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샛길 하나
“정말 강하구나, 너의 이상해꽃! 하지만 이걸로 교체야!”
제노가 다음 몬스터볼을 꺼냈다. 안에서 나온 루카리오가 발끝으로 가볍게 뛰며 몸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제노가 웃으며 말했다.
“설마 단지 빛의장막만을 위해 이상해꽃을 교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순간 에레키블이 몸을 휘청였다. 전진이 놀란 눈을 하고 에레키블의 상태를 살폈다. 저건…
“맹독이야!”
관중석에 있던 대엽이 외쳤다. 그 짧은 사이 맹독을 걸다니. 전진이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단숨에 끝내는 수밖에 없어! 기가임팩트다!”
“루카리오-”
원수갚기.
순간 섬광과 함께 루카리오가 에레키블을 스쳤다.
털썩, 한쪽 무릎을 꿇은 에레키블이 버티는가 싶더니, 이어지는 맹독의 데미지로 인해 결국 쓰러져버렸다.
일격에 상대를 쓰러트린 루카리오가 제노를 돌아보았다. 제노가 슬쩍 미소를 내비쳤다. 사용하지 않은 지 꽤 되어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멍하니 쓰러진 에레키블을 바라보던 전진이 마지막 몬스터볼을 강하게 쥐며 말했다.
“…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지. 유감스러울 정도로.”
그 말에 대엽이 눈을 크게 떴다. 전진의 입에서 배틀이 즐겁다는 말이 나온 게 얼마 만일까. 그의 푸른 눈에 강한 의지가 깃들고, 만면에 호승심이 가득했다.
이기고 싶다. 나의 포켓몬들과 함께 승리를 거머쥐고 싶다.
마치 대엽과 함께 싸우던 어린 시절처럼, 승부를 향한 열정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짜릿하게 깨워냈다.
전진이 몬스터볼을 쥔 팔을 뒤로 휙, 강하게 젖혔다가 앞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이 녀석이, 나의 마지막 포켓몬!!”
빛과 함께 나온 것은 라이츄. 파트너를 따라 기합을 잔뜩 넣은 채였다.
입은 데미지도 없고, 딱히 상성에서 불리할 일도 없으니 제노가 이대로 루카리오에게 칼춤을 지시하려던 순간, 멋대로 볼에서 포켓몬 하나가 튀어나왔다.
피카츄였다.
“피카피카피-!”
피카츄가 양 볼의 전기 주머니에서 파지직, 하고 전격을 잘게 뿜어냈다.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말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루카리오, 괜찮겠어? 하고 물으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자진해서 볼로 돌아가 버린다. 어휴, 하여간 소심해선.
“아가씨-! 피카츄 대 라이츄로 시합할 거야?”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에 기대어 선 대엽이 둥글게 만 한 손을 입가에 대고 외쳤다. 고개를 끄덕인 제노가 전진을 바라본다. 그 또한 바라던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럼. 시합 재개.”
“라이츄, 빛의 장막!”
“가까이 붙어!”
기계 음성이 울리자마자 두 사람이 동시에 지시했다. 특수공격을 약하게 만드는 빛의장막, 하지만 이쪽은 물리공격에도 자신이 있다. 라이츄에게로 잽싸게 달려든 피카츄가 꼬리를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아이언테일!”
라이츄가 그것을 똑같은 기술로 막아낸다. 타앙! 무시무시한 타격음이 울리고, 잠시의 접전 후 두 포켓몬이 모두 조금 밀려나 자세를 잡았다.
“라이츄, 백만볼트!”
“같은 전기 타입에게 백만볼트인가…!”
대엽이 감탄했다. 반감이 될 수밖에 없는 공격을 일부러 지시했다. 전격 대 전격의 힘겨루기인가. 체육관 관장으로서의 역할을 잊고 배틀에 몰입하는 모습에 대엽이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라이츄에게서 뿜어져 나온 전기를 피카츄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뭔가 달랐다. 전기가 피카츄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 숨겨진 특성이군.”
전진의 말과 함께 라이츄의 공격이 멈추었다. 전기를 한껏 흡수한 피카츄가 완전히 충전되었는지 고양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불길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였다.
“우리도 돌려주는 거야.”
“피-카!”
콰과광- 쏟아져 내린 전격이 라이츄를 매섭게 때렸다. 뒤로 밀려나며 라이츄의 발끝이 지면을 긁었다. 피카츄와는 달리 데미지를 입은 모습. 전진이 팔을 뻗으며 외쳤다.
“그렇다면 접근전으로 가는 수밖에! 라이츄, 깨트리다!”
“피카츄, 아이언테일!”
두 포켓몬이 필드의 가운데에서 부딪쳤다.
*
“자, 여기 비컨배지다.”
제노의 손에 자그마한 배지가 들어왔다. 어쩐지 관장인 전진과 색이 비슷하다. 감사합니다, 제노가 작게 인사하자 전진이 말했다.
“아니. 오히려 감사는 내 쪽에서 하고 싶어. 나도, 내 파트너도, 이렇게까지 뜨거워진 건 오랜만이야. … 잊고 있었어, 이런 감정을.”
“….”
“고마워. 우리에게 일깨워줘서.”
아니 뭐, 별말씀을…. 제노는 대답 대신 머쓱하게 제 목덜미를 문지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피카츄와 라이츄의 마지막 배틀은 눈뜨고 봐 주기 힘들 정도였다. 제노의 지시 없이도 얼마나 집요하고 야무지게 라이츄를 패던지, 쥐포켓몬이 아니라 괴력포켓몬인줄 알았다.
사실 고소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시원하게 얻어맞은 전진과 그의 라이츄는 속이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나! 이제 나랑도 싸워! 나랑 배틀하자!!”
그리고 뜨겁게 타오르는 또 한 명의 남자, 대엽이 어느샌가 관중석에서 내려와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외쳤다. 방금 막 체육관전을 마쳤는데 누가 사천왕과 시합하고 싶어 하겠냐고. 그런 제노의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대엽의 말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전진이 물었다.
“앞으로 리그에 도전하는 건가?”
“나! 나나!! 지금 당장 나와 싸워도 된다고?!”
“… 저, 일단 포켓몬 센터에 가려고요.”
그게 맞지. 제노의 말에 대엽은 그 자리에서 축 처졌고 전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지간히도 대엽을 상대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제 배를 붙잡고 있던 전진이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건넸다.
“이건….”
“내 명함.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저 녀석을 떼어내는 일도 포함이야. 작게 속삭인 그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대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듯 끼어들었다.
“뭐야?! 나 빼고 무슨 얘기해!!”
“자, 이제 너는 나를 좀 도와야겠어.”
“무슨 소리야! 나는 지금부터 아가씨를 따라 포켓몬 센터에-”
“체육관을 다시 정상 운영하려면 바빠질 테니까.”
“아, 안돼! 아가씨, 내 번호 불러줄 테니까 연락해! 팔일고오옹-!!”
제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전진이 대엽을 질질 끌고 체육관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혼자가 된 제노가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전진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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