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두 갈래 길
실버는 비죽 내민 입술을 꾹 다물 뿐이었다. 제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뭐야 그게!”
“뭐기는, 내 맘이지. 게다가 당신 표정은 꼭 내가 졌길 바라는 것 같은데.”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번엔 제노의 입이 합 다물렸다. 그 모습에 실버의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아, 붐볼 이거 터지겠네.
“진심이야? 내가 그 자식한테 질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럼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던가!”
“싫어!”
“졌지? 진 거지? 졌으니까 알려주기 싫은 거지??”
졌네, 졌어! 제노의 도발에 실버의 얼굴이 누구 하나 물어뜯기 직전의 헬가처럼 변했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성호였다.
“알려주면 안 될까? 리그에 도전할 정도의 실력이라니, 나도 궁금한걸.”
어느새 돌아온 그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에 실버가 황급히 잡고 있던 제노의 손을 놓았다. 제가 먼저 잡아놓고 내던지듯 하는 행태에 제노의 어이가 사라졌다. 이런 싸가지없는 놈을 보았나. 그런 제노를 무시한 채 실버가 답했다.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너한테 그런 걸 알려줘야 하지?”
“이런. 그래도 집에 초대하기까지 했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실버의 날카로운 말에도 성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노가 다급하게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챔피언이야, 호연 챔피언…!”
그 말에 성호와 실버,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름 작게 말한다고 한 것인데, 아무래도 성호에게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다시 살풋 웃은 성호가 말했다.
“아무래도 저에 대해 이미 알고 계신가 보군요.”
“트레이너로서 그 지방의 챔피언을 모르고 있진 않아요.”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실버는 모르지만 말이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두 분은 어떤 관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자- 아아압.”
“그냥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사이다.”
제자라는 단어를 담는 제노의 입에 딸기를 쑤셔 넣은 실버가 대신해서 답했다. 불만스러웠지만 충분히 실버를 놀렸다고 생각한 제노는 조용히 포크를 쥐고 그것을 씹었다.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성호는 쿡쿡, 작게 웃음을 흘리며 테이블의 상석에 자리 잡았다.
“그렇군요. 우리 전부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사이’네요.”
“….”
자신이 내뱉은 말로 인해 성호와 동급이 된 실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성호가 말을 이었다.
“우선 두 분께서 주신 도움에 대해 호연지방의 챔피언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두 분께선 호연지방의 트레이너가 아니신 것 같은데, 어쩌다가 우주센터에 오시게 된 건가요?”
“난 제노를 쫓아온 건데.”
그 말에 답한 실버도, 질문한 성호도 제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분의 시선이 꽂히자 제노가 당황해 어물거렸다.
“어, 그게, 유적을 조사하러 왔다가….”
“사막유적이요? 아니면 고대무덤?”
“….”
뭔데 그게. 머릿속에 든 수많은 자료들을 한참 뒤적이다 레지 시리즈가 봉인된 장소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냥 적당히 그렇다 답하면 될 것을,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에 못 이겨 솔직하게 반응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제노는 사실대로 말하는 쪽을 택했다.
“무로마을에 있는 바위동굴이에요.”
“동굴의 벽화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런데 무로마을이면 여기서 한참은 걸릴 텐데요.”
“마그마단이 우주센터에 예고장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신이 고작 그런 일로 움직인다고?”
“내가 정의감이 좀 투철해서.”
끼어드는 실버에게 대충 답하자 표정이 볼만해졌다. 실버에게서 다시 성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호가 예의 그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확실히 범행 예고장을 보낸 건 사실이지만, 이제야 뉴스에 나오는 그 소식이 먼 곳에 있는 마을에까지 닿다니, 정보가 빠르시네요.”
절대 칭찬이 아니었다. 어쩐지 태홍의 앞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속이 안 좋았다. 입안에 남은 크림이 떫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기업을 이끄는 사람이나 그 후계자들은 다 이런 걸까.
아무튼 쉽게 넘어갈 사람은 아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제노가 입을 열었다.
“믿을만한 정보원이 있거든요.”
“정보원?”
“네, 사실 저는 갤럭시 사에 리서치 펠로우로서 협력하고 있어요.”
남을 속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실에 거짓을 교묘하게 섞는 것이었다. 처음 안 사실에 실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제노가 계속해서 말했다.
“호연지방에는 메가진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온 거예요.”
“그렇군요. 그래서 초고대 포켓몬에 관해 조사 중이신 거군요.”
성호가 그제야 납득이 가는 듯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태홍이 한결같이 딱딱한 표정으로 위압감을 조성한다면, 성호는 오히려 부드러운 태도로 시작해 상대를 방심시키는 쪽이었다.
달콤한 향기에 속았다간 용해액 속에 들어간 줄도 모르고 녹아버린다. 괜히 챔피언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니란 거군. 문득 목호 씨가 보고 싶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자신들을 마그마단과 아쿠아단이라고 지칭하는 단체에 대해서는 조사를 계획하던 단계에서부터 예의주시해 왔어요. 그런데 오늘 오전 갑자기….”
“우주센터를 점령했단 정보를 받으신 거군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 성호에 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노의 설명을 모두 들은 성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든 앞뒤는 맞췄나? 제노가 불안하게 요동치는 속을 숨기며 성호를 바라보고 있자, 오른손으로 제 턱을 문지르던 그의 얼굴 위로 다시 표정이 떠올랐다.
“아, 이런, 저 혼자 질문이 너무 많았네요. 제가 알고 있는 정보도 알려드리죠.”
처음과는 달리 진지한 눈빛. 정말로 정보를 넘길 생각인 것 같았다. 제노가 그의 얘기에 집중했다.
“유성의폭포에서 공석 박사를 납치했던 아쿠아단 일행이 굴뚝산에서 다시 발견되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운석을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하는군요. 이후 보스의 정확한 행적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워낙 조무래기들이 여기저기 포진해 있어서 말이죠.
그가 덧붙인 말에 제노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 주인공을 정해진 루트로 인도하기 위해선 악역 조무래기 같은 것들로 길을 막거나 정보를 주는 게 효과적이었다.
현실에선 피카츄의 도움으로 밀어버리고 지나가면 될 텐데 말이지. 아쿠아단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주르르 일렬로 서 통행을 막는 상상을 하던 제노가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시는 이유가 뭐죠?”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성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가 말했다.
“사실은 두 분께 계속해서 협력을 요청하고 싶어서요.”
성호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리그에 도전할 정도의 실력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성호가 제노와의 멀티배틀을 떠올렸다. 메타그로스가 사용한 지진에도 당황하지 않고 마치 예전부터 함께 싸워왔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을 맞추던 샤미드, 그리고 그런 샤미드에게 기술명을 외치지 않고 지시하던 제노.
그건 한두 해 활동한 신참 트레이너의 실력이 절대 아니었다. 그가 한 말이 사실인지는 조사를 해봐야 확실하게 알겠지만, 성호는 저 둘이라면 왠지 믿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랫동안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며 생긴 일종의 감이었다.
무엇보다 자기 포켓몬들을 애정으로 훌륭하게 키운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었다.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성호가 말을 이었다.
“호연의 챔피언으로서 이 일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두 분 같이 실력 있는 트레이너들과 함께하면 든든할 것 같아요. 괜찮으시다면-“
“그럴게요.”
“도움을, 그, 네?”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제노의 답에 성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힘이 풀린 눈매와 자연스러운 표정이 그를 제 나이대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가 멍하니 제노를 바라보는 사이, 실버가 제노에게 따졌다.
“호연지방의 일에 당신이 나서기는 왜 나서?”
“내가 정의감이 좀 투철해서.”
“….”
같은 답에 실버의 눈초리가 세모나게 변했다.
“… 같이 할 거지?”
“내가 왜?”
“뭐야, 로켓단의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섰잖아.”
“이거랑 그거랑 같아?”
“자, 잠시만요, 두 분, 로켓단과도 엮인 적이 있으신 건가요?”
정신을 차린 성호가 대화에 끼어들었으나 제노와 실버는 이미 둘만의 대화에 열중한 상태였다. 성호가 도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제노를 바라본다.
“실버, 그란돈과 가이오가가 깨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
“야돈인지 닥트리온지 내 알 바야?”
“… 그란돈은 마그마로 대지를, 가이오가는 많은 비로 바다를 넓히며 서로 싸웠다고 전해지는 고대 포켓몬이야. 한 마리만으로도 그 에너지가 엄청난데, 그런 두 포켓몬이 동시에 깨어난다고 생각해 봐.”
데워졌다, 식혀졌다, 흐물흐물 데친 시금치처럼 되어버릴걸. 사람한테 데쳐진다는 표현이 맞아? 비유하자면 그렇다고.
성호가 이번에는 실버를 바라보았다. 그가 짧게 혀를 차곤 물었다.
“합세하면 될 거 아냐.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데?”
잠시 고민하던 제노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우선 마그마단의 본부에 쳐들어가자.”
“좋아.”
“자, 잠시만요, 그만한 세력을 가진 집단의 본부를 정면 돌파하겠다고요??”
멋대로 흘러가는 대화를 멈춘 것은 성호의 목소리였다. 마치 ‘내일 아침은 팬케이크야’라는 투로 조직 하나를 궤멸시키자는 답변에 당황한 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제노와 실버가 성호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악의 조직하곤 원래 그렇게 싸우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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