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아르세우스: 10화
가지 않은 길
월로는 코기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예를 들어, 변치 않는 모습으로 보통의 사람들보다 긴 세월을 살며 신분을 바꾸는 방법 같은 것들.
- 챔피언 자리를 건 사천왕 대엽 대 챔피언 난천의 대결! 자, 어느덧 시합은 마지막 포켓몬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숨기며 사는 코기토와 달리, 월로는 어떤 때엔 연구자로, 또 어떤 때엔 지방의 부흥에 힘 쏟는 재계로, 그리고 어떤 때엔 신화의 해석에 열중한 학자로 사회에 녹아들었다.
매 역할에 충실한 그의 모습을 보며 몇백 년이 지나도 히스이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여인이 물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거니?
- 대엽, 여기서 초염몽에게 플레어드라이브를 지시! 두 포켓몬 격돌합니다!
월로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쳐 갔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이는 없었다. 그에 비하면 모두가 한순간에 스러질 가여운 목숨.
다만 단 하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 있다면 그 원망스러운 이방인이 한순간 보여주었던 지독한 미소다. 빛무리에 휩싸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비겁한 여자.
- 아- 초염몽, 쓰러졌습니다! 전투 불능! 역시 난천의 한카리아스를 넘길 수는 없는가!!
시간은 언제나 월로와 코기토를 두고 흘러갔다.
이제는 완전히 바뀐 히스이의 터, 거의 유일하게 옛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만난 그와 똑 닮은 어린 소녀는 난천이라고 했다. 그가 가진 트레이너의 재능은 너무나도 뛰어나서, 챔피언의 자리를 움켜쥘 정도였다.
- 다시 한번 챔피언의 자리를 지켜낸 난천! 그를 이길 트레이너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의 행보에 월로는 마음속에서 기나긴 잠을 마친 어린싹이 움트는 것을 느꼈다. 흙을 밀어내며 뻗어나간 줄기가 끝을 모르고 하늘을 향한다. 이파리들 사이로 몽우리 하나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티비에서 쏟아지는 환호 소리가 월로의 귓가를 때렸다.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음이나 마찬가지다. 화면에서 나온 빛이 비친 월로의 눈이 서늘한 기운을 띠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무심한 손길로 티비를 끈 월로가 전화로 다가갔다. 공신의피리를 찾는 트레이너가 있다는 연락. 지금쯤이면 경기를 마친 난천이 그에 대한 답장을 확인했을 때가 되었다.
“네, 월로입니다. 네네, 난천 님! 방금까지 생방송으로 보고 있었답니다! 이야, 정말 훌륭한 경기였어요!”
금세 사람 좋은 낯을 띤 월로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난천의 말에 집중했다.
피어난 꽃의 이름을 그는 무엇이라 불러야 했을까.
*
탁, 병실의 문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현재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제노와 월로 둘뿐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는 제노의 말에 그린은 끝까지 남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아무래도 월로와 단둘이 두는 게 불안한 모양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는 가디안이 나설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가 가져다준 몬스터볼을 손에 쥐어 보이고 나서야 그는 영 미덥잖다는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무슨 일이 있거든 불러, 바로 앞에 있을 테니까. 문이 닫히기 직전 그린이 말했다. 그 말에 월로가 훌쩍이는 시늉을 취했다. 아아, 저는 상대할 포켓몬이 한 마리도 없는데 말이죠! 참으로 가당찮은 억지 울음이었다.
“방해꾼도 사라졌겠다,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시는데요.”
그린과 난천이 사라지자마자 월로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코기토는… 글쎄, 그가 월로의 본성을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고민하던 제노가 입을 열었다.
“난천 씨는 월로 씨의 자손인가요?”
“예??”
일순 월로의 목소리가 커졌다. 닫힌 문 너머를 흘긋 바라본 그가 제노에게로 상체를 기울이곤 속삭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죠, 당신. 내가 누구를 만나 오손도손 결혼 생활이라도 했을 거란 말입니까?”
“아니, 뭐,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자식은 낳을 수 있고… 그리고 난천 씨를 무척 닮으셨잖아요.”
“미래인들의 정조 관념이란….”
그리고 엄연히 순서를 따지자면 난천 님이 저를 닮은 거라고요. 제노의 말을 정정하며 월로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벼운 주제를 선택한 입과는 달리 경계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여유라곤 없는 눈.
그래, 이래야지. 아르세우스의 선택을 받았다 해도 당신 역시 한낱 인간.
월로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으신 게 없으시다면 제가 질문할까요? 호수의 세 전설의 포켓몬들은 어떻게 하셨나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제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내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단순히 떠본 것이라고 해도 이미 반응을 보여버렸다. 월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이쪽이 너무나도 불리했다. 제노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월로가 말했다.
“놀라셨나요? 유능한 상인은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아는 법이랍니다.”
“….”
또 그 소리. 대답하지 않는 제노를 대신해 월로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시네요. 전설의 포켓몬을 세 마리나 잡으시다니, 그건 역시 마지막에 보여주신 그 포켓몬의 힘일까요?”
“….”
“은하단에게 세 포켓몬을 넘긴 건, 역시 빨강사슬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사람들과 협력하고 계시네요.”
“… 진짜 묻고 싶은 게 뭐야.”
차가운 호수와도 같은 시선이 그를 꿰뚫으며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제노는 월로가 질문이 아닌 확인을 하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른손에 든 몬스터볼을 강하게 쥔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지금 이 자리, 같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치워버려야한다.
해야만 하는 일이야. 하는 수밖에 없어.
까드득, 볼의 표면을 긁는 손 위로 커다란 온기가 느껴졌다. 월로의 손이었다. 제노가 깜짝 놀라 손에 힘을 조금 풀자, 그가 그것을 잡아 왔다. 조금 거친 손바닥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런 무서운 눈 하지 마세요. 제가 정말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우리, 협력하는 건 어떨까요?”
“네?”
협력. 월로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온건한 단어에 제노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런 수상한 단체보다는 제 쪽이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거기에 공신의피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저죠.”
“….”
“무슨 이유에서인진 몰라도 당신은 아르세우스를 만나고 싶어 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
월로가 한 손 검지를 치켜들며 특유의 포즈를 취해 보였다. 가늘게 휜 눈매 사이로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당신의 가족이나 난천 님께는 말할 수 없는 일인 거죠? 하지만 저라면 괜찮아요.”
제가 이도 님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게요. 그 말에 제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맞닿은 손을 타고 맥박이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그의 목적은 아르세우스를 지배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하지만 아르세우스를 만나 원래의- 이 게임 바깥의 세계로 가고 나면 이곳이 어떻게 되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않아? 여차하면 공신의피리만 빼앗은 다음 없애버리면 될 일이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든 희생하기로 마음먹었잖아. 제노가 월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제 손가락을 그러쥐는, 작지만 확연한 힘에 월로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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