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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두 갈래 길

시간이 흐르고 일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더 이상 제노가 레쿠쟈와 관련해 걱정할 일은 없었다.

여러 도시를 바쁘게 오가던 성호의 일정에도 공백이 생기고, 루네시티도 완전히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 말인즉슨 루네체육관이 다시 도전자를 받는다는 뜻. 필드의 양 끝에 선 윤진과 성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연지방 전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을 때, 성호는 윤진에게 피리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잠시 고민하던 윤진이 가볍게 답했다.

“그래, 각성의사당을 지키는 일을 물려받으면서 스승님께서 주신 것이 하나 있지.”

특별한 포켓몬을 부를 수 있다고 하던가?

그 답에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단연 제노였다. 그 열정적인 눈빛에 잠시 웃은 윤진이 말했다.

“과연. 성호 네가 웬일로 돌이 아닌 것에 관심을 갖나 했더니, 용무가 있었던 건 네가 아니라 제노 양이었구나?”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얘기를 모두 전해 들은 윤진이 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나도 마음 같아선 내 친구와 제노 양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만, 아무에게나 함부로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은 아니라서 말이지.”

“내가 아무나야?”

“좋아, 결정했어!”

끼어드는 성호를 자연스럽게 무시한 그가 외쳤다.

“체육관에서 나와 배틀하자. 관장인 나에게 승리한다면, 제노 양이 그 피리를 확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걸 인정할게!”

좋은 생각이라며 성호가 호응했다. 그러나 제노는 그저 윤진이 배틀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

그리고 다시 지금.

막상 제노가 윤진과 배틀을 한다고 하니 옆에 있던 성호가 끼어들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번에는 자신 또한 제노와 팀이 아닌 상대가 되어 싸우고 싶다고.

성호, 이건 단순히 재미를 위한 배틀이 아니라 자격을 시험하는 자리야. 거짓말하지 마, 그냥 네가 제노 씨와 배틀하고 싶을 뿐이잖아.

제노는 순간 나 때문에 싸우지 말라는 식의, 순정 만화 주인공이나 할법한 대사를 입에 담을 뻔했다. 따지고 보자면 나 때문이 아니라 내 포켓몬들과 싸우고 싶어서잖아. 잠시 고민하던 제노가 말했다.

그냥 제가 모든 걸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더블배틀을요….

체념한 제노가 2대1로 싸우겠다는 말을 꺼내자 실버가 상황을 정리했다. 태그배틀로 해, 내가 제노랑 팀을 이룰 테니까.

“지금부터 윤진, 성호 팀 대 도전자 제노, 실버 팀의 태그배틀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포켓몬은 각자 세마리, 한 팀의 포켓몬이 전부 배틀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면 시합은 끝.

특별한 케이스의 경기에도 심판을 보러 나와준 짐 트레이너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린 채 물, 그리고 얼음으로 장식된 제노가 속으로 고민했다.

성호와 윤진의 에이스 포켓몬인 메타그로스와 밀로틱은 아마 최후에 꺼낼 것이다. 실버의 에이스인 장크로다일의 차례도 뒤로 미룬다.

윤진은 주로 물 타입 포켓몬을 운용하니 피카츄를 사용하면 좋겠지만 윤진이 그에 대비를 안 해놨을 리도 없고, 전기 타입 공격이 크게 효과가 없는 성호의 견제도 신경 쓰인다.

이상해꽃은 아껴두고 싶다. 님피아는… 아무래도 상대가 강철 타입이니 힘들겠지.

중요한 건 실버의 포켓몬이다. 성호와 윤진이 어떤 포켓몬을 꺼낼지 모르니, 그와의 호흡을 맞추는 것이 최우선. 실버 또한 두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포켓몬의 타입을 알고 있다.

만약 내가 실버라면 누구를 첫 타자로 보낼까.

“그럼, 시합 시작!”

심판이 외치면서 네 사람이 동시에 볼을 던졌다. 크로뱃이 기세 좋게 커다란 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에 자리하고, 가디안이 우아하게 얼음 위로 두 발을 디뎠다.

상대의 포켓몬은 점토도리와 독파리. 역시 땅 타입이 하나쯤은 나왔군. 실버는 우선 상대를 살피는 겸 기동력을 위해 비행 타입을 꺼냈다. 빠르게 움직이는 우리 편을 보조하는 데엔 가디안이 제격.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트레이너들이 외쳤다.

“독파리, 오물 폭탄!”

“에어슬래시!”

가디안을 노리고 독파리가 뿜어낸 짙은 보라색의 액체가 크로뱃이 날린 칼날과도 같은 바람에 막혔다. 두 공격이 부딪히며 큰 소리와 함께 바람이 일었다.

“지금이야!”

“크로뱃!”

그 틈을 타 성호의 점토도리가 크로뱃을 향해 양손에서 기운을 뿜어낸다. 피하지 못한 크로뱃의 움직임이 막히는가 싶더니, 금방 풀려나 다시 날개를 세차게 움직인다.

성호의 시선이 사이코 파워를 끌어올리는 가디안에게로 향했다. 에스퍼 타입 공격은 결국 무형의 힘의 싸움. 마그마단의 아지트를 습격할 때 많은 도움을 받긴 했지만, 정말 대단한 포켓몬이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성호가 오른손을 뻗었다.

“이번엔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거야!”

순간 가디안의 발밑이 흔들리더니 얼음을 깨며 에너지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잽싸게 피한 가디안이 자리를 옮긴다. 디딜 곳을 잃었지만 가라앉지 않는다. 마치 물 위을 밟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디안의 발 아래의 수면이 조금 움푹 파여있었다.

사이코 파워로 자신의 몸을 띄우는 것. 여러 번 연습시키긴 했지만,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를 노리고 독파리의 하이드로펌프가 쏟아졌다.

가디안이 다시 사이코키네시스로 물줄기를 막아낸다. 허나 그 위력이 처음과 같지 않아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 겨우였다. 실버가 외쳤다.

“물에서 꺼내버려!”

순간 두 쌍의 날개를 접은 크로뱃이 총알처럼 제 몸통을 발사했다. 날아가는 궤적을 따라 수면이 갈라지고, 곧장 독파리를 향해 부딪친 크로뱃이 다시 날개를 펴고 허공으로 높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충격을 받고 밀려나는 독파리. 하지만 윤진은 크로뱃이 다가오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냉동빔!”

독파리가 데미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냉동빔을 쏘아낸다. 비행 타입인 크로뱃에게는 치명적인 얼음 타입 공격, 크로뱃의 날갯죽지가 얼어붙고 일순 비행의 고도가 낮아진다.

그러나 곧장 몸을 회전시키며 살얼음을 털어내고 페이스를 되찾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윤진이 미소 지었다.

“그래… 이정도 공격으론 쓰러지지 않는다는 거네.”

성호의 점토도리가 허공으로 높게 날아오르며 자리를 피하고, 그가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독파리, 하이드로펌프!”

가디안을 노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의 하이드로펌프. 순간 가디안이 사이코키네시스를 사용해 그 궤도를 크게 틀어버린다. 위를 향한 물줄기가 천장에 부딪히며, 소나기가 되어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포켓몬은 물론 트레이너들마저 덮치는 많은 양의 물. 곧이어 윤진이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보여줘.”

연이어진 냉동빔. 주변의 빗줄기를 얼리며 나아간 냉기가 크로뱃에게 쏘아졌다. 하이드로펌프의 궤도를 바꾸는 데 힘을 쓴 가디안에게 그것마저 막아낼 여유는 없었다. 혹은 그냥 안 막아준 것이거나….

아무튼 그만한 위력의 하이드로펌프에 이어 냉동빔이라니, 무시무시한 힘이다. 필드 곳곳에 서린 얼음을 확인한 실버가 크로뱃을 들여보내고 다음 포켓몬을 꺼냈다.

“이번에는 너다.”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포푸니라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얼음 위에 자리 잡았다.

필드를 한껏 이용하겠다는 말이구나. 그렇다면-

“포푸니라, 얼려버려!”

“가디안!”

실버의 지시에 포푸니라가 힘껏 냉기를 내뿜는다. 점토도리는 공중으로, 독파리는 물속으로 향하며 그것을 피하려는 순간, 가디안의 눈이 불길할 정도로 짙게 빛났다.

파도가 친다. 아니, 그건 파도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용오름처럼 필드 전체가 솟구치고, 그에 독파리도, 점토도리도 휩쓸린다. 어마어마한 사이코 파워. 일어나는 바람에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얼굴 근처로 팔을 든 성호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포푸니라가 내뿜은 강력한 냉기에 의해 그 모습 그대로 얼어버린다. 필드 중앙에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얼음기둥이 생기고, 점토도리와 독파리가 얼마 남지 않은 물 위에 차례로 떨어진다.

이것 참, 굉장한 기술에 휩쓸렸는걸. 성호가 점토도리를 볼로 들여보내는 찰나, 윤진이 마치 홀린 것처럼 감탄사를 내뱉었다.

“굉장해… 정말 굉장한 일루전이야…!”

아름다워! 반짝이는 조형물을 마주한 그의 눈이 환희로 가득 차 빛났다. 그 옆모습을 바라본 성호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아무래도 그가 진심이 된 것 같았다. 까딱 잘못하다간 윤진의 보조만 맞추다 끝날 수도 있겠는걸. 그렇게 생각하며 성호가 다음 포켓몬이 든 몬스터볼을 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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