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우산으로, 진눈깨비는 무엇으로
수학 문제 안 나오는 이유... 그렇게 됐습니다.
/ 이번 글에는 캐릭터의 과거 서사와 관련하여 트리거가 눌릴 수 있는 부분(학교폭력에 대한 묘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안 나가면 영원히 집 밖으로 못 나간다.’
…라는 생각이 드는 날. 그래서 침대랑 붙으려는 몸을 이끄고 어떻게든 나가게 되는 날. 집순이에게는 그런 날이 있다. 뭐, 아닌 사람들에게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런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방 안에 있는데도 기운이 없어 며칠간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고 나서야 발생한다. 조금 부풀려 말하자면 그건 차라리 이렇게 영원히 누운 채로 있고 싶다는 무의식 저 깊은 곳의 생각으로부터 일어난 엄청난 반동이나 다름없기에. 모란은 그래서 오늘, 언제 나가기 싫어했냐는 듯 자연스레 외출 준비를 마쳤다.
“다녀올게.”
“갑자기 어딜 가려고?”
“…모르겠어.”
“그게 뭐야? 아무튼 알았어. 어딜 가든 조심히 다녀와.”
“응. 고마워.”
굳이 문 앞까지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는 언니를 뒤로 하고 모란은 집을 나섰다. 뒤를 돌아보기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모란을 바라보고 있어, 그는 입모양으로 빨리 들어가. 라고 하며 가라고 손짓했다. 모란은 가끔 그런 언니(사실 언니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가 부담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어딜 가는지도 모르는데 행선지를 굳이 묻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나를 믿고 있기 때문이겠지.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부 동반 여행, 동생의 난데없는 외출로 집에 혼자 남겨지게 될 그가 모란은 잠시 걱정되었지만 머뭇거리면서도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역까지 가서… 그러고 나서 어딜 가지?’
어딘가에 가려고 나가는 게 아니라 나가지 않으면 영원히 못 나갈 거 같아 하는 외출에 목적지 따위가 존재할 리 없었다. 그래서 모란은 공중날기택시 대신 가라르철도를 이용하길 택했다. 일단 역에 도착하고 나서 어딜 갈지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이건 뭐 드라마에서 갈 곳 잃은 주인공이나 하던 짓 아니었나. 모르겠다. 모란은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끊어내고 기계처럼 역까지 걸어갔다. 마치 지금 어디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냥.
역에 도착한 모란은 개찰구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 엔진시티로 향하는 열차를 타기로 했다. 마침 지금은 체육관 챌린저나 관광 등으로 바쁠 시기는 아니니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좋지만 그보다도 하염없이 돌아가고 있는 톱니바퀴나 기계의 움직임을 볼 때 더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었다. 가라르 최대의 공업 도시인 엔진시티는 그야말로 그에게 한가롭게 구경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바퀴 돌아보기만 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돌아다니기만 하면 금방 지치니까 겸사겸사 배틀카페에서 쉬면서 달달한 디저트도 좀 먹고.
열차에 올라탄 모란은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 걸터앉아 잠시 한숨을 돌렸다. 집에서 역까지 걸어오는데도 벌써 이렇게 지치다니. 이러다가 나중에 기숙사에서 반까지, 반에서 식당까지는 어떻게 다니려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며 모란은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서야 평소보다 날이 흐리다는 걸 알아차렸다. 구름이 많이 끼지는 않았지만 맑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잠시 창문 너머를 슥 훑어보곤 모란은 눈을 감으며 등받이에 푹 몸을 기댔다.
‘뭐, 괜찮겠지.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는 안 했으니까.’
*
안 괜찮았다.
모란은 나가기 전 일기예보를 확인할 정도로는 철저했지만 언제 어디서든 비가 올 때를 대비하여 우산을 갖고 다닐 정도로 철저한 사람까지는 아니었다. 그런 자신의 어중간한 철저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엔진시티 역에 도착하자마자 거짓말같이 우레와도 같은 빗방울이 그를 반겼다. 이건 뭐 내가 패리퍼도 아니고… 밖엘 나오자마자 비가 온다고? 당장 쾌청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엔진시티의 역에서 모란은 잠시 패닉 상태였다.
당연하지만 일기예보가 절대적으로 맞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서 기상 변화 예측 기술이 정확해진다고 한들 그게 백 퍼센트가 될 수는 없었다. 오늘 비가 올 확률은 하이드로펌프가 맞지 않을 확률 정도 되었을까? 아니면 번개?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상대적으로 희박했을 확률이 적용했다는 게 모란은 배틀에서 공격이 빗나갔을 때만큼 분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자신은 엔진시티역에 와 있고, 그는 안정적으로 명중률 100%인 기술만 가르치는 트레이너는 아니었다.
모란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첫째, 어디에서 사든 누구에게 빌리든 해서 어떻게든 우산을 구한다. 이러면 좀 불편하긴 해도 돌아다닐 수는 있다. 둘째, 집으로 돌아간다. 비가 갑자기 와서 그냥 돌아왔다고 하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다. 셋째, 그냥 맞으면서 다닌다. 이건 자신이 생각하고도 우스워서 머리에서 바로 지워버렸다. 방에 누워있는 게 좋지만 감기에 대차게 결려 방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 남은 건 역시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거나 집에 돌아가나인데…
‘귀찮겠지만 언니한테 역까지 마중 나와달라고 하면 되니까… 역시 번거롭지만 그냥 돌아갈까.’
마침 내리는 비, 마침 내리는 눈, 마침 그닥 좋지 않은 날씨를 신이 내린 타이밍, 허울 좋은 핑계 삼아 외출을 미루거나 나갔다 돌아오는 일은 집순이들에게는 흔하다 못해 밥 먹듯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언제나 그랬듯 그냥 그러고 다시 안락한 집의 편안한 방의 포근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또 언제쯤 나갈 수 있지?’
지금 나가지 않으면 또 한참 동안 나가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은 자신 같은 사람에게 흔하게 있기는커녕 일년에 한번 들까말까하면 다행일 정도였다. 보통은 그런 계시라도 받지 않으면 약속이 없는 이상 나가려 하지 않는 것이 집순이의 특징이었다. 기껏 신내림 받듯 외출내림을 받았는데… 이러면 또 한동안 밖으로 안 나갈 거잖아. 고민하던 모란의 눈에 역 안의 우산 판매대가 눈에 들어왔다. 자주 오지는 않았어도 엔진시티역에선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 갑작스레 내리는 비에 급하게 꺼내놓은 게 분명했다.
역시 저기서 우산을 사서 쓰고 돌아다닐까.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비가 와서 걷기가 싫었다. 누가 들으면 그래서 대체 어쩌자는 건데? 싶은 마음이었다. 기껏 외출했는데 다시 돌아가긴 아깝다. 좋은 날에 다시 나가려니 그때쯤 되면 왜인지 다시 나가기 싫어질 게 뻔하다. 그렇다고 밖을 돌아다니자니 별로 세찬 비가 내리는 거리를 오랫동안 걷고 싶진 않았다. 우산을 쓴다 해도 어쩌다 무언가에 맞아 튀기는 빗물과 방심하는 순간 밟게 되는 물웅덩이까지 막을 수는 없다. 모란은 그 부분이 제일 별로였다.
왜 기술이 이렇게까지 발전했는데 비를 막을 수 있는 도구는 아직도 우산밖에 없는 거지?
전부 아니면… 그냥 별로 내키진 않더라도 다른 곳으로 갈까. 공업 도시는 아니더라도 큰 도시라면 너클시티나 슛시티도 있다. 일기예보를 보고, 가라르 전역에 갑작스레 비가 내리는 걸로 확인이 된다면 돌아가고 아니면 비가 오지 않는 곳을 찾아 그리로 이동해야겠다. 모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마트로토무의 타운맵을 켰다.
❂ 엔진시티
포켓몬센터
부티크
헤어살롱
엔진시티역
엔진스타디움
꼬몽울비즈니스호텔
가라르의 타운맵은 참 친절도 하다. 도시명 아래에 뭐가 있는지를 바로 다 표시해주다니. …아니, 친절한 게 아니라 내겐 이쪽이 기본값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렇다. 내가 그새 낯선 것에 익숙해진 탓이다. 모란은 차분하게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타운맵에 비친 글자들 중 맨 아랫부분에 모란이 간과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꼬몽울비즈니스호텔
호텔… 잊고 있었는지 굳이 선택지에 넣을 필요가 없었는지는 몰라도 들어간다면 분명 방 침대에 앉아서 배틀카페에서 쉴 때 쓰려고 가져온 노트북이나 할 게 뻔했다. 그러면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지 집에 있을 때랑 별 차이가 없다. 그 사실을 모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모란은 이때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새로운 선택지에 마음이 끌렸다. 집 밖에 나가서 실내에만 있는 것도 나름 외출이라면 외출 아니야? 그 역시 정말 집순이다운 사고방식이었다.
빗속을 오래 걸어다닐 필요도 없고, 굳이 걸어온 시간 아깝게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이미 처음 나왔을 때의 목적이었던 ‘구경하기 좋으니 엔진시티로 간다’라는 목적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실 모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로 향하는 데에 무슨 이유를 붙이든 그건 외출하기 싫을 때 날씨 핑계 대는 것만큼 허울 좋은 짓이라고. 그냥 이렇게 집에만 있다간 집 안이 주는 안락함에 영영 매몰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가라르로 돌아오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다른 TV 채널에서 재방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싫었다. 아니, 이쪽이 본채널인가? …어쨌든 단지 그뿐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판매대에는 기분 좋게도 사랑하는 이브이들의 얼굴이 잔뜩 그려진 우산을 팔고 있었다. 어, 뭔가 저걸 쓰면 계속 맞는 것까지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잠깐 빗방울이 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 기분? 모란은 그 길로 모든 생각을 접고 우산을 사서 엔진시티역 밖으로 나가 바로 꼬몽울비즈니스호텔로 향했다. 일단 한번 가고자 하는 곳을 정하고 나면 오로지 그 길로만 달려나가는 건 그가 가진 좋으면서 나쁜 습관이었다.
*
‘감사합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은 모란은 대체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감사를 전했다. 체육관 챌린저가 있을 때가 아니라, 관광 성수기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비수기와 비의 이중창으로 호텔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그는 빈 방이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은 건 단순했다. 그냥 여기 있다가 한숨 자고 날이 밝는 대로 집에 돌아가면 된다. 가방에 간식거리를 잔뜩 넣어왔으니 딱히 허기질 일도 없었다. 그러면 그야말로 외출 아닌 외출 같은 외출의 완성이다.
모란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베개에 등을 기댄 채 침대에 앉았다. 스마트로토무에 문자가 와 있었다. 언니였다.
방금 TV를 봤는데 갑자기 전국에 비 소식이 있더라.
어디 있는진 모르지만 거긴 괜찮아?
지금 여긴 딱 맞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만 내려.
모란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
나 지금 엔진시티에 있어. 비 많이 와.
일단 실내로 들어오긴 했는데 지금 돌아갈 생각은 없어.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돌아갈게.
그야말로 막무가내인 답장에 바로 알겠으니 내일 보자는 말이 날아왔다. 언니야 괜찮지만 다른 쪽은 비 오는 날에 밖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여러 의미로 놀라워할지도… 벌써부터 그 모습을 생각하자니 저절로 피곤해져 모란은 고개를 저었다.
빗소리가 은은하게 창문을 강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마음을 불안하게 하던 소리가 어쩐지 안정적으로 들렸다. 역시 우산 같은 도구로는 절대 사람을 언제 비를 맞을지 모르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 지금은 도구가 아니라 장소가 필요하다.
그새 좀 걸었다고 체력이 바닥났는지 배고파져 모란은 가방을 열어 노트북이랑 간식을 꺼냈다.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중간중간 뭘 먹으면서 게임을 하거나 재밌는 영상을 볼 생각이었다. 그냥 이렇게만 있으면 너무 집이랑 똑같으니 창문 너머 경치도 좀 구경하다 TV를 보거나 책을 읽든가 음악도 좀 틀어놓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가방을 닫으려는데 모란의 손에 무언가가 탁 걸렸다.
‘응?’
낯선 느낌에 가방을 열어 확인해보니 안주머니에 책 같은 윤곽이 있었다. 간식 사이에 파묻혀 있어 그게 안주머니에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안주머니를 열어 자세히 보니, 조금 구겨진 언어학 문제집이었다. 나갈 준비를 대강 하느라 가방에 이미 뭐가 들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대강 간식이랑 노트북이랑 쑤셔넣은 탓이었다. 근데 뜬금없이 이 가방에 문제집이 왜 들어있는 거지? 생각하다 모란은 잠시 덜그럭거리는 느낌에 머리를 이중으로 쌓아올린 베개 쪽으로 푹 기댔다.
‘생각났다. 이거, 왜 여기 있는지.’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모란에게는 못하는 과목이란 게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이과보다는 문과 쪽 과목이 부족해 그는 가끔 언어학 문제집을 사서 풀곤 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턴가… 문제집을 펴놓고 나갔다 자리에 돌아오면 원치도 않고 허락하지도 않은 낙서들이 빈 부분을 메우고 있었다. 써 있는 말도, 쓴 사람도 전부 달랐지만 결국 그들의 의도는 하나였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넘길 수 있었지만 갈수록 넘기기 힘들어졌다. 결국 언젠가부터 자리를 비울 때마다 책상 위에 있던 걸 전부 가방에 넣어놓고 나갔고, 그래도 낙서들이 사라지지 않자 다음부터는 아예 페이지를 찢어버렸고, 그러다 결국 지쳐서 푸는 것도 그만두고 눈앞에 있는 것 자체가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힘들어질 때쯤 모란은 안주머니에 아예 그걸 처박아버리고 지퍼를 닫아버렸다. 차마 쓰레기통에 버리지는 못했다. …가지고 있으면 무언가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증거만 남겨두면 문제의 해결이 가능할 거라는 건 지나치게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고, 있으나 마나한 물건이 되어버린 문제집은 결국 몇 번 그의 손에 들렸다가 다시 가방 속으로 처박혀버렸다. 그렇게 그는 문제집 혹은 증거의 존재를 잊어버렸고, 아니 잊어야만 했고, 그렇게 모란은 별로 되새기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아직 통째로 가방에 들어있다는 것도 모른 채 가라르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지금.
모란은 그 문제집을 펼쳐서 보고 있다.
‘이걸 보고 있는데도 아무렇지가 않네.’
괜찮아진 걸까, 무뎌진 걸까, 아니면 둘 다인 걸까. 어쨌든 그 때의 기억이 예전만큼 자신을 힘들게 하지는 않는다는 데에 모란은 안도했다. 그는 찬찬히 문제집을 뜯어보았다. 확실히 공부라는 걸 안 하고 산 지가 꽤 되었다. 정확히는 지금은 완전한 자의고 그때는 공부에 신경쓸 정신이 없었던 거지만. 뒤쪽의 기나긴 지문들을 보자니 머리가 어지러워 모란은 무심코 앞쪽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형광펜으로 표시해놓은 문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어진 보기는 짧은 문장이었다.
1. 다음은 소설 <무제>의 일부이다. 문맥 상 밑줄 친 부분이 뜻하는 바로 옳은 것은?
< 보 기 >
그 사내 눈에 어두운 불꽃을 이글거리며 오직 하나의 정의를 행하기 위해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막는다.
1) 어떤 일이나 행동을 못 하게 하다.
2) 어떤 현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다.
3) 어떤 대상에 미치지 못하게 하다.
4) 외부의 공격이나 침입 따위에 버티어 지키다.
아, 이건 망초 씨의 소설이다. 평소에 소설을 즐겨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고 해서 어쩌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본 기억이 있다. 하나지방의 사천왕인 그가 자신의 도전자들을 소재로 하여 단편집처럼 하나로 엮어서 낸 책에는 특이하게도 아무런 제목이 붙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무제.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묘사와 사천왕의 도전자들이라는 독특한 소재 덕인지 그 책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빠르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명해지다 못해 이제는 문제집에 지문으로 나올 정도가 되었나.
그나저나 보기도 그렇고 선택지도 그렇고 문제가 전체적으로 모호한 거 같다. 그래서 답 체크도 없고 형광펜으로 표시를 했나? 신뢰성 있는 기관에서 낸 문제집인지는 보지도 않았지만. 망초 씨의 소설 자체에는 당연하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굳이 이 부분을 보기로 쓴 이유도 밑줄 친 단어가 꼭 저것이어야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너무 복수 정답으로 읽힐 소지가 많지 않나?
대부분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거나 많아도 몇 개로 제한되어 있는 수학이랑은 다르게 언어학은 이해만 되는 해석이라면 뭘 정답이라도 해도 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가 되는 해석’이라는 부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갈리기에 가장 보편적인 답을 하나 정해놓는 거겠지. 결국 정해진 답을 도출하는 게 아니라 나올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답들 중 가장 많은 사람들, 혹은 그 분야의 권위자들이 이거라고 말하는 데에 체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란은 수학보다 언어학이 어려웠다.
‘비파 언니나 피나라면 몇 번이 답이라고 했을까?’
어쩌면 수학이 아니라 언어학에는 나보다 조금 더 능통했을 수도 있는데. 당연하지만 그들과 말할 기회는 내가 나에게서 스스로 빼앗았고 모든 걸 정리하고 돌아와버린 탓에 이제는 내 주변 어디에서도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모란은 문득 처음 그 둘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던 때를 떠올렸다. 나를 포함한 우리 셋은, 여러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치자면 그거였다. ‘우등생이라면 소외될 리 없잖아.’의 걸어다니는 반증. 학생회장, 팔방미인, 그리고 천재.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소외되는 데에는 본인의 능력 따윈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공부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 둘은 학교에 안 나가도 공부는 계속 하고 있는 거 같던데.’
물론 지금은 아카데미에 다시 다니고 있을 테니 어쩌면 전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다른 친구들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하겠지? 그들이 다시 무사히 학교에 적응해서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는 것만큼 그가 바라는 건 없었다. 때로는 평범한 게 제일 어렵다. 우리 모두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학교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나도 돌아가면 그렇게 해야지. 다시 학생식당에서 밥도 먹고, 운동장에 서서 이야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책도 빌리면서.
‘그래서 이 문제, 진짜 답이 뭐지?’
모란은 뒤쪽의 해설지를 보려 했으나 답과 해설이 전부 담긴 소책자가 문제집에서 빠져 있었다. 이건 잃어버렸거나 떨어트렸거나 둘 중 하나겠지. 결국 영영 여기서는 이 문제의 답을 뭐라고 체크해놨는지 알 수가 없다. 뭐, 상관없나. 어쩌다 우연한 계기로 좋지 않은 옛 생각이 나서 그 반동으로 문제에 잠시 빠져들었을 뿐이니까. 그곳에 매몰되어 있는 건 지금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소중한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 곁으로 돌아갈 테니 다시 함께한다면 괴로운 기억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문제집을 덮으려던 순간,
다른 페이지가 펼쳐지며 모란의 눈에 한 문제가 들어왔다.
마지막. 다음은 카시오페아가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 대신 남긴 말이다. ㄱ~ㄹ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로 옳은 것은?
< 보 기 >
이걸로 끝내자. 스타 대작전 때문이야… 우리가 너무 심했어… (중략) 그렇지만, 그 뒤로 그 애들 모두 기겁하면서 도망가 버렸잖아. 문제가 너무 커졌어. 아카데미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ㄱ.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스타단을 시작한 것도 나고 모두를 휘말리게 한 것도 나니까. ㄴ. 그러니까 내가 책임을 지겠어. 이제 괴롭히는 애들도 없으니까 다들 학교에 다니도록 해.
(너는 어쩔 거냐는 질문에) ㄷ.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어… 너희에게는 정말 감사해. 현실에서 만난 적도 없는데 나한테 상냥하게 대해 주고… (말투가 꼭 작별하는 사람 같다는 말에) ㄹ.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안녕, 고마웠어.
1. 카시오페아는 회피형이었기 때문에 결국 제대로 된 끝조차 내지 못했다.
2. 진 보스는 자신이 떠나고 남은 친구들이 어떨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3. 모란은 친구들이 아카데미에 돌아가기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4. 너도 사실은 그냥 도망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고 있었지?
“……?”
순식간에 초점이 나가 눈꺼풀을 감았다 뜨고 나면 평범한 착각이다. 펼쳐진 페이지는 단원에서 다른 단원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라 아무런 문제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보기와 선택지는 진짜로 나의 생각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아까도 말했듯 주어진 지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사람 마음이다. 심지어 글을 쓴 사람의 진의가 어땠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보기조차도, 그저 많은 사람이나 권위자가 그렇다고 하는 게 답으로 선택될 뿐 정답은 없다.
시험지에 틀린 문제가 많아 전부 죽죽 그어진 걸 시험지에 비가 내린다고, 반대로 맞은 문제가 많아 전부 동그라미가 쳐진 걸 시험지에 눈이 내린다고 하던가? 그러면 지금 이 방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을 것이다. 모란은 가만히 앉은 채로 그걸 하염없이 맞고만 있었다.
아, 나는 이래서 우산이 싫다, 현대 기술이 이렇게까지나 발전했는데 방에 수없이 내리는 이것들을 막을 수 있는 게 고작 우산뿐이라니.
사실 비가 내리는 걸 원망할 수는 없으니까 괜히 우산에 화풀이하는 거겠지.
모란은 마음속으로 어떤 선택지도 답으로 체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정답이 아니었기에 모든 것이 정답이었다.
BGM / 비와 페트라 - 벌룬 (feat. v 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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