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샛길 하나
- 정말 혼자서도 괜찮나?
“괜찮으니까 너희 조무래기들 보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방해만 돼.”
정작 제노의 답을 들은 태홍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옆의 새턴이 길길이 화를 냈다. 제노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새턴에게 하도 욕을 듣다 보니 터득한 기술이었다. 태홍과의 통화를 마친 제노가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진실호수를 조사하기 위한 간이건물. 그의 옆에는 가디안의 최면술에 당한 연구원이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제노는 진실호수로 다가갔다. 커다란 호수의 물은 깊고 푸른색을 띠었다. 고작 한 명의 연구원 밖에 있지 않은 건물을 차지하기에 너무나도 쉬웠다.
전설의 포켓몬이 언제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 강제로 끌어내는 방법도 물론 있겠지만 괜히 소란을 피워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간 곤란했다. 그래서 제노가 선택한 방법은 죽치고 버티기였다. 이러면 혹여나 감시하는 인원을 붙였다 해도 소용없을 테고.
“느긋하게 기다리자.”
염동력으로 짐 정리를 도운 가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호수에서 지낸 지도 며칠. 기지개를 켠 제노가 이른 아침 호숫가로 나왔다. 혼자 있으니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지만 항상 외투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건 역시 갑갑하다. 간만에 가벼운 차림을 한 제노가 바지 밑단을 동동 걷어 올리고 호수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볼에서 여섯 마리를 모두 꺼내었다.
“자, 시간도 많고, 날씨도 좋으니 오늘은 다같이 목욕이야.”
포켓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답했다. 이브이와 피카츄는 간만에 들어온 물속이 좋은지 이리저리 헤엄을 쳤다.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가볍게 주의를 준 제노가 두 포켓몬을 풀어주었다.
우선은 이상해꽃. 덩치가 큰 만큼 도움이 필요했다. 샤미드가 가볍게 물줄기를 쏘아내고 가디안 역시 염동력으로 호수의 물을 들이부었다. 부지런히 솔로 매끈한 가죽을 쓸 때마다 나는 소리가 좋았다.
가죽이 접히는 부분은 특히 꼼꼼하게 씻어낸다. 겨우 등 전체를 씻어낸 제노가 제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손짓하자 이상해꽃이 발라당 옆으로 누웠다. 얕은 물이 그 움직임에 따라 출렁였다.
“착하다, 착해.”
입버릇처럼 칭찬하며 비늘이 우둘투둘 돋아있는 다리를 박박 문지른다. 물론 발바닥도. 솔이 닿자 간지러운지 이상해꽃이 몸을 조금씩 뒤틀었다. 그럴 때마다 이는 작은 파도에 맞춰 피카츄와 이브이가 폴짝거렸다.
제노가 대형 포켓몬 발톱 관리용 도구를 사용해 이상해꽃의 발톱을 손질한다. 제노도 힘들지만 이상해꽃도 불편한 작업. 충분히 칭찬하며 손질을 계속하던 제노가 발톱의 마모 상태를 살폈다. 예전보다 조금 길어진 것 같기도 하고. 더 열심히 걷게 시켜야하나…. 제노가 생각에 빠진 채 계속해서 발을 잡고 있자 이상해꽃이 붙잡힌 다리를 조금 흔들었다. 불편하다는 신호에 곧장 놓아준 제노가 이상해꽃을 반대편으로 누였다.
“… … 힘들다….”
이상해꽃의 목욕을 마치고 발만 물에 담근 제노가 털썩, 아무렇게나 잔디 위로 앉았다. 하얗게 불태웠다. 들고 있던 솔은 루카리오에게 넘겨준 지 오래였다. 잠시 쉬는 동안 루카리오와 가디안에게 나머지 포켓몬들의 목욕을 맡겨두었다. 덩치가 작은 포켓몬들은 실내에서도 씻길 수 있으니 이상해꽃만큼 품을 들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느새 목욕을 마친 포켓몬들이 편을 나누어 서로를 향해 물을 뿌려댔다. 팔이 얼얼했으나 그래도 즐겁게 물장난을 치는 포켓몬들을 보니 기분은 좋았다. 그래, 본래의 목적을 잊을 정도로. 잠시 망각했던 호수에 온 이유를 다시 떠올린 제노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괜찮은 걸까, 이대로. 아무리 후회해도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순간 느껴진,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의 무게에 제노의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 찼다.
지금이라도 전부 포기하고 도망치자.
도망쳐? 여기도 도망쳐서 온 곳이잖아. 이번엔 어디로?
울렁울렁.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제노를 생각에서 꺼낸 것은 물줄기였다.
“차가워!”
깜짝 놀란 제노가 반사적으로 외치며 물줄기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샤미드였다. 아무래도 옆에 서 있는 가디안이 지시한 듯했다. 피카츄와 이브이가 축축하게 젖은 제노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멍하게 있던 그는 가디안과 눈을 마주했다.
…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는 거구나. 읏샤, 자리에서 일어난 제노가 장난스럽게 미소 짓고는 포켓몬들에게로 향했다. 첨벙첨벙, 그의 발걸음을 따라 물방울이 튀었다.
“해보자 이거지!”
제노가 달려들자 포켓몬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가 빠른 속도로 그 뒤를 쫓았다. 우선은 제일 많이 비웃은 피카츄, 너부터다!
*
타닥, 타닥. 난로가 타오르며 간간이 불티가 날렸다. 물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고 옷을 갈아입은 제노가 빗으로 이브이의 털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느덧 하늘에는 별이 떠오르고, 나머지 포켓몬들은 제노의 발치나 몬스터볼, 소파 등 각자 원하는 곳에서 잠들었다.
어릴 적 남나리에게서 처음 배운 트리밍. 이제는 능숙해진 손길로 이브이를 쓰다듬자 이브이가 완전히 녹아선, 제노의 품에서 가물가물 졸기 시작했다. 깨어있던 포켓몬 중 하나인 가디안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 엠라이트가 정말로 나타날지 궁금해?”
가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디안이 제노의 마음을 기묘하게 잘 읽어내는 것처럼, 제노 또한 가디안의 행동에서 그 생각을 손쉽게 읽어냈다. 빗을 내려놓고 이브이를 토닥이며 제노가 말했다.
“분명 나타날 거야. 확률의 문제이긴 하지만.”
전설의 포켓몬이 그렇게 쉽게 눈에 띄었다면 아마 호수는 관광객으로 득실거렸겠지. 최면술에 깊게 빠진 연구원의 컴퓨터에서 발견한 가설 중 하나에 따르면 세 포켓몬들은 육체를 두고 혼만이 빠져나와 호수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은 숨어있을 뿐이다. 커다란 액자에 걸린 벽화의 사본- 빛나는 무언가를 삼각형 모양으로 둘러싼 유크시, 엠라이트, 그리고 아그놈의 형상을 바라보던 제노가 말했다.
“정 나타나지 않는다면 강제로 끌어내는 방법도 생각해 뒀으니 걱정하지 마. 아니면, 혹시 이길 자신이 없어?”
전설의 세 포켓몬들은 에스퍼 타입. 아직 페어리 타입이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단일 에스퍼 타입인 가디안과 동일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감이 되는 공격을 한다- 즉, 더 쏟아내는 파워가 강한 쪽이 이긴다는 뜻.
제노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도발하자 가디안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서로 힘 싸움을 하는 피카츄와 이브이를 철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기 싫어하는 마음은 그 둘 못지않았다. 제노가 작게 웃자 가디안이 새초롬하게 고개를 돌렸다. 솔직하지 못한 그 행태에 제노의 웃음이 더 커졌다. 몸의 떨림에 품에서 잠들었던 이브이가 뒤척이며 기지개를 켰다. 제노가 그제야 웃던 것을 멈췄다.
덜컹, 제노 옆의 창문이 열리고 주변의 경계를 마친 루카리오가 돌아왔다.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르는 루카리오가 이상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상 없음을 알렸다. 고개를 끄덕인 제노가 둘에게 손짓했다. 그에 루카리오와 교대하려던 가디안도, 휴식을 취하려던 루카리오도 멈추었다.
“시간도 적당히 끌었고, 내일 승부를 볼 거야. 밤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끌어낼 거니까 준비해.”
그 말에 가디안이 고개를 끄덕이곤 휴식을 위해 떠나갔다. 루카리오는 묘한 눈길로 잠시 제노를 바라보다 마찬가지로 자리를 비웠다. 난로 앞, 눈을 감고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와 곤히 잠든 포켓몬들의 숨소리를 조용히 듣던 제노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었다.
잠들 때까지 루카리오가 보여주었던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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