇게 생각한 제노가 구석 자리에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서적에 코를 박았다. 피츄가 따라 책 사이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각자의 할 일로 바쁘게 움직이는 연구원들의 사이에서 오 박사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변이 생긴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연구실 책장 근처 구석에 비치된, 거의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자리에 박혀있는데 의외의 인물이 연구소를 찾아왔다.
보라색의 도톰한 맨투맨을 입은 소년이 뚱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 제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오 박사님이라면 저기에 계시는데, 왜 나를 보는 거야. 제노가 머뭇거리며 책을 내려놓는 사이 다가온 오 박사가 그를 일으켰다.
피츄가 따라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고, 오 박사가 말했다.
“자, 제노야. 오늘은 쉬는 날이란다.”
거짓말. 그럼 지금 뒤에서 갈려 나가는 연구원들은 뭔데요.
그 빤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오 박사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어-… 제노에게만 주는 특별한 휴일이라는 거지.”
매일 아침부터 나를 따라 나오느라 고생했잖니.
그렇게 말하며 오 박사가 동의를 구하듯 제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에 제노는 차마 목까지 올라온 부정을 내뱉지도 못하고 삼켰다.
솔직히 이런 장소에서 어린아이가 다른 사람을 고생시키면 고생시켰지, 본인이 고생을 할 일은 없었다. 오늘따라 이상한 말을 내뱉는 오 박사를 제노가 불안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밖에서 놀다 오렴. 마을 구경을 시켜줄 그린도 불렀단다!”
그가 제노의 어깨를 잡은 그대로 그린에게 데려갔다. 아무래도 목적은 이거인 모양이었다. 조심해서 놀다 오너라, 그린, 제노 잘 챙겨줘야 한다! 오 박사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곤 두 아이를 연구소 밖으로 내보냈다.
피츄를 품에 안아 든 제노가 매정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나 지금 쫓겨난 거니. 여전히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그린이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손 하나를 빼서 내밀었다.
“자.”
“…?”
제노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잠시 기다리던 그가 답답해졌는지 멋대로 제노의 손 하나를 잡아챘다. 졸지에 그와 손을 잡게 된 제노가 거의 끌려가는 형태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두 아이의 모습을 창문 너머로 확인한 오 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 박사의, 그러니까 오용호의 속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를 데려오긴 했지만 그것이 잘한 결정인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그러지 말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가, 어떤 때에는 이것이 최선이었다며 다시 자신을 북돋웠다.
마치 처음 포켓몬 연구의 길에 들어섰던 젊은 시절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그런 그에게 오늘의 상황을 제안한 것은 남나리였다.
- 오늘은 연구소 밖에서 제노가 놀게 해주세요. 그린이 그 애와 가까워질 기회를 주는 건 어때요?
‘놀게 해준다’라. 그래, 제노에게는 그 나이대에 맞는 즐거움이 필요했다. 그는 가족이 되고 난 뒤에도 영 집에 붙어있질 못하고 연구소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고집했다.
수면의 질이 낮고 식사의 양은 작았다. 한번은 별생각 없이 더 먹으라고 권유했다가 억지로 쑤셔 넣는 것을 목격한 뒤로 그만두었다. 덕분에 제노 몫의 그릇에 담기는 밥은 그린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어린아이의 몸은 정직했다. 제노는 확실히 이 집을, 정확히는 그린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서로의 존재가 생존에 위협이 된다고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오용호는 처음 가족들에게 제노를 들일 것을 제안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예상외로 선뜻 동의한 것은 바로 그린이었다. 허나 그 점이 오히려 오용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린은 아직 어리다, 가족이 되고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른다. 어쩌면 제노를 데려오는 것을 야생 포켓몬 한 마리를 주워 오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 아들과 며느리가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남나리는 이미 철이 든 나이었다. 제 앞가림은 물론이고 자신을 대신해 부모의 빈자리를 자처하며 이제 겨우 걸어 다니는 그린을 돌보아준 나리에게는 아무리 고마워해도 모자랐다.
그렇게 남나리는 돌볼 일은 없었고, 그린은 사내자식이었기에 제 아들놈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엄하게 키웠다. 그러나 제노는 처음 겪는 유형.
평생 합사라곤 포켓몬들끼리밖에 해보지 않은 오 박사가 골머리를 앓고 있자 남나리는 참 담백하게도 말했다.
- 그린이 자기 입으로 좋다고 말했잖아요. 그냥 둘이 같이 있게 해주세요.
- 하지만 제노가 힘들어하면…
- 그럼 뭐, 평생 적응 안 시킬 거예요? 할아버지는 제노가 정말 그렇게 자라길 원하세요? 그리고 아직 두 사람이 어린 이 시기를 놓치면 영영 후회할지도 모른다구요.
남나리의 말이 백번 맞았다. 무엇보다 그린에 대해서 잘 아는 나리에게 결정을 맡기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던 오용호가 말했다. 알겠다, 네가 말한 대로 해보자꾸나.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알아요? 아이들이 생각보다 잘 지낼지.
오용호가 내어놓은 답변에 나리가 그를 안심시키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먼 미래, 원치 않는 방향으로 너무나도 좋아진 사이에 나리는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게 되지만, 아무튼.
*
제노는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린의 등만 바라보았다.
그린이 자신을 데리고 다니며 한 일은 간단했다. 하나, 서열 정리.
“야.”
“으, 응?”
“내가 너보다 생일이 빠르니까 내가 오빠인 거다, 알았지?”
그린의 생일은 이름에 맞게 푸릇푸릇한 봄. 반면에 자신의 생일은 오 박사가 정한, 처음 집에 오게 된 날인 초겨울. 고로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제노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어요….”
“뭐야, 존댓말 하지 마. 불편하게.”
“알겠어….”
제노가 기어들어 가듯 답하며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그린의 발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리고 둘, 유세 활동.
간단한 물건은 여기서 산다고 설명한 그린이 곧장 작은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마을의 가게 주인은 그린을 바로 알아보곤 인사를 건넸다.
“어머, 그린 아니니.”
“안녕하세요!”
“옆의 꼬마 아가씨는 누구야? 여자 친구?”
“제 동생이에요.”
그렇게 답한 그린이 제노를 조금 앞으로 당겼다. 안녕하세요, 제노 또한 자그마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과자 두 봉지에 삶은 계란, 젤리, 초코바, 그리고 음료수 두 병. 간식거리를 가득 사 가방에 넣은 그가 동네 탐방을 이어갔다.
가는 곳곳마다 동네 어른들이 그린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같은 질의가 반복될 때마다 그린은 예의 바르게 답하며 제노를 자신의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남매가 손을 꼬옥 잡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사람들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노는 어른들의 앞에서 방싯방싯 웃는 그린에 소름이 돋아있었다.
내 앞에서는 그렇게 싫은 표정이더니, 막상 남들한텐 잘만 가족이라고 소개하고.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에 고민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곳은 다시 집 근처였다. 제노가 물었다.
“집에 가는 거야?”
“아니.”
그럼 어디 가는 건데. 제노의 의문을 해소시켜주기엔 불충분한 간결한 답만을 남긴 그가 향한 곳은 옆집이었다.
제노는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대문 앞 길목에 모자를 쓴 한 소년이 쭈그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레드!”
마지막, 셋. 그린의 부름에 그가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린다. 하얀 챙 아래의 동그란 눈동자가 그린에게, 이윽고 자신에게 향한다.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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