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폐된 드래곤은 유리구슬 너머로 무엇을 보나 -2-
-prologue
제빈은 처음엔 시선을 발화자에게 똑바로 향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등 토론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했다. 배틀에 노련하기도 하고, 공부는 아예 손을 놨지만 포켓몬과 관련한 지식엔 빠삭한 덕에 다양한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꺼풀이 점점 내려오고 아예 대놓고 턱 밑으로 팔짱을 끼는 등, 점차 안 듣고 있다는 듯한 불성실한 태도를 내보이는 듯했다.
"아~ 벌써 지루하네... 그것보다 쌤~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엣?!?!! 무, 뭐뭐뭣..."
제빈!!!!!!!!! 얼굴이 잘 익은 과사삭벌레처럼 붉어진 카지가 사납게 발을 구르며 꽥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야~ 저 낌새를 보아하니 좋아하는 아이가 있나 보구만~ 제빈은 달아오른 얼굴의 열을 식히기 위해 딴 곳을 보며 손부채질을 하는 앳된 소년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좋을 때구만, 좋을 때야~ 알고 그런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꽁꽁 감춰둔 풋사랑을 정확히 지적해 카지를 행동 불능 상태로 만든 제빈은 의자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가서 그대로 자기보다 낮은 어깨에 팔을 걸쳤다. 키와 체격이 월등하게 차이나 마치 헤드록을 당하는 것 같은 불편함에 카지는 왁왁 짜증을 내며 제빈의 팔을 치우려 애를 썼다.
“농담, 농담~ 아, 그러고 보니 거기 너. 아까 카지가 말한 전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어, 응? 나? 어... 그러니까... 내구에 노력치를 투자했다면 ‘씨뿌리기’ 같은 기술도 괜찮은 것 같아.”
한 학생이 자기 생각을 말하자 다른 학생들로 일제히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가라르에서 유명한 전술이었다던, 철벽-바디프레스라던가!”
“에이~ 그건 싱글 쪽 전략이잖아~”
“요즘은 사이코필드를 활용한 파티가 유행이라던데?”
서로 전략을 공유하는 흥분에 가득 찬 말소리가 울리면서 부실이 이전보다 떠들썩해졌다. 다른 부원의 목소리를 이제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한 카지는 그러고 보니 토론을 진행하면서 여태까지 자신만 계속 말하고 있었단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우우. 나는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래서는 그때처럼 또 독선적으로 행동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카지는 제빈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것도 멈추고 팔을 밑으로 늘어뜨린 채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아직도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반복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실책을 저질렀으면 거기서 배우고 더 나은 사람이 돼야 하는데, 자신은 여전히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만 할 뿐이 아닌가. 지금 자신을 보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무슨 감정이 떠올라 있을까. 카지는 고개를 들기가 무서웠다.
자신의 팔 안에서 물에서 막 건져 올린 잉어킹처럼 팔딱거리던 감각이 잠잠해지자 제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후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 차이 때문만은 아닐 텐데, 내려다 본 시선에서는 카지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라... 방금까지만 해도 활발하다 못해 사나웠는데? 시크릿 투톤, 이제는 리버스 투톤이 된 머리 위로 바짝 묶은 꽁지머리가 주인의 감정을 반영하기라도 한 건지 시무룩하게 축 처진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후배를 바라보는 금빛 눈에 노련한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
“... 카지도 좋은 전술 많이 말했는데 칭찬 안 해줘서 삐졌어? 이 제빈 님이 배려가 부족했네~ 지금이라도 칭찬해줄게. 아이고~ 우리 카지 똑똑하다~”
“윽...! 이, 이거 놔! 머리 다 망가지잖아!!”
어깨에 걸친 팔을 유지한 채, 제빈은 반대쪽 손으로 카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얼핏 보면 거칠게 쓰다듬는 것 같았지만 의외로 아픈 감각은 들지 않았다. 묶은 머릿결 속을 파고들며 제멋대로 만지는 탓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끊어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따가운 느낌은 하나도 없었고 제빈은 그를 정중하게 다루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 좋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머리 위 손을 탁 소리 나게 쳐내려 했지만, 어차피 힘에서 밀릴 게 뻔하다면서 카지는 저항하는 척만 하며 장난치는 제빈을 그대로 두었다. 과연 그게 체념인지 변명인지는 모르지만.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턱, 멈추고 평소와 달리 한 단계 낮은 제빈의 목소리가 조용히 귀에 내려앉았다.
“카지의 배틀 실력은 대단하니까 저 애들도 분명 네가 말한 전술을 귀담아듣고 있었을 거야. 혼자 잘난 척 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걸? 그렇지만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발언권을 돌려주는 걸 신경 쓰면 더 좋을 거 같아. 한 사람만 계속 말하면 토론이 아니라 진짜 강연이 돼버리니까 말이지~”
“... 응...”
전에 없을 정도로 가까워진 제빈의 얼굴에 카지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숨을 멈췄다가 눈을 바깥으로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제빈은 토론 중에 쓸데없는 농담을 하며 훼방을 놓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카지의 독주를 끊고 불만이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을 유머로 환기해 모두가 토론하기 편한 분위기로 요령 좋게 바꾼 것이었다. 무례하고 가벼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제빈은 나름대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한발짝 떨어져 전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배려에 카지는 하솔이 말한 ‘악역을 자처한다.’는 평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심술궂은 면만 줄이면 좋을 것 같은데...’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카지는 제빈을 다시 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제빈 님께서도 추천하고 싶은 전술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제빈이 말끝을 늘이며 토론에 끼어들었다. 얼굴에 장난스러운 빛이 서렸단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평범한 전술 얘기인데 설마 무슨 엄한 헛소리라도 하겠-
“검은눈빛-멸망의노래 한번 어때? 츄라이~ 츄라이~”
“아니, 제빈. 그건 정말 아니야.”
어디서 약을 팔아... 정색한 얼굴로 카지는 아직까지 어깨에 걸쳐진 팔을 차갑게 쳐냈다. 감히 상종도 못할 것을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카지는 아까 전 제빈에게 내린 평가를 다시 수정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무튼 리그부는 그렇게 활기찼던 예전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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