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샛길 하나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공항에서 내린 두 사람은 미리 난천이 빌려뒀다는 토게키스를 이용해 설산으로 향했다. 사용할 수 있는 포켓몬 중 비행 타입이 없었기 때문에 제노는 그의 뒤에 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난천의 한카리아스를 날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눈이 내린 공간이란 한카리아스에게 악조건. 미리부터 고생시킬 필요는 없었다.
누구의 포켓몬을 빌린 걸까, 먼 친척이라던 그 사람? 제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평균보다 조금 더 큰 토게키스가 두 사람을 태우고 둥실, 날아올랐다.
귓가에 강한 바람 소리가 스쳤다. 후드를 쓰지 않았다면 추위에 귀가 떨어져 나갔을지도 몰랐다. 한참이나 뿌연 구름 속을 헤치며 날아가던 중, 순간 시야가 화악 트였다. 제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대지라는 게 처음 태어났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오점 하나 없이 하얗고 깨끗한 설산의 모습이 발밑에 드러났다.
앞의 풍경도 보고 싶은데, 난천의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의 허리춤을 잡은 채 몸을 이리저리 기웃거리자 난천이 제 손을 잡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제노는 자세를 다시 바로 했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자.”
지도를 확인하던 난천이 그렇게 말하자 토게키스가 부드럽게 지면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제노는 후드가 벗겨지지 않게 한 손으로 꼭 붙잡았다.
“수고했어, 토게키스.”
그 말에 토게키스가 높은 울음소리로 답하곤 다시 날아올랐다. 왔던 길을 되돌아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두 사람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뽀득, 뽀드득, 한참 동안 눈길을 걷는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얀 입김을 내뿜던 제노가 입을 열었다.
“토게키스를 저대로 돌려보내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영리한 아이니까 혼자서도 잘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여차하면 우리 위치를 구조대에 알려줄 수도 있을 테고.”
아마 일정 시간이 지나도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토게키스가 사람들을 데리고 근방을 수색하도록 미리 지시한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새하얀 눈 사이로 동굴의 입구같이 새카만 무언가가 보였다. 두 사람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누가 봐도 인공적으로 설치한 돌길이 눈밭 사이에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입구를 지키듯 주변에 세워진 창과 같이 날카롭게 깨어진 기둥들.
선발대가 가져온 사진과 동일했다. 이곳이 바로 신도유적이다.
“… 정말 사람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네요.”
“본격적인 조사는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앞서 여기 있는 게 특권인 거야.”
난천이 그렇게 말하며 슬쩍 웃어 보였다. 정면의 유적 입구를 올려다본 제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면서 겪어본 가장 강한 추위에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특권 맞아요?
“이 입구, 성도지방의 양식이죠?”
“맞아. 알프의유적과 같은 형태야. … 어디, 내부도 같은 모습일지 볼까.”
입구의 기둥에 살포시 손을 얹고 찬찬히 살펴보던 난천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두 사람은 각자 손전등을 하나씩 손에 쥐고 천천히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들지 않아 바깥보다 낫다고는 하지만, 안쪽 역시 곳곳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 쿵, 곳곳에 서린 얼음 때문에 이리저리 구경하며 부주의하게 걷던 제노가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이를 박았다.
“아야….”
“어머, 괜찮니?”
난천이 그렇게 물으며 쿡쿡 웃었다. 걱정을 하든지 비웃든지 하나만 해주실래요. 제노가 속으로 불평하며 일어나려던 찰나, 난천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에는 쇠사슬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아이젠이야. 이걸 차면 덜 미끄러질 거야.”
그렇게 말한 그가 제노의 신발에 손수 아이젠을 채우고 조였다. 제노는 어정쩡하게 굳어선 그 손길을 받았다.
다 됐다, 자. 제노의 신발을 한번 확인한 난천이 먼저 일어나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 감사합니다. 맞잡은 손은 차갑지만 든든했다.
“여길 좀 봐.”
계단을 올라 무대와 같은 공간에 선 난천이 돌연 털썩, 엎드렸다. 뭘 하는 건가 했더니 바닥에 쌓인 눈과 살얼음을 치우고 있는 거였다. 그의 손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맨손으로 그러지 말고 얼른 장갑 끼세요!”
“아, 마음이 급해서 그만.”
첫눈을 맞은 아이처럼 들뜬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쉰 제노가 난천이 장갑을 끼는 사이 그를 대신해 바닥을 쓸었다. 로봇청소기가 된 기분….
한참의 작업 끝에 석밀무대의 완전한 모습이 얼추 그 형태를 드러냈다. 난천이 이런저런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 제노는 내부에 설치된 동상들을 살폈다. 숨겨진 스위치 같은 건… … 없네.
“거기 뭐가 있니?”
“아뇨, 그냥 동상이 신기해서요.”
아이 예쁘다. 성의 없이 동상 위의 눈을 쓸어내는 제노를 보며 난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다시 무대에 집중했다.
“이것 좀 봐. 여기 그려진 이 삼각형… 봉신마을의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벽화와 형태가 유사해. 즉, 여긴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 불리는 아르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만든 신성한 무대….”
난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서 석밀무대를 바라보던 제노가 돌연 말했다.
“정말 같은 걸까요?”
“뭐?”
“삼각형의 각 꼭대기에 위치한 세 원이요. 정말 유크시, 엠라이트와 아그놈을 가리키는 걸까요?”
순간 난천이 벙찐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의문. 그의 눈이 무언갈 깨달은 사람처럼 크게 뜨였다.
“그거야,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난천이 유적의 구석에 내려놓은 가방으로 달려갔다. 안에서 급하게 서류뭉치를 꺼내든 그가 종이를 마구 넘기기 시작했다. 두꺼운 장갑이 방해되는지 한쪽을 입에 물고 벗겨낸 채였다.
“’그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두 마리를 분신으로서 세상에 보냈다.’ 우리는 이 두 마리 포켓몬을 디아루가와 펄기아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세계를 창조한 세 마리 포켓몬은 유크시, 엠라이트, 그리고 아그놈이라고 판단한 거야. 하지만 달라.”
난천의 손이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그 가운데 적혀있는 문장은 ‘그 존재의 난폭한 분신 세상의 이면을 부여받았다.’
“애초에 아르세우스가 만들어낸 포켓몬이 디아루가와 펄기아 뿐 아니라 한 마리가 더 있었다면? 그렇게 세 마리가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거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난천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세 개의 원 중 위쪽의, 나머지 둘과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하나의 원. 난천이 그 앞에 섰다.
“바로 이거야… 난폭한 분신, 세상의 이면을 부여받았다는 포켓몬!”
난천이 제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빛나고 있었다.
“태초에 창조된 아르세우스의 분신은 세 마리였어!”
제노는 답하지 않았다. 강한 빛이 만들어낸 짙은 그림자에 가려져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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