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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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아르세우스 7화

가지 않은 길

디아루가와 펄기아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포켓몬을 만났다.

남은 포켓몬은 단 한 마리, 기라티나.

이제는 창처럼 깨어진 기둥들만이 남아있는 천관산의 꼭대기로 향했다. 그곳에는 월로가 제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그동안 모은 플레이트를 제게 넘기시죠! 제가 그것들을 하나로 모으겠습니다!”

월로가 자신의 진짜 목적을 말했다. 아르세우스를 만나, 그가 자신을 따르게 하여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

제노는 생각했다. 케이크는 한 조각, 사람은 둘. 배불리 먹고 싶다면 칼로 상대를 찔러야 한다. 케이크를 반으로 가른다는 선택지는 없다. 제노는 선량한 주인공이 아니었고, 월로에게 이 세상은 평화로운 게임 속이 아니었으니까.

“세계가 사라지는 것을 막고 싶다면 저와 싸우시죠!”

월로의 외침에 제노가 몬스터볼을 손에 쥐었다. 이 세계가 어찌 되는지는 상관없다, 다만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이야? 나는 찔리기 싫어서 먼저 찔렀을 뿐이라고.

*

월로와의 배틀은 난천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마지막에 내보낸 토게키스는 어찌나 튼튼한지, 덩칫값을 하는 아이였다. 토게피 시절부터 같이 배틀을 해왔던 포켓몬이 완전히 성장한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전력을 다해 쓰러트려야 한다는 사실에 더더욱.

쓰러진 토게키스를 볼 안으로 들여보낸 월로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왜… 왜! 어째서 당신 따위가 아르세우스의 가호를 받고 있는 거지?!”

네가 보기엔 이게 가호 같냐? 제노는 조금 황당해졌다.

“…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척이.

월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등 뒤로 불길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날개를 쭉 뻗은 커다란 포켓몬이 어둠 속에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부숴 버려라, 기라티나!”

월로와의 배틀로 지친 포켓몬들의 상태를 살핀다. 어찌어찌해볼 만할지도 모르겠다. 부탁한다! 제노가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던 포켓몬을 꺼냈다. 님피아가 아름다운 리본 모양의 더듬이를 살랑이며 땅에 발을 디뎠다.

“님피아!”

님피아가 높은 울음소리로 대답하며 몸에 기운을 끌어올렸다. 순간 어둠 속으로 사라진 기라티나의 몸이 공간을 찢고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강력한 빛이 님피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

님피아가 바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몸을 지탱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온 힘을 쥐어짠 마지막 공격. 기라티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해치웠나 싶었던 그때, 기라티나의 눈에 서늘한 안광이 깃들더니, 그 모습이 변했다.

기라티나의 진정한 모습. 여섯 개의 다리가 사라지고, 대신 거대한 지네 포켓몬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무시무시한 힘. 순간 님피아가 보이지도 않는 속도의 공격을 받고 뒤로 날아갔다. 쿵, 창기둥에 부딪힌 님피아의 몸이 무력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결국 당신도 여기까지입니다. 기라티나, 그를 쓰러트리세요!”

흉흉한 시선에 몸이 꿰뚫리는 느낌이었다. 제노는 침착하게 님피아를 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몬스터볼.

저런 걸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월로가 반사적으로 경계한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고개를 숙였던 제노가 볼을 던졌다.

월로는 이후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인물. 고로 비장의 수단을 꺼내도 될 거라 판단했다. 하늘 위에 모인 먹구름에서 불길한 천둥이 치고, 기다란 몸체의 드래곤 포켓몬이 내려온다.

너만 포켓몬 일곱 마린 줄 아냐? 나도 일곱 마리야, 이 자식아.

*

배틀이 끝나고 기라티나는 깨어진 세계로 모습을 감추었다.

“도망치다니 이런 한심한…!”

분노와 허망함으로 가득 찬 월로가 소리치는 것을 무시하고, 제노는 기라티나를 쓰러트리고 난 직후부터 계속해서 반응을 보이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찬석에게 받은 공신의피리.

밋밋한 형태가 제멋대로 일그러지더니, 이내 독특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르세우스를 부를 수 있는 천계의피리로 변한 것이었다.

이건 대체 어디를 잡고 연주해야 하는 거지. 조금 망설이던 제노가 피리 끝을 입에 물었다. 숨을 불어넣자 독특한 음색이 창기둥에 울려 퍼졌다.

“당신 지금 뭐 하는….”

월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소리가 흩어지자 허공에 찬란한 빛이 모이더니, 이내 계단의 형태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계단의 끝, 시작의 방에서 아르세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돼, 설마, 진짜 아르세우스라고…?”

기라티나와는 차원이 다른 기운. 절로 느껴지는 경외감. 이것이 창조신 아르세우스. 그가 자신이 아닌 제노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월로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물들었다.

아르세우스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모든 포켓몬을 만나는 일, 그대는 훌륭히 해내 주었다.

- 그대를 이 세계로 부르길 잘한 것 같군.

근데 거기에 제 의견은 하나도 없었잖아요. 제노가 아르세우스의 시선을 피하며 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렸다. 차마 저 눈을 마주하면서 욕할 용기는 없었다. 아르세우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 나는 앞으로 그대와, 그대가 살아갈 우주를 축복하겠다.

“… 저기,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 준다는 말은…!”

어쩐지 이대로 마무리를 지을 것 같은 느낌에 제노가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던 아르세우스가 답했다.

- 물론이다. 나는 이렇게나 활약해 준 그대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아니, 월로의 표정을 보니 빛나는 것은 자신의 몸인 듯했다. 빛의 계단과 함께 점점 희미해지는 제노를 바라보던 월로가 외쳤다.

“인정할 수 없어… 이런 끝, 나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어쩌라고. 제노는 몸이 붕 뜨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동시에 월로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똑똑히 기억해 두세요! 설령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리더라도 나는-!”

그리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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