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유료

19화

한 갈래 길

황토마을.

절구산 동굴을 통과하자마자 포켓기어가 울렸다.

[ 규리에게 들었어요. 진청시티와 담청시티에서 배지를 땄다면서요? ] 오전 09:23

[ 이걸로 배지 4개째네요. 축하해요! 제노 씨라면 손쉽게 딸 거라고 생각했어요. ] 오전 09:24

[ 그럼 지금은 인주시티인가요? ╰(°▽°)╯ ] 오전 09:24

지금은 막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제노가 자판을 꾹꾹 눌러 답장했다. ‘황토마을이에요.’ 거의 삼십 분 정도 늦은 답장에도 유빈의 반응은 바로 돌아왔다.

[ 왜 제 얼굴 안 보고 가요? 담청시티에서 돌아오는 것만 기다렸는데… ] 오전 09:58

[ 제가 상품을 얼마나 기대했다고요 (。﹏。*) ] 오전 09:58

넵, 그럴까 봐 잽싸게 지나쳤습니다!

실제로 제노는 황토마을에서 포켓몬들의 회복과 식재료의 보충을 마치자마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체육관 관장쯤 되는 사람들은 몇몇의 정말 좋은 사람을 제외하곤 어딘가 묘하게 어긋나있거나 자기만의 고집이 셌다. 다년간 몸소 겪은 일들로 내린 결론이었다. 이런 게 빅데이터지, 응.

곧장 포켓몬 센터로 향하고 있는데, 잘만 따라오던 심향이 자꾸만 뒤를 바라보더니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 심향아?”

“아, 누나, 죄송한데 먼저 센터로 가세요. 저도 금방 따라갈게요.”

죄송해요! 한 번 더 사과의 말을 외친 심향이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심향이 들어간 건물의 입구 옆 팻말이 제노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선물가게’

“뭐해? 센터 안 갈 거야?”

“아… 그게, 심향일 저렇게 혼자 보내도 되나 싶어서….”

“내버려둬. 저 자식도 곧 있으면 성인이라고. 제 앞가림 정돈 알아서 하겠지.”

실버는 심향과 여태 같이 다녔던 일 같은 건 없다는 듯 쿨하게 포켓몬 센터로 들어갔다. 결국 제노는 실버의 뒤를 따랐다.

[ 누나 저 갑자기 일이 생겼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먼저 체육관에 가 계세요! ]

두 사람이 체육관 등록을 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은 심향에게서 온 것은 저 문자 한 통이었다.

*

“이봐.”

“….”

“어이!”

“… 어? 뭐라고 했어?”

제노의 맹한 대답에 실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지, 땄다고. 그렇게 말하는 실버의 손에 아이스배지가 들려있었다. 아 맞다, 나 실버의 경기를 보고 있었지.

체육관 시합은 금방 끝났다. 특히, 제노의 시합은 이상해꽃이 휩쓸어 허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자신의 경기를 하기 전부터, 다음 차례인 실버의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제노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그 정신이 어딜 향해있는지 아는 실버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로켓단이든, 갤럭시단이든, 플라스마단이든. 악의 조직과 정의롭고 강한 주인공이 대립하는 건 이 세계가 만든 규칙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주인공이 성장하는 일종의 ‘발판’인 셈이다.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 혼자 다녀올게.

- … 괜찮아.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 나, 강해지려고 많이 노력했어.

제발 나를 보면서 그딴 눈 하지 마. 속으로 저주를 퍼부은 제노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꾸만 기어 올라오는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뱃속이 울렁울렁, 토할 것 같았다.

“한심하긴.”

실버의 차가운 말 한마디가 제노의 정신을 일깨웠다.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한 제노에게 실버가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따라가 보던가, 아님 아예 신경을 끄던가. 당신이 바보같이 계속 서 있기만 하면 나도 여기 같이 있어야 하잖아.”

“… 아마도 심향은 로켓단의 일에 엮인 것 같아.”

- 가지 마, 너무 위험해!

줄곧 심드렁하던 실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제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넌 로켓단과 관련된 일에는 항상 나섰으니까…”

구차한 변명이나 하는 꼴이라니, 정말…

“이번에도 같이 갈 거야?”

실버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대답했다.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가자.”

- 너도 가겠다면, 그럼… 나도 같이 가겠어!

정말 최악이다.

*

심향이 들어간 선물가게, 안은 꼭 파괴광선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이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박살이 난 장롱의 안으로 지하통로가 이어졌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길치는 해가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더 길을 잃기 쉽다고 한다. 처음엔 제노를 따라 내부를 탐사하던 실버는,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앞장서기 시작했다. 한차례 꾸중을 들은 제노는 얌전히 실버의 등만 바라보며 달렸다. 원래 길치에게 선택권은 없는 법이었다.

두 사람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쓰러진 로켓단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로켓단원도 있었다.

“뭐, 뭐야, 저 자식은! 그러고 보니 누가 저번 임무에서 ‘눈빛이 날카로운 빨간 긴 머리를 한 애’한테 무참히 당했다던데…!”

“잠깐, 그 뒤에! 검은 후드에 저 피카츄… 설마!”

정정한다. 피카츄에 의해 쓰러질 예정인 로켓단원이었다. 별 무리 없이 조무래기들을 돌파해 나가던 두 사람의 달리기는 갑자기 멈춰 선 실버로 인해 끊겼다. 그 덕분에 실버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제노는 실버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아야.

“그렇게 갑자기 멈춰 서면 뭐 어쩌자는…”

“잠깐.”

제노의 말을 끊은 실버가 제 앞을 경계하며 물러나라는 의미로 제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너나 지켜 인마… 제노는 실버의 신호를 무시한 채 몸을 기울여 실버의 너머를 살폈다.

뒤로 바짝 넘긴 머리. 무엇보다도 저 치렁치렁한 검은 망토…

챔피언, 목호였다.

아, 그래. 여기서 목호 씨가 심향을 돕는구나. 안심한 제노와 달리 실버는 곧장 전투태세를 취했다. 금방이라도 몬스터볼을 던질 것 같은 모습에, 목호 역시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또 뭐지? 로켓단의 단원인가?”

“누굴 그딴 녀석들이랑 같은 취급해? 그러는 너야말로 로켓단이냐?”

“뭐?”

“저! 저기, 목호 씨!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지금 챔피언 자리를 맡고 있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실버에, 제노가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며 급하게 앞으로 나섰다. 아니 뭐, 그가 못 알아보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긴 하겠지만…

다행히도 걱정과 달리 제노를 확인한 목호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너는… 그래, 제노였지. 얼굴을 보는 건 몇 년 만이지?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기억하고 계신다니 다행이에요. 상황이 좀 급해서 그런데, 혹시 얘 정도 되는 키의 남자아이를 못 보셨나요? 모자를 쓰고, 이름은 심향이라고….”

“그 소년이 너희의 동료일 줄은 몰랐구나.”

“네, 맞아요.”

“아니거든.”

실버의 상반되는 대답에 목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쟤가 저러는 꼴 하루 이틀 본 게 아닌 제노는 가볍게 무시했다.

“위험하니 나가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 너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면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지. 가자, 상황은 가면서 설명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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