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

너와 나의 게이트에서 제로

논컾처럼써놓고 씨피라고우기기 ON

학생회장은 원래 잘했잖아, 천재니까.

어느 날 이야기할 게 있어 어떤 학생과의 승부가 막 끝난 네모를 만나러 갔을 때, 모란은 그 말을 들은 네모의 표정을 기억한다. 네모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라, 모란은 언제 그런 말을 들었냐는 듯 해맑게 왔어? 하고 웃는 네모에게 응. 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회장이란 단어든 천재라는 단어든 수식어는 늘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모란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회장은 더 알 것도 없고, 천재. 그 역시 자신도 가진 장식이었지만, 무게추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때로 네모에게 그 수식어는 확실히 무게추 같았다. 자세히 안다면 사실도 아니고, 말한대도 굳이 아니라고 답하기에도 뭐한 정도의 무게를 가진.

같은 천재라 해도 실제로 타고났기에, 도움이 되기에, 써먹을 수 있기에 자신은 죄를 짓고도 용서받았다. 하지만 애초에 사실도 아니고, 용서받을 일도 없으며 앞으로도 딱히 그럴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날개를 달아주기는커녕 더욱 무겁게 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잘 몰랐어도, 지금이라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더 나아지고자 하는지 모란은 알고 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다. 그게 친구를 이해 못 하는 사람에 대한 반발심인지, 네모를 더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 계속 그냥 넘어갔던 일이 왜 이제야 신경 쓰이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확실한 건, 모란은 ‘노력하는 네모’를 안다. 그는 안주하지 않는다. 차라리 멈춰 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망치기도 했던 자신과 달리 그는 항상 올곧았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건 단순히 친구를 도와주고 싶다는 개념과는 조금 다른 일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그는 네모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당연하지만, 사람도 만나지 않은 채 정보부터 수집하고 봤던 예전의 방식하고는 다르다.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부딪히는 게 때에 따라서는 옳은 방식이라 믿고 그렇게 해야만 했다. 네모같이 감정에 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

네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역시 승부밖에 없었다. 네모와는 달리 그는 승부를 일상적으로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필요하면 하고, 해야 할 때 하고, 친구들과 함께할 때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나서서 먼저 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둘은 각자의 세계가 확고했고, 달리 말하자면 함께해도 좋아하는 게 너무 달랐다.

‘그러고 보니 네모랑 승부한 적은 없네.’

스타단 친구들과는 STC가 세워진 후 가끔, 푸름과는 스타더스트 대작전 마지막에, 페퍼와는 상대는 아닐지라도 북신에 놀러 갔을 때 함께한 적이 있었지만, 네모와는 한 번도 없었다. 모란은 승부에 큰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푸름과 스타더스트 대작전 마지막 승부를 할 때 생각이 바뀌었다. 포켓몬 승부는 서로와 서로의 진심을 부딪치는 일……. 이라고.

‘먼저 승부하자고 하면 당연히 좋아하겠지. 그렇지만….’

어디서 하지? 배틀코트야 널린 게 배틀코트고 빌리기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무 데서나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오타쿠이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장소의 중요성’을 알았다. 마치 최종 결전은 모든 걸 시작한 곳에서 하는 게 좋잖아? 하고 열변을 토하는 게임 중독자들처럼, 그가 네모랑 승부를 해야 한다면 무언가 의미 있는 곳에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모란은 네모와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를 면대면으로 처음 만난 건 에리어 제로로 향하는 제로게이트 안이었다. 이제는 그때 어색했던 기억도 신기루처럼 느껴질 정도로 친해졌지만, 그를 처음 봤을 때 해맑게 인사하는 모습에 당황했던 일을 모란은 아직도 기억한다. 겉보기부터 자신과 많이 달라 보이지만 친구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건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친해진 후로는 문제 없이 지내다가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 계속해서 보였다. 이를테면 아까와 같은 말들, 원래 잘했잖아, 학생회장은 뭐든 잘하잖아, 천재, 역시 학생회장은, 네모는 항상, 네모라면 역시……. 대부분은 악의 없는 칭찬이었지만 좋은 의도로 말했더라도 좋게 다가오지 않기에 그가 가끔 뒤돌아서 씁쓸하게 웃었으리라고 모란은 어림짐작했다. 짊어진 게 너무 많은 사람은 그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게 맞대도 때론 어쩔 수 없이 피곤하다. 그건 자신의 친구를, 네모를, 또 자신을 안다면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제로게이트 안은 좀 그렇고, 뭔가 다른 방법이….’

모란은 자신이 제로게이트로 향하기까지의 길을 되짚어보았다. 당연하지만, 이동하는 데 많은 시간과 체력을 쓰고 싶지 않아 참푸르마을 서부에서 내린 뒤 힘들게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간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제로게이트로 향하는 길 끝에 섰을 때-

‘진짜 평범한 곳에 있었지, 제로게이트.’

평범한 지역에 히든 보스의 던전이?! 같은 곳이 팔데아에 있다면 모란은 그게 팔데아리그와 제로게이트 두 군데일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가 뜬금없이 여긴 뭐야? 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입구 뒤에 있는 비범한 장소, 진짜 게임 같았다. 그사이 짧은 길을 걸어가면 평범한 사람인 누가 걸어도 점점 비범해지는 기분을 느낄 것이었다. 점점 평범하지 않은 영역으로 넘어가려고 하기 직전, 그 전에 설 수 있다면 지금보다 발걸음이 가벼울 텐데….

그렇다면 역시 ‘우리’가 배틀해야 마땅한 장소는 단 한 곳 뿐이다.

모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바로 네모에게 연락했다. 내일 시간 있으면 포켓몬 승부하자. 1분도 안 되어 텍스트로만 봐도 신난 듯한 답이 날아왔다. 정말? 모란이 먼저 하자고 하니까 너무 기뻐! 언제? 어디서? 모란은 바로 답을 보냈다. 제로게이트 입구, 그러니까 제로게이트 말고…. 그 입구. 시간은 괜찮으면 12시 어때? 아, 물론 낮 12시. 끝나고 같이 밥 먹자. 현실에서 말하는 능력이 아직 부족해 잘 전해졌나 모란이 걱정하자마자 해맑은 메시지가 돌아왔다. 좋아! 어떤 멤버로 할지 고민해봐야겠어! 기대된다! 내일 봐! 모란이 잠깐이나마 걱정하던 게 무색하게 네모는 신나 보였다. 승부한다면 나도 네모의 진심을 알 수 있을까. 모란은 스마트로토무를 껐다.

내일도 자신의 멤버가 그대로일 거라는 사실은 당연했다.

*

여기서 또 배틀하자고 하면 내가 바우첼이다. 모란은 제로게이트 입구까지 올라가며 어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두 번 다시는 못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나와서 걷자니 발이 아프고 정신이 없었다. 네모는 모란과 같이 부실한 체력의 소유자였지만 그와는 달리 부지런한 성격이라, 이미 힘들게 오르막을 걷고 한숨 돌리며 승부하기 전까지 체력을 보충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은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멀리서 늘 보던 표정의 네모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안녕.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아냐! 모란이가 먼저 승부하자고 한 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일찍 달려왔으니까!”

“그, 그래. 근데 나 너무 지쳐서, 잠시만 쉬었다가….”

“알았어! 안 그래도 올라오면서 모란이도 힘들겠다고 생각했거든!”

모란은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 천천히 네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과 천재의 경계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경사진 땅 위에 서도 올곧았다. 네모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를 위태롭게 하는 건, 자기 자신이 아닌 그를 어느 한쪽으로 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겠지.

그의 미소를 못 잊겠다고 생각했을 적부터, 줄곧 결심해왔다. 단순히 너를 이해해, 너는 항상 노력하는데 남들은 천재라고 하니까 서운하지, 같은 말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남의 말은 신경 쓰지 말라고, 뭐라고 하든 너 자신은 변하지 않으니까…. 라고 말해주겠다고.

어차피 실제로 천재 해커라는 소리를 듣고 자신도 딱히 부정할 수 없는 이상 ‘천재인지 아닌지’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고 모란은 생각했다. 그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틈은 컸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건, 네모가 그런 말들 따위에 흔들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이기심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렇지만, 타인에게 흔들릴 때 잡아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신이었으면 했다. 우리는 사실은 다를지라도 천재라는 말을 듣고,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만 금방 지치고, 포켓몬 승부를 즐기거나 그렇지 않지만, 포켓몬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다. 그리고…. 올곧아 보여도 가끔 타인 때문에 흔들린다. 그래서 더 의지가 되었으면 했다.

“그, 어, 있잖아.”

“응? 왜? 이제 좀 괜찮아졌어?”

“그렇긴 한데, 물어볼 게 있어서.”

“음? 뭔데?”

“승부하기 전에 무슨 생각해? 그, 그냥 궁금해서.”

“아무 생각 없어!”

예상 밖의 대답에 모란은 당황했다.

“그, 그래? 네모라면 항상 승부에 진심이니까, 전략이라도 생각할 줄 알았어.”

“그렇긴 한데, 오히려 바로 전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지더라. 일부러 머리를 비운다기보단 지금 승부에 집중하겠어! 라는 느낌?”

“그렇구나….”

“근데 그런 건 갑자기 왜?”

“그, 그냥. 네모는 매번 포켓몬 승부를 진심으로 즐거워하니까……. 어떻게 지치지도 않고 그렇게 한결같은지 궁금했어.”

“그야 당연하지! 좋아하니까.”

좋아하니까 계속한다, 라…. 그러면 그가 악의 없는 모진 말에 때로 피곤해하면서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명확했다. 단순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원동력이 되어주기에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한다. 그건 분명 네모가 가진 장점이었다. 그러나 장점이 늘 장점으로만 활용된다면 모든 게 지금처럼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가진 마음을, 차근차근 쌓아 올린 장점을 ‘그건 원래부터 너라서 당연하니까’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때문에, 그는 여전히 역으로 흔들리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네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모란이도 좋아하는 거 아냐? 나…”

“너, 너 뭐?”

“-랑 하는 포켓몬 승부 말이야! 그래서 오늘 부른 거지?”

“그, 그렇지. 친구랑 하는 포켓몬 승부는 재밌지, 그렇고말고.”

모란이 당황해 얼버무리는 사이 네모는 난데없이 두 팔을 쭉 뻗고 높은 곳이라 그런지 상쾌하다며 이런 곳에서 승부할 줄은 몰랐는데! 라고 한껏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모란은 그 시선이 부담스럽지는 않았지만, 괜히 눈을 마주보기가 힘들어 그렇네. 하며 똑같이 상쾌하다는 척 하늘이나 봤다. 하늘은 고요했고,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땅 위에서 너희는 똑같이 아무것도 아닌, 어떤 수식어도 붙을 필요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그러니까! 오늘은 잘 부탁해.”

“아하하! 뭘 새삼스레. 준비됐으면 바로 시작하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우리는 함께하기 때문에. 아마도 그래서겠지. 내딛는 한 발자국은, 때로는 앞에서 누가 끌어주기에, 때로는 뒤에서 누가 밀어주기에 무겁더라도 금방 가벼워진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란은 깨달았다. 굳이 수식어의 무게를 덜어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우리는 함께하는 것만으로 언제든 다 벗어던지고 천재도, 범재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있어도 된다는 걸.


사용한 BGM / 제로 - PINOCCHIOP(feat. 하츠네 미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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