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유료

47화

샛길 하나

눈을 뜬 제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그럼에도 편하게 잘 수 있었던 이유는 방안에 겹겹이 쳐진 커튼 덕분이었다.

제노가 황급히 제 몸을 더듬었다. 느껴지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난천이 하이볼을 세 잔째 말아주던 것이 마지막 기억인 제노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일단 방 밖으로 나가자.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들고 제노가 비척비척 침대에서 내려왔다.

“일어났어?”

거실로 나오자 난천이 그에게 작은 병 하나를 내밀었다. 숙취해소제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라벨에는 웬 아저씨 한 명이 믿음직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 붙어있었다. 병을 곧장 비운 그를 난천이 식탁으로 이끌었다.

식욕을 돋우는 얼큰한 냄새에 자연스레 제노가 식탁에 놓인 그릇 안을 확인했다. 붉은 국물 위에 푸른 파로 색감을 더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콩나물국이었다.

“자, 어서 먹자.”

“… 감사합니다.”

이 집에서 난천이 손수 만든 요리를 대접받는 건 처음이었다. 제노가 조심스럽게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후후 분 다음 입에 넣었다. 매콤하고 시원한 국물이 숙취를 가시게 하는 느낌이었다.

“어때?”

“맛있어요.”

“다행이다. 네 가디안이 많이 도와줬어.”

어쩐지 간이 입에 딱 맞더라. 제노는 부엌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는 가디안을 바라보았다. 가디안은 제노를 한번 흘기곤 다시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매서운 눈빛을 받은 제노가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수저를 입에 물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난천에게 물었다.

“저… 혹시 술에 취해서 뭔가 말했나요?”

“응? 딱히?”

다행이 관동에서의 일이나 갤럭시단과의 관계를 술술 분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쟤는 왜 저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지. 제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상한 짓이라도…?”

“전혀 기억 안 나?”

“… 네. 난천 씨가 제게 하이볼을 주신 게 마지막 기억이에요.”

그 말에 잠시 침묵한 난천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별일 없었어. 얌전히 잠들었는데?”

“… 그래요?”

“응.”

“그럼 옷은….”

“아, 내가 갈아입는 걸 도와줬어.”

… 죄송합니다… …. 제 추한 행태를 상상해 보던 제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천이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역시 찝찝했다. 정말 그게 다였다면 가디안이 저렇게 자신을 노려볼 리가 없었다.

제노는 난천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고 확신한 제노가 다시 한번 가디안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길에 쫄아 고개를 숙였다. 흥, 가디안이 새침하게 콧방귀 뀌는 소리가 들려왔다. 얌전히 밥이나 처먹으란 말이구나. 제노가 묵묵히 다시 수저를 들었다.

*

애초에 숙취에 오래 시달리지 않는 편인 제노가 식사를 마치고 기운을 차리자, 난천은 그가 보내준 사진을 가리키며 자신에게도 포핀을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난천에겐 만들어둔 포핀을 다 먹었다고 해뒀었지. 갤럭시단의 포핀먹음이를 떠올린 제노가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마고열매와 파야열매를 이용한 포핀이 금세 구워졌다.

난천이 커피와 함께 포핀을 먹으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보낸 자료는 확인해 봤니?”

“아, 아직이요.”

갤럭시단과 빨강쇠사슬 복제의 일로 바빠서 읽어보지 못했다. 난천이 차라리 잘됐다며 클립으로 집힌 두툼한 종이 뭉치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팔락, 팔락, 빠르게 종이를 넘기던 그가 한 페이지를 제노에게 넘겼다.

“이건….”

“신오지방의 사람들이 성도 부근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담긴 문서야.”

난천의 말대로 사진 속 오래된 문서에 그러한 글이 적혀있었다. 그들이 만들었다는 신오와 성도의 문화가 합쳐진 유적은 신도유적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석밀무대에 관한 사실이 밝혀질 줄이야. 계속해서 자료를 넘겨보던 제노가 난천에게 물었다.

“이건 다 어디서 발견하셨어요?”

“고대 신오지방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먼 친척이 한 분 계시거든. 문서 복원에 일등 공신을 하셨어.”

살포시 웃은 난천이 이어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신오지방 곳곳에는 각각 시간과 공간의 신이라 불리는 포켓몬, 디아루가와 펄기아에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유적들이 자리 잡고 있어. 하지만 이건 조금 달라. 성도로 이주한 신오의 사람들이 만든 유적… 어쩌면 여태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라.”

커피잔을 내려놓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챙겨 다시 돌아왔다. 화면에는 지도가 띄워져 있고, 신오와 성도 사이 한 부분에 표시가 되어있었다.

“신오와 성도의 유적- 즉, 신도유적. 학자들이 문헌을 토대로 유력한 후보를 몇 군데로 좁혔어. 그리고 얼마 전 그곳들로 향한 선발대로부터 유적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아냈다고 해.”

난천이 화면에 사진 몇 개를 띄웠다. 눈으로 뒤덮인 산 깊숙한 곳에 입구 같은 무언가가 희미하게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보이는 창기둥과 같은 형태의 구조물.

석밀무대가 확실했다. 제노의 눈빛이 달라졌다.

“본격적인 탐사가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거야. 하지만 난 신오의 챔피언이자 고고학자로서 그곳의 정확한 위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어.”

그렇게 말한 난천이 탁, 노트북을 덮으며 제노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때, 함께 그곳에 가보지 않을래?”

“싫다고 하셔도 따라갈 생각이에요.”

“그래? 다행이다.”

사실 이미 비행기 표 두 장 끊어놨거든. 난천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출발은 일주일 뒤야. 그때까지 단단히 준비해 두자. 설산에 있는 유적을 조사하는 일은 쉽지 않을 테니까.”

“저, 잠시만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난천을 제노가 붙잡았다. 만약의 만약에 가까운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가실 정도면 이게 그 유적이 맞다고 확신하신 걸 텐데,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선발대가 안에 들어가 본 것도 아니잖아요.”

“글쎄… 감이라고 해둘까?”

내 감은 제법 잘 맞거든. 당당한 난천의 말에 제노는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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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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