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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두 갈래 길

반사적으로 양팔로 몸을 감쌌으나, 느껴지는 충격은 없었다. 제노가 감았던 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성호였다.

어라, 가디안이 아니네? 의문을 가지고 있자 리플렉터를 펼친 가디안이 옆에서 옷자락을 살짝 잡아 왔다. 아무래도 성호 때문에 자리를 빼앗긴 듯싶었다.

그래도 고마워. … 챔피언도 지키려고 한 거 맞지? 제노의 물음에 가디안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하여튼 매정하다니까.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선 것은 무장조였다.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온 무장조가 온몸으로 대폭발을 받아낼 각오로 양 날개를 쫘악 펼치고 있었다. 기특하기 짝이 없는 포켓몬이었다.

하지만 두 포켓몬 중에 대폭발을 멈춘 포켓몬은 없었다. 조금 더 시선을 돌리니 성호의 메타그로스가 안면부를 빛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튀어나와 사이코키네시스로 또도가스를 붙잡은 것 같았다. 슈퍼컴퓨터보다 똑똑하다는 도감의 설명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쿠웅, 사이코 파워에 붙들린 또도가스가 동굴의 벽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또도가스를 처리한 메타그로스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일단 큰 고비는 넘겼다는 뜻 같았다. 그제야 제노가 성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급한 마음에 그만….”

“….”

생각보다 너른 가슴팍이 부담스럽던 찰나 그가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성호와 분리되자마자 제노가 서둘러 뒤쪽을 살폈다. 폭발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실버는 괜찮나?

그리고 이번엔 또 뭐가 불만인지 뚱한 표정을 한 그와 눈을 마주했다. 옆에는 언제부터 함께한 것인지 모를 후딘이 나와 리플렉터를 펼치고 있었다. … 무사해 보이니 됐다.

제법 극단적이었던 최후의 수단까지 먹히지 않자 마적이 거의 발작을 일으키듯 소리를 질렀다.

“저 녀석들 전부 없애버려!!”

격식을 맞춰 한 방금의 배틀은 없던 일이라는 듯, 조무래기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섰다. 그래, 이래야 악의 조직답지.

세 사람의 에스퍼 포켓몬들이 눈을 빛내며 사이코 에너지를 끌어모았다.

*

“끄으으….”

성호가 바닥에 늘어져 신음하는 마그마단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배틀이 아닌,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포켓몬들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세 사람은 모두 이미 충분한 경험과 실력을 쌓은 트레이너들이었다.

적 포켓몬들이 모두 쓰러지고 나자 제노의 가디안은 마그마단이 또 도망치기 전에 제압하기 시작했다. 죽지도, 다치지도 않고 딱 기절할 정도로 사이코 파워를 능숙하게 조절하는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기에 과거가 상당히 의심스러워졌지만, 아군일 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으므로 성호는 굳이 그것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홀로 남아 무릎을 꿇은 마적이 절박함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초고대 포켓몬 그란돈의 부활로 인류의 활동무대인 땅이 넓어진다… 그것이 곧 인류의 발전과 연결된다는 것을 너희들은 왜 그걸 모르는 거냐! 어째서 우리를 이렇게까지 방해하는 거지!!”

그거야 주인공의 스타팅 포켓몬이 풀 타입이니까 그렇지.

조용한 제노를 대신해 성호가 말했다.

“너희들의 사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인간과 포켓몬이 공존하는 이 호연지방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짓은 용납할 수 없다.”

… 그런 명료하고 멋진 이유도 있었군. 머쓱함에 제 입가를 한번 문지른 제노가 마적에게 물었다.

“자, 그래서, 송화산에서 훔친 주홍구슬은 어떻게 했지?”

“그, 그걸 내가 알려줄 것 같은가!”

아직도 입은 팔팔하게 살아계시군. 제노가 손짓하자 옆에 있던 가디안이 양손에 사이코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두 눈이 살벌한 기운을 담고 빛나기 시작할 때, 성호가 끼어들었다.

“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에게 상해를 입히는 일은 곤란합니다. 경찰들이 오기 이전에 제가 두고 볼 수 없어요.”

표정을 보아하니 진지하게 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뭐, 챔피언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선한 의지가 굳건한 건 나쁘지 않았다.

“다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죠?”

“네? 네에….”

고개를 끄덕인 제노가 가디안을 바라보았다.

제노와 시선을 마주한 가디안이 사이코 파워로 마적을 공중에 들어 올렸다.

“뭐, 뭐 하려는 거냐!”

허공에서 팔다리를 바둥거리는 그를 바라보던 제노가 나직이 말했다.

“가디안, 뒤집어서 흔들어.”

“으, 으아아아!!”

쉐낏쉐낏. 마적이 허공에서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가 입은 코트가 뒤집어지고, 주머니 안에 든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짤랑, 짤랑, 가벼운 금속 재질의 무언가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 돈이다. 무의식적으로 주워들었던 제노가 쏟아지는 시선에 그것들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렇게 잠시 흔들어대자 안에서 커다란 구슬 하나가 떨어져나왔다. 사이코파워로 받아낸 가디안이 그것을 제노에게 건넸다. 양손에 가득 차는 크기의 구는 제법 묵직했고, 짙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주홍구슬임을 확인한 제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가디안이 마적을 내려놓았다. 우욱, 우우욱- 곧장 바닥에 엎어진 그가 헛구역질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주홍구슬 회수 성공이네요.”

“아니, 그의 인격이 다친 것 같아요.”

… 성호의 말은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실버가 물었다.

“그래서? 제법 중요한 물건인 것 같은데, 이게 뭔데?”

“그란돈을 깨우는 데 필요한 물건이야.”

제노의 시선이 마그마 안을 향했다. 실버 또한 그곳을 바라보았다. 간간이 끓어오르는 붉은 액체 안에 거대한 포켓몬 석상 같은 것이 있었다.

단지 잠들어있을 뿐이라는 걸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저런 게 깨어나서 활개를 친다니, 상상만으로 끔찍하군. 실버가 다시 물었다.

“그럼 가이오가인가 뭔가를 깨우는 구슬도 존재하겠네?”

“… 그렇지?”

“….”

“….”

주홍구슬은 마그마단에게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마주 보던 두 사람이 성호를 바라보았다. 제 포켓내비의 통화권 이탈 상태를 확인한 그가 말했다.

“경찰에게 연락도 해야 하고, 일단 지상으로 나가시죠.”

*

“우왓, 이게 다 뭐야.”

동굴의 밖. 전파가 닿자마자 성호의 포켓내비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찰에 연락을 마친 그가 잔뜩 쌓인 수신기록을 확인했다.

[ 📞 부재중 전화 (3) ] 오후 02:56

[ 전ㄴ화 ] 오후 02:57

[ ㅇ왜안받는 ] 오후 02:57

[ ? ] 오후 02:57

[ 📞 부재중 전화 (5) ] 오후 02:59

[ 혹시 당한 거니? ] 오후 03:00

.

.

.

윤진에게서 문자, 윤진에게서 부재중전화, 다시 윤진에게서 문자… 우와, 대체 몇 번이나 연락한 거야, 징그러워. 살짝 질린 표정을 지은 성호가 통화 버튼을 누른 뒤 포켓내비를 귀에 대었다. 발신음이 아주 잠깐 울리는가 싶더니, 곧장 윤진의 고함이 귓가에 내리꽂혔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제노와 실버에게까지 닿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성호가 거리를 조금 벌렸다.

“무슨 일이야.”

“송화산의 주홍구슬과 쪽빛구슬이 연달아 도난당했다는 소식이야. 내가 급하게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어.”

“그렇구나, 역시 쪽빛구슬도….”

“역시라니? 알고 있던 거야?”

“아, 그게, 주홍구슬말인데-”

성호가 말을 늘리며 곁눈질로 제노를 살폈다. 제노가 양손으로 주홍구슬을 받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가지고 있어.”

“뭐?! 마그마단의 보스가 챙겨서 본부로 향했다고 하던데!”

“….”

“… 너, 설마….”

제정신인 거니?! 스피커가 찢어질 정도의 비명이 다시 한번 포켓내비를 뚫고 튀어나왔다. 팔을 뻗어 포켓내비를 든 손을 멀찍이 떨어트린 성호가 반대 손으로 얼얼한 오른쪽 귀를 문질렀다.

한참이고 흥분해 소리를 지르던 윤진은 이제야 좀 진정이 되었는지 조용해졌다.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은 그가 아직도 화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머지는 도착하면 할 테니 빨리 이쪽으로 오기나 해.”

그리고 뚝, 전화는 끊어졌다. 아직 남은 게 있는 거구나. 성호는 벌써부터 지치는 느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송화산이면 해안시티인가. 다시 용암마을로 가 포켓몬들을 회복시키고 곧장 향하면 얼추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것 같았다.

멀리서 어렴풋이 사이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곁으로 돌아온 성호가 머릿속에 세워둔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경찰에게 사건을 넘기고 나면 용암마을에서 포켓몬들을 회복시키고 곧장 해안시티로 향하죠.”

“해안시티요?”

“네. 주홍구슬도 쪽빛구슬도 원래는 송화산에 있던 물건입니다. 제 친구가 송화산 근처의 해안시티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주홍구슬을 돌려놓을 겸 그곳으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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