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비추는 곳으로
모란이초상화(빛밖에안보임)
기숙사 침대에 옆으로 누워 스마트로토무를 보던 모란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멜로코의 메시지였다.
요. 모란. 시간 있어? 있으면 미술실로 와.
난데없는 연락에 당황한 것도 잠시, 밤중에 갑자기 미술실로 부른다면 뭔가 중요한 이유인가 싶은 마음에 모란은 급히 준비하고 미술실로 걸음을 옮겠다. 무슨 일이지? 왜 하필 미술실일까? 흔들풍손처럼 부풀어오르는 생각을 뒤로 하고 모란은 조심스럽게 불이 켜져 있는 미술실 문 앞에 멈춰 섰다.
"저, 저기... 멜리, 있어?"
모란이 문 앞에서 쭈뼛거리며 멜로코를 부르자 순간 미술실의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복도에 새어들어왔다. 늘상 어두침침한 곳에만 있다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지자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하는 모란을 보고 멜로코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뭐 해? 빨리 들어오지 않고."
"아, 알았어......"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술실로 발을 끌고 들어가자 모란의 눈에 비친 건 단정한 분위기의 부실 한가운데 놓인 캔버스였다. 한밤중의 미술실은 고요하다 못해 빠모 한 마리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멜로코는 자연스럽게 캔버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모란에게 반대편 의자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모란이 어색하게 의자를 끌어당겨 앉자 멜로코가 연필을 집어들며 말했다.
"도저히 잠이 안 와서 잠깐 그림을 그리려고 나왔거든?"
"응."
"근데 널 그리고 싶어서 불렀어."
"나, 나를?"
"응. 괜찮으면 잠시 도와줘. 밑그림만 그릴 거니까."
한밤중에 미술실로 불러내서 모델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모란은 당황했으나 멜로코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기숙사로 돌아간다고 해도 컴퓨터나 스마트로토무를 보느라 바로 잠에 들지 않을 거란 걸 모란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모란은 무심코 비스듬하게 앉으려다가 갑자기 자세를 똑바로 고쳐잡고 정면을 응시했다. 멜로코의 얼굴은 캔버스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삐죽 튀어나온 노란 머리카락만큼은 선명히 눈에 들어와 모란은 잠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억눌렀다.
정자세로 가만히 앉아 앞을 계속 보고 있는 게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림을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모란은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부실에는 꽤 오래 정적이 감돌았다. 연필 소리만이 멜로코랑 모란의 사이를 가득 칠하고 있었다. 멜로코랑 있으면서 이렇게나 서로 말을 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모란은 어색했지만 그래도 이 정적이 나쁘지 않았다.
"지루하면 말은 해도 돼."
"응? 하지만 그림이......"
"그건 신경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멜로코도 이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는지 나름대로 말을 꺼냈다. 오가는 이야기는 시시콜콜했지만 평화로웠다. 학교생활 이야기, 부활동 이야기, 스타단 친구들과의 이야기...... 분명 흔한 대화 주제였지만 그들에게는 얼마 전까지 낯선 이야기였다. 모란은 멜로코랑 평범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지금이 새삼스레 좋다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멜로코가 있는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모란은 문득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스마트로토무를 사이에 두고 멜로코랑 이야기했을 때, 잠적하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들에게 안녕을 고하던 때, 스타더스트 대작전에서 푸름에게 멜로코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했을 때, 처음으로 스마트로토무를 걷어내고 멜로코의 얼굴을 마주보며 인사했을 때, 미술실 구석에서 멜로코를 지켜보고 있었을 때...... 하나하나 전부 그에게 소중한 추억이었지만 모란에게는 무엇보다 스타단 친구들과 학교 안에서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소중했다.
학교생활. 부활동. 이 익숙한 단어들은 얼마 전까지 스타단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아니 사실 이때까지 꿈도 꾸지 못하도록 한 일들이었다. 스타단 최고의 해결사이자 팀 쉐다르의 보스 멜로코. 그리고 모란의 소중한 친구들 중 하나이자 미술부원인 멜로코. 모란은 두 모습 사이의 좁지만 동시에 넓은 간격을 생각하며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한밤중의 미술실에 화가와 모델로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멜리."
"왜?"
"그냥 갑자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뭐가?"
"너랑 같이 학교 복도를 걸을 수 있어서... 그리고 이렇게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아."
멜로코는 순간 쥐고 있던 연필이 손에서 빠져나갈 뻔한 걸 겨우 고쳐잡았다. 겨우 얼굴을 내밀고 바라본 캔버스 너머의 모란의 모습은 확실하게 그만의 빛으로 멜로코를 비추고 있었다. 지금 당장 미술실의 불이 전부 꺼진다 해도 그를 보고 있는다면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멜로코는 황급히 다시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캔버스로 얼굴을 가렸다. 지금 그의 표정은 누가 보아도 평소의 그가 지을 만한 게 아니었다. 하물며 모란이 지금 내 얼굴을 본다면... 멜로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그림에 얼굴을 갖다대었다.
"뭐야? 뜬금없이 이상한 말이나 하고... 자세 흐트러졌으니 정면이나 봐."
"아, 알았어..."
그 후로는 쭉 고요함만이 미술실을 가득 칠하고 있었다. 모란도 멜로코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할 말이 없어서 생기는 정적이 아니라는 걸 서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란은 더 이상 자세가 흐트러질까 신경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앉을 수 있었다. 멜로코도 더 이상 어디를 어떻게 그려야 한다는 생각 없이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길고 조용한 밑그림을 끝내고 멜로코가 여전히 캔버스로 얼굴을 가린 채 모란에게 손짓했다.
"밑그림이지만 완성했으니까 한번 봐봐."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 보여줘도 괜찮아...?"
"상관없어. 그냥 와서 봐. 보여주고 싶으니까."
모란은 의자를 끌고 멜로코 바로 옆에 앉아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모란과의 거리가 훅 가까워지는 바람에 멜로코는 그가 의자를 끌고 오는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림을 빤히 보는 모란의 옆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멜로코는 얼떨결에 그림에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다. 멜로코가 겨우 곁눈질로 흘겨본 모란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눈에 별빛이 어린 듯했다.
멜로코가 그린 모란의 그림은 생각보다 단순한 느낌의 선을 사용하면서도 그만의 방식으로 미세하게 표현한 모란의 전신이었다. 답지 않게 단정한 자세도 살짝 미소를 띈 듯한 얼굴도 전부 그대로였지만 배경만큼은 미술실이 아닌 별이 반짝거리는 밤하늘 한가운데였다. 밤하늘 사이에 걸터앉아 은은하게 웃고 있는 모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올곧으면서도 단단했다. 평소의 그가 주는 인상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모란은 그 그림에서 확실하게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는 멜로코의 눈을 통해 보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를 너무 멋지게 그려준 거 아냐...?"
"잘 알고 있네. 일부러 그렇게 그려봤어."
"그래도... 고마워. 멜리. 조금 부끄럽지만 기뻐."
"뭐, 기쁘다면 그걸로 됐어."
멜로코는 은연중에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말았다. 평소 생각하는 그대로 말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림을 보고 웃는 모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아니, 난 정말 네가 멋지다고 생각해. 평소처럼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모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멜로코는 다시 캔버스 위로 눈을 돌렸다.
그림을 빤히 응시하던 모란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반짝거려야 할 주변의 별들 사이의 자신이 유독 가장 연한 선으로 스케치되어 있었다. 밤하늘 아래 있다면 내가 더 어둡게 보여야 하지 않나? 그냥 넘어가도 됐을 궁금증이지만 모란은 굳이 그 부분을 짚으며 물어보았다.
"여기... 이 부분은 유독 나만 밝게 표현한 거 같은데, 혹시 무슨 의도인지 물어봐도 돼?"
"어?'
멜로코가 순간 입을 움찔거리다 흔들리는 눈으로 모란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엔 자연스레 떠오르는 답이 있었지만 지금 내뱉는다면 조금 자기 자신이 우스워질 것만 같아 멜로코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자세를 고쳐잡고 정면으로 모란과 눈을 마주했다. 아무런 의도도 생각도 없는 그의 눈이 환하게 자신을 밝혀주고 있었다. 아무런 빛조차 들지 않는 잿빛 눈동자를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정함과 따뜻함을 담아 빛내고 있었다. 그런 눈을 바라보자 멜로코는 더 이상 캔버스 뒤로 진심을 감출 수 없었다. 말하고자 하는 걸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주변에 빛나는 게 많아도 항상 네가 제일 환하게 보이니까."
"응?"
"그러니까 그 부분만은 밝게 칠하고 싶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쭉, 그렇게 생각해왔어."
"멜리......"
"왜냐하면 넌 우리의... 카시오페아... 잖아?"
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 멜로코의 입에서 튀어오른 잔불을 모란은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맞았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로 온몸 이곳저곳이 타들어가도 불은 전혀 뜨겁지 않고 오히려 따뜻했다. 그는 갑자기 몸에 붙어버린 불을 흘러내리는 물로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애써 짓누르며 자연스레 따스함이 몸을 감쌀 때까지 따끔거리는 눈에 힘을 주었다. 벅차오른 마음이 재미있는 게임을 하거나 감동적인 애니를 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안에서 치솟아올라 그는 잠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사그라든 불꽃이 볼을 살짝 태웠는지 발그레진 뺨으로 모란이 멋쩍게 웃었다.
"고마워. 멜리도 나의 소중한 보물이야."
"고마우면 됐... 뭐?"
"멜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멜리는 내 소중한 보물이야."
멜로코는 잠시 눈을 감았다. 도저히 웃는 모란의 낯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바로 눈을 뜨면 빛이 사그라들 것만 같아 멜로코는 캔버스 쪽으로 휙 얼굴을 돌렸다. 지금 모란의 눈을 마주하면 한없이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 영원히 우주의 먼지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찰나의 순간에 멜로코는 눈을 감았는데도 자신의 눈에 모란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모두의 눈에도 모란이가 이렇게 비춰질까. 그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멜로코에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이제서야 스타단 친구들이, 그리고 모란이 웃으면서 자신 앞에 서 있을 수 있음을 자각한 멜로코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모란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렇게나 고마우면 다음번에 그림 색칠할 때도 다시 와."
"응. 그럴게."
"부르면 바로 와. 안 나오면 그땐 확 쥐어박아 버린다?"
약속이다. 알았으면 기숙사에나 돌아가자. 그렇게 말하고선 멜로코는 홱 고개를 돌렸다. 모란은 조용히 멜로코의 뒤를 따라가다 이내 자연스레 멜로코와 발을 맞추며 그와 함께 걸었다. 오렌지 아카데미의 홀은 길고도 넓었지만 모란과 함께 걸으니 멜로코는 그 거리가 짧게만 느껴졌다.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는 빛이 은은하게 둘을 비추고 있었다. 멜로코는 잠시 멈춰서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분명 홀 전체를 밝혀주고 있는 빛인데도 유독 자신을 더 밝게 비춰주는 것 같아 멜로코는 고개를 돌려 묵묵하게 같이 창문 너머를 보고 있는 모란에게 말했다.
"오늘 유난히 별이 반짝인다?"
"그렇네... 별빛이 홀 전체를 완전히 비추는 느낌이야."
"맨날 이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이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 그래도 앞으로 별이 잘 보이는 날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자."
짧은 대화가 끝나고도 둘은 몇 분 동안 창문 앞에 가만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반짝임이 별이 내는 게 아닐 수도 있었지만 멜로코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밤하늘의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해도 자신을 누구보다 빛나게 하는 별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먼지가 되기 싫어 방황하며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별들. 그 사이에서 유난히 더 밝게 빛나는 다섯 개의 별. 그리고 그 별들을 하나로 모아 다함께 빛날 수 있도록 별자리로 만들어주었던 자신 옆의 카시오페아. 멜로코는 그의 곁에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붙어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척하며 별 구경에 정신이 팔린 또다른 별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다시 주변이 한없이 어두워진다고 해도 끝없는 어둠 속에서 주저앉은 채로 두려움에 떨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굳이 주위를 밝히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스스로 길라잡이 별이 되어주는 사람이 다른 별들과 같이 각자의 소우주를 품고서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멜로코는 저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우리가 가게 될 우주가 어디든, 또다시 방황하더라도, 혹은 행선지가 없더라도, 한 곳에서 정처없이 맴돌고 있더라도, 누군가 다시 우릴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버리려 하더라도, 든든하게 옆을 지키면서 반드시 따라갈게.
빛이 비추는 곳으로.
BGM/ DAYBREAK FRONTLINE(feat.IA) - Orange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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