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 과자의 날
가지 않은 길
· 심향 루트. 하지만 로맨스는 거의 없습니다….
포켓몬 센터 앞.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심향에게 누군가 다가온다.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심향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
“누나!!”
“나는 보이지도 않냐?”
“실버도 안녕!”
히죽 웃은 심향이 곧장 제노의 앞으로 달려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부쩍 자란 키. 성도에 있을 때만 해도 실버보다 꽤 작았는데, 이제는 그와 엇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제노가 그를 올려다보자 심향이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 곧장 제노를 끌어안으려던 순간, 실버가 그를 붙잡고 제 쪽으로 당겨 포옹에 실패하고 말았다.
“뭐야!”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뭐긴, 반가움의 포옹이지!”
두 사람은 한동안 만나지 않았던 공백 기간이 없었던 것처럼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건강해 보여서 참 다행이다.
“모자 벗었네?”
“헤헤, 네! 어때요?”
심향이 제 앞머리를 매만지며 제노에게 물었다. 모자를 벗어도 튀어나온 앞머리는 여전한 거구나. 제노를 대신해 실버가 답했다.
“어떻기는, 못생겼다.”
“뭐야? 누나한테 잘 보이려고 엄청 고심한 건데!”
“그럼 그 앞머리부터 어떻게 해.”
“이건 내 나름의 패션 철학이야!”
그런 거였구나…. 실버를 향해 투덜거리던 심향이 다시 제노를 바라보았다.
“누나도 스타일이 달라지셨네요, 예뻐요!”
“내가 수상한 취급을 받으면 실버까지 곤란해지니까.”
심향의 말대로 제노는 평소에 가죽처럼 입고 다니던 검은색 일색의 차림 대신 평범한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모자 또한 헌팅캡으로 바꾸었다. 실버가 제발 안 쓸 수는 없느냐 물었지만, 바깥에 나가는데 모자가 없으니 역시 허전했다. 헌팅캡은 긴 토의 끝에 내려진 합의안이었다. 제노는 습관적으로 모자를 깊게 눌러쓰려다, 실버의 날카로운 눈길에 그만두며 머쓱하게 웃었다.
여기는 인공섬 파시오. 세계 각지의 강자들이 월드포켓몬마스터즈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장소. 제노는 실버의 동행인으로서 오게 되었다(참고로 따라오지 않았다간 곧 대폭발할 것 같은 기세였다). 실버 또한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안 심향이 먼저 연락을 취해 세 사람은 다시 모이게 된 것이었다.
“그럼 일단 등록 먼저-”
“자, 실버도 배고프지? 내가 엄청 맛있는 식당을 알고 있다고? 가자!”
갑자기 심향이 실버의 등을 멋대로 밀고 가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냐며 불평하는 실버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제노가 고개를 들어 광장의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았다. 마침 점심시간이긴 하지.
심향이 뒤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누나- 빨리 오세요-!”
고개를 끄덕인 제노가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쫓았다.
*
센트럴시티의 한 식당.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이 잠시 자리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아니, 사실 느긋한 건 제노뿐일지도 몰랐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에게서 의자를 최대한 멀찍이 떨어트린 채 여전히 반대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식당에 들어왔을 때 곧장 제노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던 심향을, 실버가 자신의 옆으로 끌고 간 이후 계속 이 상태다.
묘한 분위기를 깬 건 알림음이었다. 실버가 주머니에서 포켓기어를 꺼내 확인하더니 쯧, 혀를 찼다.
“더는 미룰 수 없겠어. 서둘러 등록을 마치라고 재촉하는 연락이야.”
“그럼 실버는 센터에 다녀와. 난 누나랑 근처를 구경하고 있을게.”
심향이 냉큼 제안하는 말에 실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누가 비주기의 아들 아니랄까 봐 위협하는 표정 하나는 일품이었다. 실버가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어차피 등록은 실버 혼자만 하면 되잖아? 누나가 길 잃는 게 걱정되는 거라면 내가 딱 옆에 붙어있을 테니 걱정 마!”
“너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너 때문에!”
실버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가 왜 이렇게 심향을 경계하는지 아는 제노는 애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성도에서 여행을 계속하면서, 제노를 향한 심향의 스킨십은 묘하게 정도가 심해졌다. 무구한 그의 표정에 자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판단하지 못한 제노는 그를 떨쳐내지도 못하고 혼자서 불편을 감내했다. 그리고 그런 제노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실버였다. 이후 실버는 심향이 제노에게로 다가올 때마다 눈을 세모나게 치켜뜨고 세콤 역할을 자처했다.
“… 난 괜찮으니까 다녀와.”
실버가 바라보는 것에 잠시 고민한 제노가 말했다. 실버가 영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제노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제 심향도 다 컸고, 게다가 언제까지고 실버에게 밀어내는 역할을 맡길 수는 없었다. 제노는 심향과 단둘이 되면 단호하게 한마디 할 각오로 마음을 단단히 했다.
*
그리고 그 각오는 심향이 내민 물건에 박살 났다.
식당에서 나온 심향은 실버가 떠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걷던 것을 멈춰서더니, 제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안에서 예쁘게 포장된 봉지 하나를 제노에게 건넸다.
“… 이게 뭐야?”
“짠! 누나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오늘 막대 과자의 날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순박하게 웃는 얼굴에 제노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렇게 착한 애가 무슨 흑심이 있어서 나한테 그랬겠니, 그냥 스킨십을 좋아하는 것뿐이겠지, 응. 떠나기 전 실버가 몇 번이고 당부했던 말들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제노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이런 건 처음 받아봐.”
“정말요?”
아싸! 제노의 말에 심향이 과하게 즐거워했다. 너 내가 인기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쁘니. 예쁜 모양새를 뽐내는 과자를 바라보던 제노가 말했다.
“어떡하지, 난 준비한 게 없는데… 밥값이라도 보낼까?”
“괜찮아요. 챔피언으로서 버는 수입이 꽤 되거든요.”
제 입으로 말해놓고 부끄러운지 조금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심향에게, 제노가 순간 머릿속에 스친 의문을 뱉었다.
너 소득세 신고는 할 줄 아니? 다급한 질문에는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었다. 갓 챔피언이 된 레드가 큰 금액을 기부했다가 그보다 더한 세금 폭탄을 맞았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심향은 목호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제노는 내적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목호 씨…. 제노가 파시오 어딘가에 있을 목호를 향해 속으로 감사 인사를 하는 사이, 심향의 제노의 손에서 봉지를 다시 가져갔다.
“어쨌든 당장 보답하실 수 없단 말이죠?”
“어….”
그렇다고 줬다 뺏는 거야…? 제노가 당황하자 짓궂게 웃은 심향이 막대 과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한쪽 끝을 이로 물어 보였다.
“그럼 저랑 게임해요!”
“….”
… 아무래도 얘 흑심 있는 것 같아. 제노가 순간 방심한 자신을 나무랐다. 옆에 있지도 않은 실버의 잔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작게 한숨 쉰 제노가 막대 과자의 반대쪽 끝을 잡고, 똑, 부러트려 버렸다.
“됐지?”
“이게 뭐예요! 다시 해요, 다시!”
봉지 속에 손을 집어넣고 과자 하나를 더 꺼내려는 심향을 무시한 채 제노가 앞서 걸었다. 부러트린 막대 과자를 콰삭콰삭 씹어먹어 버린다. … 맛있다.
심향이 그 뒤를 졸졸 따르며 졸라댔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해요, 네?”
“너 자꾸 그러면 버리고 간다.”
“누나 저 아니면 길도 모르시잖아요.”
“….”
이 자식이. 제노가 멈춰 섰다. 그에 심향이 곧장 제노의 앞을 가로막았다. 손에는 새로운 막대 과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제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심향아,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 하는 거야.”
“전 누나 좋아하는데요! 누나는 저 안 좋아해요?”
심향이 울망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사람도 초롱초롱눈동자를 쓸 수 있던가. 제노가 다시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는 사이, 연속해서 공격이 들어왔다.
“누나는 실버가 좋아요, 아님 제가 좋아요?”
“….”
갑자기 들이밀어진 이지선다. 어린 시절 오 박사님께도 들어보지 못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질문이었다. 한카리아스가 아직 딥상어동이던 시절 자주 난천 씨랑 자신 중에 누가 더 좋으냐 물어보곤 했는데, 역으로 당하니 참으로 곤란했다. 미안해, 한카리아스….
제노가 대답하지 않자 심향이 계속해서 물었다.
“네? 네?? 빨리요!”
“너희 둘을 비교해서 내가 얻다 쓰니….”
“그러지 말고요!”
계속해서 답을 보채던 심향이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역시 실버가 더 좋아요? 저도 이제 실버처럼 당신이라고 부를까요?”
커헉, 콜록콜록. 제노는 순간 당황하여 마구 기침했다. 본인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도 심향은 무구한 얼굴로 그런 제노의 등을 두드릴 뿐이었다. 누나, 아니, 당신 괜찮아요? 치명적인 반존대는 덤이었다.
얘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제노가 심향을 끌고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팍, 맥없이 제노에게 끌려 들어온 심향이 좁은 골목의 벽으로 밀쳐졌다. 제노가 나름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심향을 노려보았다. 내려다보는 구도이기까지 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건 키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제노가 말했다.
“너,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때까지 계속해서 귀찮게 굴 거지.”
“… 네, 네! 그런데요?!”
제노의 바뀐 분위기에 심향은 배 째라- 하고 나왔다. 그래,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잠시 침묵했던 제노가 심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쨌든 키스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네, 네, 네?!”
심향이 긍정인지 의문인지 모를 말을 내놓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을 보아하니 여태 되지도 않는 배짱을 부렸던 모양이었다. 얘도 참, 애인 만들기는 힘들겠다.
“한 번 입술 붙였다 떼면 끝이야.”
헌팅캡을 벗은 제노가 심향에게로 다가갔다. 엇, 어억, 우억. 바보 같은 소리만 내던 심향이 순간 가까워진 거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는 심향을 대신해 제노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까치발을 디뎠다.
어떡하지, 내 심장 소리밖에 안 들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지금이라도 눈을 뜰까?
심향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뭐 어쩌라는 거지. 심향은 도저히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영원히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 제노는 혀를 살짝 내밀었다.
“우, 우와아아악!!!”
그 순간 큰 비명과 함께 제노를 밀어낸 심향이 골목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시 모자를 쓴 제노가 천천히 그의 뒤로 따라 나왔다.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얼굴을 한 심향이 제노를 돌아보았다. 양손으로 제 입을 가린 채, 숫제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게 누가 까불래. 제노가 뚱한 표정을 짓자 심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머- 뭐예요, 방금 그거…?”
“붙였던 거 떨어졌으니 한 번 끝이야.”
그렇게 말한 제노가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뭐라도 되겠지. 그런 그의 뒤로 심향이 비틀거리며 따라왔다.
*
“… 무슨 일 있었어?”
두 사람은 포켓몬 센터에서 실버와 다시 합류했다. 예상과 달리 제노는 태연했고, 심향은 그로부터 5m 정도 멀찍이 떨어진 상태였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모습에 실버가 물었다. 제노가 가볍게 답했다.
“내가 혼내줬어.”
“대체 어떻게 하면 애가 저 모양이 되는데?”
실버가 심향을 바라보았다. 심향은 센터의 구석에 박혀 벽을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부분이 제노를 미워하는 말인 것 같았다. 실버가 제노에게 속삭였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
“… 본인도 나를 당신이라고 부르겠다나 뭐라나.”
“뭣…!”
당황한 실버를 두고 제노가 혼잣말처럼 푸념했다. 이제 누가 누나라고 불러주냐. 그 말에 실버의 얼굴이 붉어졌다.
“누….”
누…? 제노가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마주하던 실버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곤 소리쳤다.
“누가 그렇게 불러준대?!”
“난 불러달라고 한 적 없는데- 아야!”
제노의 코를 가볍게 꼬집은 실버가 식식대며 떠나갔다. 심향은 여전히 센터의 벽을 파고들 기세였다.
이것들이 왜 쌍으로 난리야. 제노는 억울하게 실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제하시면 보관함에 소장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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