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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샛길 하나

쿠르릉, 하늘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구름이 모이고 사위가 어두워진다. 제노를 노리던 아그놈과 유크시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어마어마한 크기의 광선이 호수를 향해 쏘아졌다.

꼭 신화 속에 나오는 얘기처럼 호수의 물이 갈라지고, 그대로 커다란 파도가 되어 호수 주변을 덮쳤다. 영향권에 있던 제노가 물살에 밀려나 다시 한번 나무줄기에 부딪혔다.

이거 분명 멍들었을 거야…. 제노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비처럼 쏟아지던 호수의 물이 멈추고, 시야가 걷혔다.

하늘에서 강림한 것은 새카만 드래곤 포켓몬이었다.

정확히는 드래곤/비행 타입이지만. 제노가 멍하니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드래곤 포켓몬이 다시 몸에 기운을 끌어모았다. 아그놈과 유크시가 급하게 양팔을 올리고, 하늘로 사이코 에너지를 쏘아 보냈다.

날아올라 간 사이코 에너지가 허공에서 사라지자마자 두 포켓몬은 드래곤 포켓몬의 몸체에 부딪혔다. 그대로 땅으로 처박히며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 저거 죽은 거 아냐? 제노가 조심스럽게 아그놈과 유크시가 추락한 자리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만신창이가 된 전설의 포켓몬 두 마리가 쓰러져있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드래곤 포켓몬이 기다란 몸체를 뽐내며 제노의 곁으로 유유히 다가왔다.

“수고했어. … 레쿠쟈.”

포켓몬은 말이 없었다. 다만 검은자위 사이 빛나는 노란 눈동자로 제노를 바라볼 뿐이었다.

평소라면 할 일을 마치고 바로 볼로 돌아가 잠드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포획까지 마치라는 의미일까? 제노가 두 포켓몬을 하이퍼볼에 집어넣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둘 모두 별다른 저항 없이 잡혀들어왔다.

“됐지? 이제-”

제노가 레쿠쟈에게 볼을 내밀어 보여 주던 그때, 허공이 갈라지며 사이코에너지가 쏘아졌다. 아그놈과 유크시가 레쿠쟈에게 당하기 전 온 힘을 쥐어짜 내 사용한 미래예지. 제 쪽으로 향하는 빛에 제노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리고, 강한 파열음이 났다.

허나 통증은 없었다. 살며시 팔을 내리자 보인 것은 제노를 둥글게 감싼 레쿠쟈의 몸체였다. 뱀처럼 매끄럽게 움직인 몸이 공격이 끝나자 서서히 제노를 풀어주었다. 위를 올려다본다. 레쿠쟈는 그다지 데미지를 입지 않은듯했다.

“아… 그, 고마워.”

레쿠쟈는 그제야 대답하듯 작게 으르렁거렸다. 거의 성인 한 명만 한 머리가 제노의 코앞으로 들이밀어졌다. 티 하나 없는 검은 비늘이 태양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제노가 정신을 차리고 레쿠쟈의 코끝에 몬스터볼을 갖다 대었다. 레쿠쟈는 볼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어느새 하늘은 맑아져 있었다. 제노는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짐을 챙기기 위해 간이건물로 향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라지만 한바탕 소란을 피웠으니 서둘러 자리를 떠나야 했다.

한 지방의 기둥을 무너트린 것치곤 참 초라한 뒷모습이었다.

*

제노는 가장 가까운 포켓몬 센터로 향했다. 만신창이인 그의 꼴을 보고 놀란 간호순이 포켓몬들은 물론 제노까지 치료했다. 등의 한가운데에 흉측할 정도로 커다란 피멍이 들어있었다.

포켓몬들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간호순의 질문에 제노는 산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야생 포켓몬들에게 당했다고 둘러댔다. … 거하게 잔소리를 들었다.

상체에 온통 붕대투성이가 된 제노는 치료를 마치자마자 포켓기어에 태홍의 번호를 입력했다. ‘포획 완료.’ 간단한 문자를 보내고 침대에 늘어져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순이 치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제노 님, 여기 맡겨주신 포켓몬들이에요.”

제노가 몬스터볼 여섯 개를 모두 벨트에 끼우는 것을 확인한 간호순이 이번에는 봉투 하나와 치료를 위해 벗어두었던 외투를 건네며 말했다.

“여기, 이건 멍에 바르는 연고예요. 자주 발라주세요. 제가 해드린 것처럼 붕대를 감으시면 통증이 덜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가능하시면 오늘은 쉬시면서 냉찜질을 하시고요. 그리고 밖에 보호자분께서 데리러 오셨어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한 제노가 외투를 입고 짐을 챙겨 센터를 나섰다. 후드와 모자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검은 차량 한 대. 그리고 그 앞에는 새턴이 서 있었다. 다행히도 평범한 의상. 제노가 나오자마자 그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 보인다.

“타시죠.”

“몬스터볼만 건네주면 안 될까.”

“타시죠.”

“….”

내가 너는 꼭 패고 만다. 제노가 느릿느릿 차량에 탑승했다.

소리 없이 달린 차량이 도착한 곳은 역시나 장막시티의 빌딩이었다. 습, 숨을 들이켜며 제노가 잠에서 깨어났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고급 세단에 순간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졸아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협력 중이라곤 하지만 범죄 조직의 차 안에서 긴장을 풀다니. … 침까지 흘린 건 아니겠지. 제노가 머쓱하게 제 입가를 문지르고 있을 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새턴과 백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

“….”

“… 깨우지 그랬어.”

“몇 번이고 불렀습니다. 안 깨어나시더군요.”

“그냥 흔들어보면 될 텐데….”

“아무리 상대가 당신이어도, 그런 무례한 짓을 하진 않습니다.”

그렇구나. 다행히 뽀송한 얼굴을 확인한 제노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새턴은 참, 말투가 더럽고, 성격도 안 좋고, 여전히 나를 경계하고 싫어하고 거기에 범죄 조직의 간부이기까지 하지만 매너 하나는 괜찮은 녀석이었다.

… 나열하고 나니 안 좋은 점이 더 많군. 제노는 새턴을 때리려는 계획을 더욱 강고히 하며 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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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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