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아르세우스 1화
가지 않은 길
· 샛길 하나에서 이어지는 if 세계입니다.
신오지방, 때는 난천과 신오 이곳저곳의 유적지를 탐사하던 시기.
“수고했어, 한카리아스.”
“너도 돌아와.”
제노의 부름에 샤미드가 몬스터볼 안으로 들어간다.
난천과 제노는 동굴 속에서 마주한, 알 수 없는 이유로 폭주하는 야생 포켓몬을 힘으로 제압하였다. 난천이 복잡한 표정으로 쓰러진 마기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어째서 이렇게나 흥분한 야생 포켓몬이 유적지에 있는 걸까.”
“글쎄요.”
제노가 가볍게 답하며 상처약을 들고 마기라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때, 위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고개를 들어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자,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노의 눈이 커졌다. 곧장 뒤로 돈 그가 난천을 밀어냈다.
“무슨-!”
난천의 말은 이어진 굉음에 묻혀버렸다. 격렬한 싸움의 여파로 갈라진 동굴의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밀려 넘어진 채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난천이 제노의 이름을 외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떨어진 바위들이 돌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
우웅-
귓가를 울리는 기묘한 소리에 제노가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지? 나, 돌덩이에 깔려 죽은 건가?
그 질문에 답하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곳은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 나의 우주….
“뭐, 뭐야, 누구세요?”
제노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 내 이름은 아르세우스. 그대와 같은 인간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지.
퍼져나오는 빛무리. 시선을 잡아끄는 경외로운 광원이 어떤 포켓몬의 실루엣을 띠고 있다. 목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 나갔다.
제노는 이러한 전개를 알고 있었다. 거짓말이겠지, 설마, 설마….
“모든 포켓몬을 만나도록 해라. 그리하면 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저기요, 제가 왜-”
“그리고 너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세계’. 그 단어에 제노의 눈이 절로 커졌다. 그가 사라져가는 빛을 향해 외쳤다.
“잠깐만, 원래의 세계라니? 원래의 세계라는 건 대체-”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광휘가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발 아래가 꺼지는 느낌도.
“아니, 자, 자, 잠깐, 잠까안!!”
으아아아—!!! 우렁찬 비명과 함께 붕 떠 있던 몸이 추락한다. 반사적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던 제노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업.”
으으, 이게 무슨 소리지….
“웨이껍!”
“허억!”
제노가 숨을 들이켜며 눈을 부릅떴다. 볼에서 느껴지는 까슬한 감촉, 모래였다. 서서히 되찾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직 어린 포켓몬 세 마리였다.
“당신, 살아있습니까?!”
시선을 위로 올리자 그 포켓몬들 뒤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아마 그가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노는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러자 수상한 말투만큼이나 수상한 의상을 입은 남자가 제노에게로 다가왔다. 겉에 보이는 박사 가운이 아니었다면 벌써 도망가고도 남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하늘에서 떨어져서 놀랐습니다만… 다행히 살아있는 것 같군요!”
“저기, 그쪽은….”
“웁스, 쏘리! 제 이름은 라벤, 포켓몬 박사입니다.”
라벤이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제노의 옷차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뭐라 말하기 어려운 기묘한 차림새군요.”
그 말에 제노가 자신을 살폈다. 난천과 조사를 하던 차림 그대로였다. 라벤이 물었다.
“흐음… 당신, 이름이 뭐죠?”
“아, 그, 제노입니다.”
“아·그·제노라니, 신비한 이름이군요.”
“… 제노입니다.”
박사가 농담이라며 와하하, 웃었다. 제노는 얼굴이 썩어들어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박사님들의 개그 코드는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다 이런 걸까.
“이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형식의 이름이군요… 혹시 당신도 저처럼 다른 지방에서 온 건가요?”
“….”
제노는 순간 고민에 빠져 답하지 않았다. 이걸 다른 지방에서 왔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러자 박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설마 하늘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메모리를 잃어버린 겁니까? 아는 사람은요? 갈 곳은 있습니까?”
“….”
있겠냐? 제노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라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흐음- 앓는 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하던 라벤이 시원하게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둘 순 없습니다! 저와 함께 마을로 가죠!”
그렇게 말한 그가 갑자기 제노에게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두 눈이 반짝거렸다. 뭐야, 부담스러워. 눈을 깜빡이고만 있자 박사는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그 전에 말입니다! 분명 ‘제노’라고 하셨죠? 사실 제 이름도 그렇지만, 너무나도 외지인 같은 이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의를 구하듯 묻는 것에 제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마을의 사람들은 외지인을 그다지 반기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제노 양의 외견은 이곳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죠!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여기서 사용할 새로운 이름을 지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사실 포켓몬 도감을 만들면서 여기 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라벤이 해맑게 웃었다.
그게 본심이었군…. 박사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된 제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니고,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었다.
“흐음, 제노, 제노… 바깥의… 외부의, 바깥… 다른 사람, 다른 생각, 다른 길….”
그가 동의하자 박사가 혼자 중얼거리더니, 이내 두 손바닥을 짝, 맞대었다.
“그렇지, ‘이도’는 어떻습니까? 원래의 이름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당신도 익숙해지기 쉬울 것입니다!”
“네, 뭐… 감사합니다.”
제노가 빠르게 수긍하자 박사의 낯이 환해졌다. 그가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자아, 그럼 이도 양, 제가 축복마을로 안내를- 오! 나의 귀여운 포켓몬들! 어째서 또 도망가는 겁니까?!”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얌전히 듣고 있던 세 포켓몬들이 우다다,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박사가 설명을 하다 말고 절규했다. 그가 울상이 되어 제노를 바라보았다.
“도망친 포켓몬들을 쫓아가죠! 거기 서십시오~!”
라벤 박사가 헐레벌떡 포켓몬들이 지나간 방향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작게 한숨을 내쉰 제노가 그 뒤를 따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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