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유료

75화

두 갈래 길

푸하!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는 소리와 함께 제노와 실버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뭍에 올라와 있던 성호와 윤진이 두 사람을 위로 끌어올렸다.

해저 동굴에서 탈출한 뒤, 수중을 통해 도착한 루네시티. 상공에는 가이오가의 힘으로 인해 발생한 폭우가 도시를 물에 가라앉힐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괜찮니?”

“… 네.”

어두운 하늘 아래서도 반짝이는 윤진의 미모를 바라보던 제노가 반 박자 늦게 답했다. 그리고 곧장 시선을 성호에게로 돌렸다. 발목은….

“저도 일단 무사합니다.”

잠깐 삐끗했을 뿐이에요. 그가 붉어진 얼굴을 모로 돌리며 그렇게 답했다. 괜찮다면 다행이지만 챔피언이 부상으로 인해 은퇴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제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호를 흘긋거리고 있는 동안, 윤진이 입을 열었다.

“이 많은 양의 비… 각성의 사당에서 나오는 힘에 의해 내리고 있어.”

“루네시티의 상공에 모인 먹구름은 더욱 거대해져서 호연 전체를 뒤덮게 될 거야. 이대로라면….”

그때 휘웅이 갖고 있던 주홍구슬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윤진이 모두를 각성의 사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입구에서 마주한 것은 아쿠아단과 마그마단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이연이 휘웅에게 아쿠아 슈트를 건네고, 아강이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뉘우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제노는 별생각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옷이 젖은 게 찝찝해서 갈아입고 싶다는 감상 정도일까.

순간의 망설임으로 아쿠아단까지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결국 얘기는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곧 있으면 주인공이 가이오가를 물리치고 호연지방을 구할 것이다. 그것이 정해진 수순이었기에, 제노는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시선을 정면에 두고만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은 실버였다. 그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제노의 머리 위를 가렸다. 순간 피부를 때리던 것을 멈춘 빗줄기에, 제노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난 괜찮아, 실버가 써.”

“나도 이미 다 젖은 외투 따윈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며 실버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따지고 보자면 쫄딱 젖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제노가 물을 잔뜩 머금고 더욱 짙은 색이 된 민소매의 끝을 주욱 당겨보았다. 가이오가고 뭐고 따뜻한 물에 샤워나 하고 싶었다.

실버가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을까, 저런 꼬맹이에게 맡겨도.”

“주홍구슬이 선택한 사람이잖아. 그와 그의 포켓몬들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당신, 정말 사람 쉽게 믿는 거 알아?”

“….”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제노가 쉽게 믿는 사람들은, 그거야 그들이 세계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었다.

실버가 하는 말만 들으면 무슨, 사탕 준다는 말에 쫄래쫄래 따라가는 어린아이인 것 같았기에 제노의 표정이 조금 불만스러워졌다.

실버가 그 비죽 내밀어진 입술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얘기가 전부 끝났는지 휘웅이 사당의 입구에 섰다. 거대한 문이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열리고, 휘웅이 안으로 뻗어진 어둠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오직 그의 출입만을 허락하겠다는 듯 휘웅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사당은 다시 문을 굳게 닫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마그마단의 리더, 마적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단원들을 총동원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포켓몬들의 구출에 힘을 보태고 싶다.”

“… 미안하다. 우리도… 저 꼬맹, 아니, 아이에게만 짐을 지운 채 가만히 있을 순 없어!”

두 악의 조직 리더들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성호에게로 쏠렸다. 순식간에 최종결정권자가 되어버린 성호가 잠시 고민하더니,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지금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 다들, 부탁드립니다.”

그에게서 내려진 허락에 기합을 넣은 전원이 조금씩 팀을 이루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성호와 윤진은 아마 모두를 통솔하는 역할을 하겠지. 다 잘 풀릴 거라는 걸 알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고 싶지만은 않았던 제노 또한 발을 움직였다.

그런 그의 곁으로 누군가 따라붙었다. 실버와 제노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굴뚝산의 기지에서 보았던 간부, 구열이었다. 그가 쑥쓰러운 듯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도 너랑 같이 가고 싶어.”

“… 어떡할래?”

실버가 영 못 미덥단 눈빛으로 구열과 제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뭐, 괜찮겠지. 그가 기지 안에서 했던 말을 잠시 떠올렸던 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의미에 구열의 표정이 환해지고, 그와 반대로 실버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함께 도시의 어딘가로 달려 나갔다.

*

“정말 감사합니다!”

이상해꽃이 튼튼한 덩굴을 이용해 불어난 강물에 휩쓸린 포켓몬을 건져냈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제 연꽃몬을 품에 소중히 안은 트레이너가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한 뒤 떠나갔다.

구열의 그라에나가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사람을 찾는 사이, 이상해꽃을 쓰다듬던 제노가 나직이 말했다.

“기지에서, 나리 언니에 대해 말했었죠?”

“으, 응?”

제노가 말을 걸어올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그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어색하게 서 있던 구열이 놀라 되물었다.

남나리 언니 말이에요. 제노가 다시 또박또박 말하자 머뭇거리던 그가 답했다.

“넌… 날 모를 수도 있어. 예전에 나리가 너에 대해 말해준 게 전부니까.”

그렇게 말하며 구열이 손가락으로 제 옆머리를 소심하게 꼬았다. 남나리의 지인을 자신이 모를 리 없었기에 제노가 열심히 기억을 뒤적였다.

그때 문득 한 사진이 떠올랐다.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남나리가 리본을 들고 찍은 사진. 그 옆에 서 있던, 구열과 같은 보랏빛 머리의 소녀.

남나리의 방에 고이 놓여있는 액자를 유심히 바라보던 어린 제노에게 그가 직접 설명해 주었던 적이 있었다. 콘테스트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아이와 함께 찍은 것이라고.

설마, 그때 그 여자아이가….

제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바라보자 구열이 조금 얼굴을 붉혔다.

“아, 알아보겠어?”

제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열이 들뜬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태초마을, 그리고 남나리라는 공통점은 제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기에, 그 또한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런 그를 실버가 아닌 척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리가 그랬어. 여동생이 생겼는데, 무척 훌륭한 트레이너가 될 거라고.” ”….”

“저기, 나리랑은 아직 연락해?”

‘생겼다’. 그래, 제노는 새로 생긴 객식구. 그럼에도 자신을 여동생이라고 부르며 좋은 평가를 남겨준 남나리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제노는 고개를 저었다. 박사님께는 간간이 상황을 보고했지만 나리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노의 의견이라면 뭐든 존중해주는 오 박사와 달리, 나리는 그린과 제노의 사이를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리에게 어디서 무얼 하는질 털어놓았다간 분명 그린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제노는 직접 연락하는 대신 구열에게 남나리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연락이 닿으면 제 안부도 전해주세요, 그렇게 말하자 구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알겠어. 꼭 전할게, 꼭, 꼭이야.”

… 그렇게까지 다짐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구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빛내고 있었기에 딱히 지적하진 않았다.

“저기, 나리 언니랑은 가까운 사이셨던 것 같은데, 왜 연락이 끊기게 된 거예요?”

제노가 조심스럽게 묻자 조금 망설이던 구열이 말했다.

“… 콘테스트를 그만두고 마적 님과 함께 하게 되면서 어쩌다 보니….”

그리곤 얼굴을 붉힌다. 제노의 표정이 조금 짜게 식었다. 친구보다 남자를 택했다 이건가.

잠시 마적의 얼굴을 떠올린 제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던데, 그런 남자가 취향인가? 그러다가 문득 남나리와 자신의 나이 차이를 생각해 본다.

구열은 남나리와 친구, 즉, 동갑이란 말이잖아.

그럼 지금 나이가… 제노가 다시 구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수줍게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어마어마한 동안, 하지만 나이대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취향이다.

멋대로 무언갈 납득한 제노가 문득 실버를 바라보았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뭐, 왜.”

“….”

너는 대체 언제 어른스러워질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갑자기 코를 꼬집혔다.

“아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지금 날 보면서 불쾌한 생각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어.”

예리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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