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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여섯 명인데 눈은 두 개

BGM / 하나 둘 하고 셋에 - nogumi (feat. 하츠네 미쿠)

진 보스, 무슨 생각해?

응?

누군지도 모를 음성에 얼떨결에 대답하고 나서야 모란은 꿈이든 망상이든 착각이든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야 우리 집에 스타단 친구들이 있을 리 없잖아. 방 창문 쪽에 기대 비 오는 밖을 바라보던 모란은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나가, 멜로코가, 추명이, 오르티가가, 비파 언니가 있다. 음… 이건 뭐지. 너무 만나고 싶은 나머지 꿈을 꾸나? 날이 흐려 완전히 잿빛인 방에 여섯 명이 앉거나 서 있거나 누워 있으니 더욱 어두워보였다.

모란은 비가 와서인지는 몰라도 그날따라 가라앉는 듯한 기분에 평소보다 조금 더 주변을 어둡게 하고 하루종일 방에서만 있었다. 흐린 날과 맞물려 분명 아예 불을 끈 게 아닌데도 방에는 아무런 불빛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잠이 들었나? 아니면 내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모란은 무표정으로 몸을 돌려 창문 쪽에 기대 섰다. 다섯 명의 시선이 그를 향해있었다. 누구도 고개를 돌리거나 움직이지도 않는 비현실성에서 드는 이질감 때문에 그는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벗어나려 하지도 않았다. 진짜가 아니라 해도 오늘 같은 날은… 그래, 차라리 이렇게 있는 게 나아.

“지금? 아무 생각도 안 들어.”

“우리가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건 당연하니까 굳이 말하지 않았어.”

아, 내가 평소에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했었나? 역시 꿈인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다섯 명이 동시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말을 하니 조금 무섭네…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인 게 그냥 착각이 아니고 유령이나 귀신 같기도 하다. 고스트 타입이나 에스퍼 타입 포켓몬도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데 친구 다섯 명의 유령이 한방에 있어도 이상하진 않지. …아닌가? 이상한가? 자신마저 별 미동 없이 이 상황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마저 비현실적이었다. 그래도 벗어나려고 하면 팔데아로 돌아갈 때까지 영영 볼 수 없을 게 확실하니까. 모란은 뒤집어쓴 잠옷의 후드를 벗었다. 그제서야 방 전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왜 우울해하고 있어?”

“그것도 잘 모르겠네… 그냥 비가 와서? 아니면 오늘이 그런 날일지도 모르지.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앞으로 모든 게 안 될 것 같고, 불안하기만 한 날.”

그게 신경쓰여서 달래주러 온 거야? 모란은 실체일 리 없는 허상에 대고 실체인 것마냥 말을 했다. 가끔은 가족 하나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사무치게 느끼는 날이 있다. 지금 이렇게 한방에 있다고 갑자기 기뻐지거나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이들이 없다면 그냥 난 이불을 뒤집어쓰고 비가 그치길 바라며 잠에나 빠지려고 하겠지.

그러고 보니 다들 옷이 교복이다. 우리가 스타단이란 이름으로 한데 엮이기 전엔 다들 이렇게 입고 다녔겠지. 자신만 사복 차림인 것이 다들 아카데미로 돌아갔는데 아직 자신은 아카데미 밖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아 모란은 괜히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렸다. 잘 지내고 있겠지? 다들 수업도 듣고, 같이 학생식당에서 밥도 먹고, 매점도 가고… 나는 그대로지만 분명 너흰 많이 달라졌을 거야. 그래도 나쁜 방향은 아니니까 그거면 됐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문득 모란은 엄습하는일격을 맞은 듯 순식간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너희가 그대로면 어떡하지? 설마, 그럴 리가. 스타단으로 계속 남아있어봤자 학교에든 너희한테든 좋을 게 없다고. 언젠가는 해산하는 게 맞았다. 그래서 모란은 자신의 마지막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너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그러고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단을 계속하고 싶던 아이들에게는 분명 상처였겠지만, 그것도 다시 평범하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면 금방 잊어버릴 거야.

모란은 가라르로 돌아왔지만 무언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안정적이고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그는 기꺼이 다시 팔데아지방 속으로 뛰어들고자 했다. 그거야말로 진짜 모험이야. 형체 없는 누군가가 여기에 머무르는 편이 낫다고 가끔 그를 설득했다. 여기 있든 거기에서든 너는 바뀌지 않으니 편안함 속에서 머무는 걸 택하라고. 모란은 그럴 때마다 흔들리다가도 정신을 바로잡았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그대로일 거라면 그때야말로 친구들 사이에 있고 싶었다.

“있지, 진 보스, 모든 게 제자리야.”

“응?”

“네가 떠난 후로 바뀐 게 없다고.”

“…?”

아니. 너희는 아카데미로 돌아갔잖아. 바뀌긴 뭐가 바뀐 게 없어. 오히려 그런 쪽은 나지. 모란은 가라르의 집에서 편안했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계속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낯선 곳이라도 배우고 싶은 게 있어 아카데미를 택했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집에 있는 동안은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했다. 안정적인 곳에 있으면 불안할 일이 없다. 불안할 일이 없다는 건 모든 게 예측 가능한 범주에서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그건 달리 말하자면 단조로웠다. 웃다가도 생각이 많아지는 날엔 억지로라도 웃을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이면 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보다 더 편안한데도 더 가라앉았다.

“그래보여도 분명 있을 거야.”

“아무리 찾아도 없으면?”

“찾아나가면 되지. 그래도 도저히 못 찾을 거 같으면 기다려. 내가 반드시 돌아갈 테니까.”

하나가 말하고 다섯이 답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 이어져도 모란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똑같이 상처투성이어도 변할 가능성이라도 가질 수 있는 쪽이 나아. 그는 옛날 생각과 두고 온 친구들 생각에 가끔은 우울해도 별로 오늘에 멈춰있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낫다는 말 같은 건 믿지 않은 지 오래였지만 나아지다가 아니다가 정도는 하겠지. 원래 누구든 그런 전철을 밟으면서 어떻게든 사는 거였다.

“돌아와서 함께하면 뭐가 달라져?”

“당장 세상이 환해보이진 않아도 앞을 조금이나마 밝히려고 노력할 수는 있잖아?”

“지금 그러고 있는 것치곤 긍정적이네.”

“뭐?”

긍정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해도 가끔 다 멈춰버리고 싶은 날은 있는 법이잖아. 그렇게 말하려다 모란은 열 개의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하고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역시 꿈이나 환각이네. 너희가 나랑 이야기하며 그런 표정을 지을 리 없잖아… 모두는 모란이 말하자마자 같은 타이밍에 같이 입을 열었다. 표정은 말하면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고 이상하게 염세적이었다. 왜 자꾸 안된다고 말하는 거야? 앞날에 대해 걱정하더라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

모란은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자신마저 안 좋은 생각에 잠길까 어두운 공간이라도 밝혀 보려 급하게 방의 불을 켰다. 평소에도 잘 켜고 살지 않아 그는 잠시 따사로운 빛에 눈을 감았다. 몇십 초가 지나서야 그는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빛 속에서 완전히 눈을 뜨고 나서야 모란은 잿빛투성이던 그들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제대로 된 빛 아래에서 모두를 마주한 순간 모란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이… 눈이 회색이잖아. 이건… 그래. 자신의 눈동자다. 꺼진 불 아래 마주해서 불을 켜면 제각각의 색으로 다시 빛날 것이란 자신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모두는 모란의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에 확답을 못하기도 하고, 아예 대답을 피하기도 하고,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그가 제시한 가능성을 부정해버리기도 하면서.

단순한 상황 회피가 아니라 모란은 이 사람들이 진짜 친구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뭐지? 그냥 안 좋은 꿈을 꾸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꿈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언젠가는 일어나겠지. 그렇다 해도 역시 좀 무섭네. 자리에서 미동이 없는 것도 그렇고, 시시각각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말만 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말하자마자 바로 답하는 것도 그렇고…

모란은 움츠러들면서도 다시 차례대로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본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가짜지만, 너희가 진짜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다시 무엇이든 보여주면 돼. 그렇게 말하려 한발 다가서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모두의 눈에 한순간에 자신이 비쳐졌다. 고개를 돌려 어딜 봐도 그대로였다. 미동 없는 자신의 얼굴이 그를 아무런 기대도 되지 않는다는 듯 바라본다.

모란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모든 게 그대로라, 앞으로도 쉽게 바뀔 리 없을 거라 초점 없이 말하던 눈동자들.

너희는 나의 공포심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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