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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한 갈래 길

아직 승리가 실감 나지 않는지, 신이나 폴짝거리는 엘리게이를 눈앞에 두고도 실버는 얼떨떨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심향은 한쪽 무릎을 꿇고 마그케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쓰러진 그의 포켓몬을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마그케인.

“멋진 경기였어, 실버.”

“… 흐, 흥. 저런 약한 녀석, 내가 이기는 게 당연하잖아.”

입꼬리 단속이나 하고 말해. 꼴에 폼을 잡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은데, 승리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입꼬리가 파들거리는 모양새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실버는 결국 제노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런다고 붉어진 귀까지 숨겨지는 건 아니었다. 제노가 웃음을 참는 사이 마그케인을 몬스터볼로 돌려보낸 심향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수고했어.”

“아니에요, 결국 졌는걸요.”

“네 포켓몬들이 널 믿는 게 보여서 좋았어. 그런 대범한 판단은 보통의 유대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야.”

“감사합니다!”

“뭘 느긋하게 감상을 늘어놓는 거야?”

훈훈한 분위기에 실버가 끼어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감정 조절이 되는지, 평소와 같은 뚱한 표정이었다. 미간을 좁힌 실버가 심향을 노려보았다.

“잊었어? 내가 이기면 우리 일에 더 이상 참견하지 않기로 한 거.”

“앗, 그랬던가?”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머쓱하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은 심향이 실버에게 말했다.

“그치만 실버와의 배틀이 너무 즐거워서, 그런 건 생각할 틈도 없었는걸.”

… 우와. 제노가 속으로 감탄하며 한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심향이같은 애가 저런 곧은 눈을 하고 뱉는 대사는 파괴력이 엄청나구나. 실버에게도 만만치 않은 데미지가 들어갔는지, 그가 소리를 질렀다.

“하! 웃기시네! 져놓고 ‘배틀이 즐거워’? 잘 들어, 포켓몬들은 그저-어업,”

네, 네. 잘 들었습니다. 제노는 실버가 더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기 전에 그의 얼굴에 딥상어동을 붙였다. 실버의 말은 딥상어동의 배에 막혀 엉망으로 끝이 났다. 양팔과 다리로 실버의 머리를 끌어안은 딥상어동은 뭐가 그리 좋은지 높은 소리로 울어댔다.

“우와, 그 포켓몬은 뭐예요? 처음 봐요!”

“신오지방에서 데려온 아이야.”

“누나 신오지방에 가보셨어요?! 대단하다! 거긴 어땠어요? 다른 신기한 포켓몬들도 많겠죠?!”

“천천히 얘기해줄게.”

“- 뭘 멋대로 둘이 가는 거야!”

얼굴에서 딥상어동을 떼어낸 실버가 숨이 막혔는지 벌게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심향과 사이좋게 걸어가던 제노가 실버를 돌아보며 말했다.

“슬슬 당 떨어졌지? 가자, 간식 사줄게.”

“….”

“정말요? 아싸!”

*

배틀로 지친 포켓몬들은 센터에 맡기고 세 사람은 해변이 잘 보이는 카페에 자리 잡았다.

갈 때부터 카페 안 좌석에 앉을 때까지 투덜거리던 실버는 음료에 디저트까지 시켜주자 조용해졌다. 단순한 녀석. 세 사람은 마카롱을 먹으며 제노가 챙겨온 노트북으로 규리의 경기 영상을 보았다. 원래 뭐 보면서 먹는 간식이 제일 빨리 사라진다고, 한 바구니째로 시켰던 마카롱이 이제 한눈에 셀 수 있을 정도의 양으로 바뀌었다.

마카롱이 아무리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될 일인가? 세상에서 가장 디저트를 못 즐기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제노는 망설이지 않고 심향과 실버를 가리킬 것이었다. 다음에는 무조건 질보다는 양이 많은 걸 사줘야겠다.

심향이 이미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음료를 빨대로 빨아들이자 후루루룹하는 소리가 났다. 실버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심향을 노려보았다.

“으음- 강철 타입이라. 잘 모르겠네요.”

“넌 마그케인이 있으니까, 마비만 조심한다면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럴까요? 하지만 저 강철톤, 무지 튼튼해 보이는걸요.”

만약 앞선 코일 두 마리를 상대하느라 마그케인이 힘을 소모한다면 강철톤과 대등하게 싸우긴 힘들 터였다. 그리고 과연 강철 타입 관장이 불 타입에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 두지 않았을까?

혹시 모르니 마그케인은 최대한 아껴두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굴 우선으로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도전할 포켓몬의 구성을 짜던 심향이 머리를 감싸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냥 불 타입 포켓몬으로 밀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던 제노에게는 공감하기 힘든 고민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빨대로 아메리카노에 든 얼음을 휘젓던 제노가 물었다.

“실버 넌 어때?”

“뭐가?”

“강철 타입 관장을 공략할 방법 말이야.”

“내가 굳이 저 녀석이 있는 자리에서 말해야 해?”

실버가 심향을 향해 턱짓했다. 실버가 자신보다 먼저 전략을 짰다는 게 충격이었는지, 심향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파고들어 갔다. 하긴, 실버는 이미 코일을 잘 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 이것 좀 봐. 이 사람, 가디로 강철톤을 상대하고 있어.”

정보의 바다를 계속해서 타고 들어가던 제노가 불 타입 포켓몬으로 규리와 싸운 트레이너의 배틀 영상을 틀자, 심향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실버도 먹던 것을 멈추고 영상에 집중했다.

결과는 가디의 완패.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시작한 강철톤이 돌떨구기로 가디를 몰아넣더니, 아이언테일로 날려버렸다. 가디는 불꽃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심향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다. 저런.

“모래바람은 확실히 까다로운 조건이야. 똑같이 날씨를 바꿔서 상대할 게 아니라면, 대응책을 생각해야 해.”

“으으… 좋아!”

기합을 넣은 심향이 손바닥으로 양 뺨을 챱챱, 가볍게 때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녁때까지 특훈이야! 누나, 도와주실 거죠?”

“상관없긴 한데… 난 코일이나 강철톤 같은 포켓몬은 없어.”

“괜찮아요!”

“뭘 마음대로 괜찮다는 거야.”

조용히 있던 실버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심향이 순간 발끈했지만, 배틀에서 진 것이 떠올랐는지 입을 다물었다.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난 실버가 고개를 살짝 들고 심향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특훈을 하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그걸 내가 좀 봐도 괜찮겠지? 이쪽은 제노를 빌려주는 입장이니까.”

그, 미안한데 내가 언제부터 네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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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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