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아르세우스 8화
가지 않은 길
띡-, 띡-,
일정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제노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까맣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며 주변이 들어왔다.
… 낯선 천장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환자 모니터링 장비가 있었다. 알 수 없는 숫자와 함께 일정한 모양으로 그려지는 그래프가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여긴 병원인 모양이었다. 이번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 눈에 들어온 금발에 놀라 제노는 몸을 움찔거렸다.
월로가 아니다. 훨씬 긴 머리카락, 검은색의 옷… 난천이었다.
“으음….”
제노의 움직임에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던 난천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작게 하품한 그가 눈을 비비더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제노가 그와 시선을 마주한다. 난천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 이윽고 난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의료진들이 우르르 병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
그날 제노는 처음으로 난천이 우는 모습을 보았다. 미인의 눈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자니 절로 심장이 쫄아들었다. 제노의 상태를 확인한 의료진들이 자리를 비키고, 조금 진정한 난천은 발개진 얼굴로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난천을 밀친 제노가 대신해서 돌덩이에 깔린 직후, 의식을 잃은 상태로 구조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렇게 깨어나지 못한 지 벌써 이 주일째라고.
난천의 능력으로 일인실 생활을 하게 된 제노는 호화로운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넓은 창문에 방문객을 위한 소파는 물론이고 냉장고에 티비까지 웬만한 가구는 다 들어있었다. 방 한구석에 보이는 문은 화장실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제노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커다란 꽃바구니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안에 꽂힌 카드를 잡자 난천이 말했다.
“아, 그건 태홍 씨께서 보내주신 거야.”
하긴, 난천과도 친분이 있는 갤럭시단이 이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고급스러운 종이에 음각으로 찍힌 갤럭시 사의 문양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바라보던 제노가 카드를 열어보았다.
[ 병환 중에 계시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조속한 쾌유 소식 바랍니다. ]
메시지를 읽은 제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신을 차리는 즉시 연락하라는 말 같았다. 제노가 카드를 내려놓고 난천을 바라보았다.
“저, 제 포켓기어랑 몬스터볼은요?”
“아, 그렇지. 네 포켓몬들이 널 정말 많이 걱정했어.”
난천이 제노의 포켓기어를 건냈다. 몬스터볼은 혹시 몰라 집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는 말도.
제노의 요구에 난천이 볼을 가지러 간 사이, 제노는 포켓기어를 열어 태홍에게 문자를 남겼다. 기업의 일로 바쁜 녀석이니 때가 되면 알아서 접촉할 것이다.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얼마 없는 번호들을 확인한 제노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포켓기어를 내려놓았다.
난천이 돌아올 때까지 할 일이 없어진 제노는 노트북을 깔짝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을 검색창에 쳐보았다. ‘서브웨이 마스터’. 하나지방의 유명인인 두 사람과 관련된 기사가 주르르 떴다. 딱히 상행이 실종됐다거나 하는 글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잠시 중단되었던 배틀서브웨이가 얼마 전 재가동을 시작했다는 안내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행 씨는 무사히 원래 있던 자리로 잘 돌아갔을까. 아니, 그나저나 결국 보내주겠다던 원래 세계가 여기라니, 이건 대체…
계속해서 이어지던 제노의 생각을 끊은 것은 노크 소리였다. 누군가가 병실의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아무래도 난천이 벌써 돌아온 것 같았다. 제노가 노트북 화면에 뜬 여러 기사 탭을 모두 삭제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난천 씨, 그때 조사하던 유적은-”
그리고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제노의 말문이 막혔다. 익숙한 금발, 밝은 회색의 눈.
하지만 난천이 아니었다.
그가 눈을 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주무셨나요, 이도 님?”
쿵, 쿵, 심장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맥박이 불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대답 없이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그가 의자 하나를 들고 다가와 침대 옆에 자리 잡았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찾았는지 궁금하신가 보죠?”
“….”
“후후… 지금 그 표정, 아주 마음에 드네요. 모자를 벗은 당신은 제법 표정 변화가 다양한 편이었군요?”
월로의 말에 제노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말해주었던 미래의 히스이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당신이 나타나는 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왜….”
“그거야,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쓰러트리고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죠.”
“나를 이긴다고 해서 성공할 것 같진 않은데….”
제노는 정해진 수순에 대해 말하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의식불명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 반면 상대는 건장한 덩치의 소유자. 월로 정도 되는 사람이 과연 복수하기에 가장 좋은 이 기회를 놓칠까?
제노가 포켓기어를 대충 내려놓았던 위치를 떠올리며 숨을 죽였다. 긴장을 눈치챈 것인지 월로의 미소가 진해졌다.
한 손으로 침대를 짚은 그가 제노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그가 실은 무게만큼 침대의 매트리스가 기울고, 제노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당신이 떨고 있는 게 여기까지 느껴져.”
다가오는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는다.
“가엽네요, 당신. 과연 챔피언이 당신을 도우러 올 수 있을까요?”
그가 포켓기어로 향하는 제노의 손을 잡아 내리눌렀다. 양손에서 느껴지는 압박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가 다시 입을 연 순간, 병실의 문이 열렸다.
“넌 뭐야 이 미친 새끼야!!!”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월로가 멀리 밀려났다. 쿠당탕. 의자가 함께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난천의 목소리가 저렇게 낮을 리가 없다. 자의는 아니겠지만, 월로가 몸을 비켜준 덕분에 제노는 입구 방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한 손에 몬스터볼이 여섯 개 든 벨트와, 무언가 가득 든 비닐봉지를 든 그린이 잔뜩 흥분한 채로 월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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