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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한 갈래 길

“가라, 너로 정했다!”

높고 위협적인 울음소리. 던져진 몬스터볼에서 튀어나온 건 피죤투였다.

위풍당당한 커다란 날개. 멋들어지게 기른 머리깃. 얼굴에 둘린 새카만 깃털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한 제노가 잠시 말을 잃었다. 가까이서 유일하게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딥상어동이 제노의 품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노가 감상에 젖어있는 사이에도 시합은 계속되었다. 심향이 외쳤다.

“피죤투, 바람일으키기야!”

“고우스트, 버텨!”

피죤투의 날갯짓에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풍압이 일었다. 정면으로 그것을 맞은 고우스트는 날아가지 않고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였다.

“젠장, 고우스트, 다시 숨는 거야!”

“이번에도 당할 줄 알고! 피죤투, 에어슬래시!”

공기의 칼날이 고우스트가 있던 자리는 물론이고 주변의 바닥에도 마구 꽂혔다. 강한 바람에 제노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격이 명중한 것 같지는 않았다. 허나 흙먼지가 주변을 가려 다음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서서히 사위가 눈에 들어오고, 피죤투의 실루엣이 드러난 순간 이번엔 아래에서 고우스트가 튀어나왔다. 악 타입 공격 기술인 보복.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이미 피죤투가 기술을 쓴 상태이니 기술의 위력은 배가 되었다. 그러나 피죤투의 모습엔 흔들림이 없었다. 주변에 깃털들이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건….”

“실버, 고우스트를 물러나게 해!”

“근거리에서 날개치기!”

당황한 실버를 대신해 제노가 외쳤다. 하지만 심향의 지시가 빨랐다. 체력을 회복한 피죤투가 곧바로 날개를 크게 펼친 뒤 고우스트에게 부딪혔다.

“젠장, 고우스트, 최면술!”

“피죤투, 높게 날아올라서 순풍!”

순식간에 피죤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태양을 등에 진 피죤투의 모습이 푸른 하늘에 각인처럼 새카맣게 새겨졌다.

바람이 불어왔다.

“날개치기!”

“피해!”

실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피죤투가 고우스트를 향해 내리꽂혔다.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고우스트가 바닥을 구르며 실버의 발치까지 밀려났다. 조금씩 움찔거리던 고우스트는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분한 듯 입술을 짓씹는 실버와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피죤투. 한쪽이 쓰러졌음에도 제노가 여전히 멍하게 있자, 품에 안겨있던 딥상어동이 보채듯 바둥거리며 울었다. 그제야 그가 판정을 내렸다.

“… 고우스트 시합 불가능.”

“칫.”

실버가 몬스터볼로 고우스트를 들여보냈다. 심향처럼 위로의 말 같은 건 없었다. 실버는 빠르게 다음 포켓몬은 내보냈다. 볼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코일이었다.

“코일, 전기쇼크!”

“피죤투, 피하면서 날개치기!”

곳곳에 내리꽂히는 전격을 묘기처럼 피한 피죤투가 빠른 속도로 코일에게 부딪혔다. 코일은 뒤로 튕겨 나가는가 싶더니, 그대로 회전하여 피죤투에게 온몸을 부딪쳐왔다. 피죤투는 현재 순풍의 효과로 속도가 올라가 있는 상황. 제법 묵직하게 들어간 공격에 피죤투가 휘청였다. 심향이 외쳤다.

“다시 날개쉬기야!”

“틈을 주면 안 돼, 밀어붙여!”

“나도 알아! 코일, 금속음!”

야 이 자식아.

마치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듯한 불쾌한 소리가 필드 전체에 울렸다. 심판을 보고 있는 제노 또한 영향권에 있었다. 딥상어동의 귀를 막아주느라 양손을 전부 사용한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날개쉬기를 위해 움직임을 멈춘 피죤투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지금이야, 방전!”

“피죤투, 받아쳐! 에어슬래시!”

두 힘이 부딪히며 한바탕 또 먼지가 일었다. 어느샌가 제노의 후드는 벗겨져 있었다. 한 손으로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누른 제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경기를 살폈다.

비틀거리는 두 포켓몬. 먼저 쓰러진 것은 피죤투였다.

피하는 대신 맞받아치길 선택한 심향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으나 데미지에 효과까지 누적된 상태로 받은 전기 기술은 치명적이었다. 에어슬래시에 스친 코일이 비틀거리며 허공을 부유했다. 어쩐지 기세등등한 표정을 하고 있단 느낌이었다.

“피죤투 시합 불가능.”

“돌아와, 피죤투. 수고했어.”

“코일, 너도 돌아와.”

심향이 포켓몬을 돌려보내자 실버 또한 코일을 몬스터볼로 들였다. 물론 데미지를 좀 입긴 했지만 코일은 아직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상태였다. 제노가 물었다.

“벌써 들여보내는 거야?”

“교체는 자유라며?”

“그렇긴 한데….”

그 대답만으론 완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는지, 말끝을 흐리는 제노에 실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특유의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코일의 역할은 이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녀석이 마지막으로 어떤 포켓몬을 내보낼진 뻔하거든. 그렇지?”

들으란 듯 뱉는 말에 심향의 곁에서 배틀을 지켜보던 마그케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머리 위의 불꽃이 한결 거세게 타올랐다.

“나도 이 녀석을 내보내지 않으면 성에 안 찰 것 같아서 말이야. 가라, 엘리게이.”

몬스터볼에서 튀어나온 엘리게이가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서며 마그케인을 향해 위협적인 울음을 내었다. 아하, 리자몽과 거북왕이란 말이지. 제노는 납득했다. 아무래도 이건 라이벌들이 갖는 전통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격렬한 싸움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제노가 뒤로 물러나자, 곧바로 두 사람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그케인, 화염방사!”

“엘리게이, 물대포!”

필드의 정중앙에서 두 공격이 부딪히며 수증기가 격렬하게 피어올랐다. 어우, 촉촉해.

경기장을 뒤덮은 하얀 수증기를 뚫고 온몸에 불꽃을 두른 마그케인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달려들었다.

“엘리게이, 아쿠아테일로 받아쳐!”

대답하듯 목을 울린 엘리게이가 물살을 두른 꼬리를 휘둘렀다. 파앙! 굉장한 파열음과 함께 두 포켓몬이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허나 안정적으로 착지해 자세를 잡은 엘리게이와 달리, 마그케인은 상성으로 인해 데미지를 입은 것인지 호흡이 조금 흐트러져있었다.

“엘리게이, 겁나는 얼굴!”

“마그케인, 연막이야!”

엘리게이가 마그케인을 위협함과 동시에 이번에는 새카만 연기가 마그케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며 필드를 가렸다. 순식간에 마그케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실버가 왼팔을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

“네놈의 그 방식은 이제 지긋지긋할 정도라고! 엘리게이, 목을 물어뜯어 버려!”

순간 연막을 가르고 튀어나오는 마그케인을 엘리게이의 엄니가 정확하게 낚아챘다. 마그케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턱에 더욱 힘을 준 엘리게이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더니 그대로 마그케인을 집어던졌다. 마그케인의 몸이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심향이 마그케인을 부르자, 마그케인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여기서 제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기 속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유빈과 자신의 시합, 그리고 곧게 달려드는 상대를 잡아채는 것은 로켓단과의 싸움을 응용한 것이었다. 실버와 그의 포켓몬은 단 한 번 겪은 기술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사용하고 있었다. 재능이라 말할 수 있는 놀라운 센스. 계속해서 갈고 닦으면 분명 리그에 도전할 실력이 되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누군가의 모습에 제노는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언제나 주인공을 정해두고 있었다.

“포기할 거냐?”

“아니. 나도 내 마그케인도, 아직 지지 않았어!”

“그렇게 나오셔야지! 엘리게이, 물대포!”

“마그케인, 불꽃세례!”

다시 한번 수증기가 터졌다. 두 포켓몬 모두 전력을 끌어내고 있는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잠깐의 접전, 이내 밀리기 시작한 쪽은 마그케인이었다. 쏟아지는 불꽃을 모두 꺼버리고 뿜어진 물줄기가 마그케인에게 적중했다. 짧은 비명과 함께 마그케인이 완전히 쓰러졌다.

실버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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