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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다시 집으로 향하며
(BGM- ray / Leo/needx初音ミク-(원곡: BUMP OF CHICKEN))
다녀올게.
모란이 집을 나서서 기차역으로 향하기 전 가족들에게 남긴 인사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잠깐 다른 마을로 놀러갔다 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그가 향한 곳은 팔데아행 기차가 정차하는 승강장이었다. 입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말의 무게가 고스란히 다리로 향하고 있었는지 굳어버린 다리를 질질 끌며 그는 겨우 역 안 의자에 걸터앉았다. 혹시나 가방이 눌릴까 잠시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숨 돌리려 모란은 스마트로토무를 꺼냈다. 그새 언니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도착하면 연락해!
자신이 남긴 인사만큼이나 짧고 간결한 말에 모란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별다른 것도 없는 메시지였지만 짧게 답장을 남겼다.
알았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어…. 같은 말들을 그는 굳이 손으로 눌러쓰는 대신 목 아래로 눌러담기를 택했다. 길게 말해봤자 꼬리가 길다는 둥 또 문자로 쓸데없는 소리나 계속 보낼 게 뻔했으니까. 작게 한숨을 쉬며 무심코 돌아본 기차역의 모습은 언제나와 같았다. 문득 드는 기시감에 그가 잠시 멈칫했다. 그래. 이건 데자뷰다. 팔데아에서 가라르로 다시 돌아왔을 때도 그는 한숨을 쉬며 기차역을 돌아보았다. 자각하고 나니 입가에서 씁쓸한 웃음이 배어나왔다. 비전 쌉쌀스파이스가 가득 든 샌드위치를 먹어도 지금만큼 온몸으로 쓴맛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진 않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기차역도. 그리고 자신도.
돌아갈 거야? 언젠가 언니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 주어가 학교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물음에 모란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민되어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될지 몰라서였다. 잠깐 고민한 끝에 입에서 나온 말은 돌아가야지. 그가 건넨 인사만큼이나 짧은 한마디였다. 언니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어찌되어도 상관없다 같은 말뿐. 될 대로 되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모란은 무엇보다 네 의사가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분명 언니도 그런 의미로 말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곧 기차가 들어올 시간이라 모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승강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과는 달리 팔데아행 기차는 조금 이르게 승강장에 도착했다. 그는 들뜨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마음으로 기차에 올라타 등받이에 기대 창문 쪽을 바라보며 삐딱하게 앉았다. 기차가 출발하려고 하자 그제서야 그는 그가 지금 다시 팔데아로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기차를 타는 동안 편안히 가려고 했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기차 소리가 크게 들리면 들릴수록 머릿속도 시끄러워져 갔다. 사실 편안하게 가고 싶었던 건 자신만의 바람일 뿐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 기차의 목적지인 팔데아지방은 단순히 그가 다시 다닐 아카데미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모란의 집이 있다. 피나. 멜리. 추명. 티가. 비파 언니. 굳이 이름을 부르자니 새삼스레 그리워지는 집이.
모란은 떠난다. 집을 떠나 그의 또다른 집이 있는 곳으로.
*
가라르에 있는 동안 모란의 하루하루는 재해가 지나간 뒤의 폐허처럼 고요했다. 고향에서 무너진 마음을 새로 쌓아 올리는 일은 오히려 평온하고, 편안했다. 별 탈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그는 이따금씩 멈추어 뒤돌아서 과거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땅을 밟고 있는 다리는 둘이었지만 시시때때로 열 개의 다리가 나랑 같은 땅을 밟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길가에 울려퍼지는 노랫소리, 불꽃이 타닥거리는 소리, 가게 앞을 지나치다 보이는 옷, 내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 하다못해 우연히 들리는 다정한 말소리에도 그는 손쉽게 과거로 돌려보내졌고 가라르의 땅을 밟으면서도 정처없이 팔데아를 헤매고 있었다.
모든 걸 청산하고 돌아가겠다 굳게 마음먹었지만 그 결심에서 비롯된 모든 일들이 허무해질 정도로 모란의 삶에는 빈자리가 너무 많아져 있었다. 그건 이미 가족이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잘 지내고 있을까. 뭐하고 지내고 있을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다들 학교는 잘 다닐까? 내가 학교로 다시 돌아간다면…. 하나를 떠올리면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들을 떨쳐낼 수 없어 모란은 가끔 머리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들을 잊을 순 없었다.
‘우습지, 내 발로 떠나가 놓고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이라니….“
스스로 눈 앞에서 떠나보낸 이들을 그리워하는 모순 아닌 모순에 괴로워하면서도 모란은 그들을 떠올리는 걸 굳이 멈추려 애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만약 잊는다 해도 그들이 남긴 흔적을 삶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써 하늘을 보지 않으려 해도 별빛만큼은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모란 역시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그들과 함께했던 때가 계속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처음 함께하자고 말한 날부터 창문 너머로 작별인사를 고했던 날까지 멈추지 않는 파노라마처럼 옛 기억은 계속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보고 싶다. 돌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란은 그들이 보고 싶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간다면 다시 함께할 수 있을까. 그조차 막연한 고민일 뿐이었다. 모란이 아카데미에 돌아가려는 이유는 그가 건넨 인사만큼이나 간단했다. 그곳에 내 집이 있으니까. 학교보다도 모란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사람들. 함께 있으면 편안했던 사람들. 늘어져 있다가도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어날 힘을 주었던 사람들. 그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의 안에서 가족의 범위는 재정의되고 있었다.
모란은 턱을 괴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도통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없는 바깥이었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과도 다를 바 없는 풍경에 모란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어디쯤 왔는지 모르겠다면 차라리 어느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도 잊어버리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그래야 편한 마음으로 앞에 그려질 경치만을 생각하며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모란의 머릿속에는 어느덧 다른 고민이 자리잡고 있었다.
‘인사…. 다시 건넬 수 있을까….’
실로 오랜만에 하는 미래에 관한 걱정이었다. 다들 학교로 돌아갔으면 많이 변했을 텐데, 돌아온 자신을 보고 어떻게 반응해줄지 모란은 알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말도 없이 떠나버렸냐고 화를 내진 않을까? 나를 원망하진 않을까? 어쩌면… 이미 실망해서 돌아서버리진 않았을까? 지금 해봤자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란은 고민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생각의 무게에 짓눌린 나머지 고개가 점점 떨궈지던 때에 모란의 스마트로토무가 울렸다. 또다시, 언니의 메시지였다.
아, 그리고 학교에 도착하면 인사하는 거 까먹지 말고!
모란은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인사? 무슨 인사? 자신이 방금 전까지 하던 생각과 맞물려 그는 잠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조금 더 생각하고 나서야 모란은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절차를 밟기 전 교장 선생님이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고 언니의 메시지가 정확히 교장 선생님을 지칭한 말이었는지도 잘 몰랐지만 인사하는 거 까먹지 말고. 라는 문장만큼은 모란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모란은 불현듯 예전 일을 떠올렸다. 안녕. 고마웠어. 자신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전했으나 닿지는 않았던 말. 자신이 결국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갔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사를 한다는 건 그게 무엇이든 지금부터가 시작이고 끝이라고 확실히 매듭짓는 것. 모란은 끝을 매듭짓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남겨둔 채로 도망쳐나왔다. 마치 스타단 보스로서의 끝을 낸 채 다시 돌아와도 친구들과의 끝만큼은 눈앞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그래. 난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마지막 인사도 하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거야.’
모란의 눈에 순간 빛이 일렁였다. 모든 걸 마무리짓고 돌아왔다고 스스로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친구들과의 관계를 마무리짓고 싶지 않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모란은 누구보다도 그들과 계속 친구이고 싶었다. 스타단으로서는 끝을 선언했지만, 고마웠다는 말은 끝끝내 그들의 앞에서 내뱉지 않은 것처럼.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조금 후련한 표정으로 웃음지으며 한결 편안해진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
응.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인사할게.
답장을 보내고 나서 조금 후에야 답장을 받고 나서 언니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그는 이제서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앉아있을 수 있었다. 인사를 다시 건넬 수 있을까. 마음에 뒤덮인 각종 불안함과 근심 속에 묻어두고 있었을 뿐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사실 그의 안에서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가족이 기다리는 집에 도착하면 인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뒤에 돌아올 말이 씁쓸할지 혹은 달콤할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런 걸 생각하고 인사를 건네는 건 아니기에 더 이상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시 만나면 꼭 인사할게.
‘너희랑 처음 만났을 때도 내가 인사를 건넸으니까….’
내 시작에 너희가 있었으니까 너희의 새로운 시작에도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모란은 그렇게 바라며 한결 편안한 자세로 등받이에 기대누웠다. 왜인지 모르게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나면 좋은 일들이 가득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만드리라고 결심했다.
너희와 끝이 없는 채로 다시 시작할게.
다녀왔어.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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