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두 갈래 길
많은 사람들이 회장을 채우고 있다. 특징적인 스타일을 가진 관장들을 제외하면 전부 모르는 얼굴들이다. 아마도 협회의 높으신 분들이나 그 관계자들이겠지.
협회의 의사를 전달하며 성호가 알려주길, 감사의 의미로 표창장 전달이 있을 거라고 했다. 제노는 사색이 되어 말했다. 제발 저는 빼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빈 덕일까, 표창장의 주인공은 휘웅과 봄이 두 사람이 되었다. 마치 부모님의 옷을 빌려 입은 어린아이처럼 어색한 몸짓으로 단상에 올라서는 모습이 제법 볼만했다.
두 어린 영웅들과 동시에 각 도시를 지킨 관장들의 수고를 치하하고, 호연의 무사를 축하하는 자리. 그 거창한 명목 아래 열린 파티는 바다로 둘러싸인 지방답게 거대한 크루즈에서 이루어졌다.
솔직히 제노에게는 돈지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협회가 공적을 가져가는 대신 재주부린 트레이너들을 달래보자는 꼴.
허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어떤 높으신 분의 입 발린 연설이 끝나고 마이크는 휘웅에게로 돌아갔다. 그 순간 모든 카메라의 렌즈가 그에게로 향했다. 플래시가 사방팔방에서 매섭게 터졌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질문을 쏟아냈다.
“가이오가를 포획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자취를 감춘 아쿠아단과 마그마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신으로 그들을 와해시킨 게 맞습니까?”
“아, 저기….”
찰칵찰칵, 요란한 잡음 사이로 한 기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전해진다.
“앞으로 호연의 트레이너로서 목표가 있다면요?”
그 말에 당황하고만 있던 휘웅의 기세가 달라졌다. 눈에는 총기가 돌고, 미소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모두가 조용히 그의 발언을 기다리고, 휘웅이 입을 열었다.
“저, 계속해서 강해질 거예요. 그리고 호연의 정점에 서는 것이 목표입니다!”
정점. 그 단어에 모든 카메라가 이번에는 현 챔피언에게로 향했다. 공개적으로 도전을 받은 성호가 미소 지으며 휘웅을 바라보았다. 모험을 하고, 계속해서 위를 추구하는 트레이너 특유의 기백이 두 눈에 서려 있었다.
쏟아지는 플래시 사이에서도 여유를 유지한 그가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데. 네가 도전하러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
챔피언의 그 호기로운 답에 회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이번에는 성호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노는 내부가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문을 살짝 열었다. 복도로 향하는 그를 따라 실버가 귀신같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어디 가?”
“어디 가긴,”
밥 먹어야지, 밥. 회장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커다란 홀을 떠올린 제노가 비장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넓은 홀 안에서는 클래식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제노가 빈 잔을 허공에 들자 서버가 다가와 그것을 받아 갔다. 대신 새로운 잔을 자연스럽게 집어 든 그가 곧장 내용물을 입에 대었다.
샹들리에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 액체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크으, 입안에서 터지는 탄산에 제노가 감탄사를 내뱉자 곧장 실버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맥주도 아니고, 무슨….”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
“성인이라고.”
아 맞다. 문득 상기된 사실에 제노가 실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또한 손에 잔을 들고 있었지만, 전혀 입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안 마실 거면 내놔, 이 자식아.
시선을 이기지 못한 그가 입술을 살짝 적시듯 아주 조금 맛을 보았다. 맛에 집중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결국 근처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조금 갑갑한지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코디를 해준 윤진이 보았다면 기겁을 했을 장면이었다.
“역시 별로야.”
“그러니.”
대충 답한 제노가 느릿하게 고개를 젖혔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오니 발밑은 붕 뜨고 시선은 흐릿했다. 시야에 들어온 조명이 꼭 별처럼 빛났다. 주변의 소리가 희미해지고, 홀로 붕 떠 있는 기분. 그러나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다.
제노는 딱 이 정도의 몸 상태를 아주 좋아했다. 여기서 더 마셔도 즐겁겠지만, 이런 자리에서 필름이 끊기는 불상사를 겪고 싶진 않았다.
느릿느릿, 제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이번에도 실버가 물었다.
“어디 가?”
“화장실.”
그 답에 따라붙으려던 실버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무래도 여자 화장실까지 따라올 순 없겠지, 응. 제노가 조금 들뜬 발걸음으로 혼자 어디론가 향했다.
금방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고 멀어지는 그의 등을 실버가 불안한 눈빛으로 좇았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꿈결처럼 멀어진다. 제노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했다. 느껴지는 밤바람이 시원했다. 열기가 식으며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
별이 가득 수 놓인 밤하늘 아래. 종종걸음으로 향한 뱃머리에는 운 좋게도 인적이 거의 없었다. 난간에 기대어 선 제노가 온몸으로 바다 내음을 만끽했다.
그리고 꼭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그를 잡는 누군가가 있었다.
허리를 감싸오는 손길에 바짝 소름이 돋았다.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성호가 서 있었다.
“위험해요.”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살풋 웃어 보인 그가 제노의 옆에 자리 잡았다. 아무래도 그 또한 인파를 피해 이곳까지 오게 된 것 같았다.
다시 조용히 흔들리는 수면을 바라보는 제노에게 그가 물었다.
“이제 하나지방으로 떠나실 건가요?”
“….”
그 말에 제노는 난천과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공신의피리를 확인시켜 주는 조건으로 그가 건 것, 하나지방에서 열리는 포켓몬 월드 토너먼트의 참가.
대체 피리와 토너먼트가 무슨 상관이 있나 싶은 제노로서는 작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난천이 작게 웃었다.
- 그곳에서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릴게.
난천이 통화를 끊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목적인 피리를 확인하면 떠나버릴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회상을 하느라 질문에 답이 없자 성호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짓는다.
짧은 시간 성호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는 모르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포켓몬 월드 토너먼트나 하나지방에 대한 것도 전부 혼자 조용히 알아본 것인데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도 그랬다. 케이크에 도넛, 사블레에 파이까지. 분명 혼잣말처럼 먹고 싶다고 중얼거린 것인데 일을 마치고 저녁에 돌아온 성호가 꼭 그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성호가 사 온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안고 먹으며 제노가 말했다. 성호 씨는 강철/에스퍼 복합 타입인가 봐. 모든 얘기를 들은 실버는 들고 있던 수저를 떨구곤 기겁을 하며 온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감시당하고 있단 거잖아!
참고로 거의 모든 가구며 구석을 뒤졌지만 도청기 같은 건 없었다. 옆에서 말리던 제노의 코만 호되게 꼬집히는 결과가 있었다.
다시 찾아온 침묵에 이번에는 제노가 입을 열었다.
“성호 씨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에요?”
“무엇을요?”
“챔피언 자리 말이에요.”
충분히 도전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아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제노의 시선은 꿋꿋이 바다 너머를 향한 채였다. 잠시 고민하던 성호가 답했다.
“받아들여야죠, 챔피언으로서.”
“그러다가 지게 되면요?”
“그럼 더 이상 챔피언이 아니라, 평범한 한 명의 트레이너로 돌아가게 되겠죠.”
제노의 속과 달리 성호의 대답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제노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질문의 저의를 가늠하던 성호가 물었다.
“챔피언이 아닌 저는 싫으신가요?”
“네?”
“아니, 혹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제가 성호 씨를 왜 싫어해요.”
“그럼 좋아해요?”
“….”
장난 같은 질의에 드디어 이쪽을 바라보곤 가늘어지는 제노의 눈을 확인한 그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 청량한 웃음소리는 챔피언도, 데봉 코퍼레이션의 후계자도 아니라 그의 말대로 평범한 트레이너 나성호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한참 숨을 내쉬던 성호가 다시 조용히 시선을 보냈다. 제노가 마주 바라본다. 어두운 밤에도 흔들림 없이 빛나는 눈. 물결이 잔잔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 지지 않아요.”
거짓말이다. 이 남자는 결국 지게 된다. 주인공에게.
제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여름이 떠나는 게 두려우시군요.”
“….”
“원하신다면 제가 영원히 이 호연의 여름을 안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곤 천천히 손을 움직인다. 제노의 왼손으로 뻗어진 그것이 허락을 구하듯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간질이다가,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전부를 잡아 왔다.
성호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반지의 형태를 띤 그것에 붙은 작은 돌이 오묘한 빛을 띠었다. 키스톤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결국 그것을 제노의 검지에 끼워 넣었다. 마치 재기라도 한 듯 안쪽까지 확실하게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그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의 입술이 손등을 스치고,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본다.
“토너먼트에는 저도 참가할 겁니다. 제노 씨의 앞에 다시 설게요. 챔피언의 지위로, 당당하게.”
“….”
“그러니까 당신은 대답만 준비하면 됩니다.”
그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에는 자신 있어요.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두 눈에, 두 뺨에 여름의 열기가 담겨있었다.
“결국 제일 강한 것은 저일 테니까.”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제하시면 보관함에 소장 가능합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