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두 갈래 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온다는 계획은 방문 앞에 서 있던 성호와 윤진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네 사람은 복도에서 서로를 확인하곤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모래범벅인 둘의 모습에 성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설마 습격당한 거니?!”
“아, 아뇨, 그게….”
요 앞에서 배틀했어요, 배틀.
제노가 그렇게 말하며 머쓱한 듯 제 머리를 긁적였다. 그제야 성호와 윤진의 기운이 풀어진다. 윤진이 짧게 타박했다. 난 또, 무슨 큰일 생긴 줄 알았잖니.
“이른 시간부터 시합이라, 기운이 넘쳐서 보기 좋네요.”
“아, 하하…. 그, 두 분께서 저희 방 앞에는 왜…?”
“같이 아침 먹으러 내려가자고 하려 했지. 그런데 아무리 노크해도 대답이 없어서 걱정했단다.”
성호의 입에서 직원을 불러 문을 따자는 얘기까지 나왔다니까. 넌 또 왜 그런 것까지 말해!
윤진의 갑작스러운 폭로에 성호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큼, 한번 헛기침을 한 그가 손에 든 포켓내비를 보이며 말했다.
“전화를 하고 싶어도 번호를 몰라서요.”
“아.”
사태의 전말을 깨달은 제노가 멍하니 서 있자 성호가 수줍게 제 포켓내비를 내밀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비언어적 표현, 번호를 교환하자는 뜻이었다.
더는 주소록에 저장된 사람을 늘리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포켓기어가 있는 것을 모두가 빤히 아는 마당에 주지 않는 것도 모양이 이상했다. 조금 밍기적거리던 제노가 결국 성호의 내비를 건네받고 버튼을 꾹꾹 눌렀다.
감사합니다! 저장된 번호를 확인한 그가 이번엔 타겟을 실버로 바꿨다.
두 사람의 번호를 모두 얻어낸 성호는 어쩐지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옆에서 윤진이 자신에게도 달라며 칭얼거렸기에 네 사람은 사이좋게 서로의 번호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성호와 윤진에게 기운이라도 빨린 것처럼 제노는 점점 시들해져 갔다. 그가 연락을 주고받는 꼴을 아는 실버만이 그 모습에 비웃음을 흘렸다.
윤진이 처음의 목적을 떠올리곤 손뼉을 한번 짝, 치며 말했다.
“맞다, 둘 다 배고프지 않니? 이 호텔 레스토랑의 식사가 무척 맛있단다.”
“아, 그, 그게, 얼른 씻고 나올게요!”
흙먼지투성이인 모습으로 갈 순 없었다. 제노가 허둥지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실버 또한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가다가 옷의 뒷덜미 부분을 잡는 손길에 멈춰 섰다. 그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윤진이 어딘가 무시무시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실버 군은 우리 방에서 씻으면 되니까 가서 갈아입을 옷만 가지고 나오렴.”
“….”
*
호텔의 1층에 위치한 카페의 테라스. 식사를 마치고 후식까지 야무지게 얻어먹은 제노가 제 몫의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외투는 배틀로 엉망이 된 것뿐이었기에 가벼운 차림을 하고 대신 모자를 눌러쓴 채다. 목에 걸린 은빛 펜던트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성호는 통화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어째서인지 윤진 또한 그를 따라 나갔다. 제노는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옆자리의 실버를 피해 시선을 야외로 돌렸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몇몇 아이들이 작은 포켓몬들과 뛰어놀고 있었고, 보호자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그마단과 아쿠아단이 일으킨 소동이 거짓말인 것처럼 날은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대뜸 실버가 입을 열었다.
“배틀에서 내가 이겼으니까 알려줘.”
“뭐?”
“굴뚝산에서 물어본 거 말이야.”
또 그린의 이야기다. 질린 표정을 지은 제노가 뚱하게 대꾸했다.
“난 진 적 없어.”
“한바이트가 쓰러졌잖아.”
“루카리오가 남아있거든!”
“그렇게 따지자면 내 마기라스도 아직 싸울 수 있어!”
아르릉,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본다.
그냥 무승부로 해. 의미 없는 기싸움을 먼저 끝낸 것은 제노였다. 그렇게 말하며 작게 한숨을 쉰 그가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 그 시선은 어딘가 더 먼 곳을 향해있었다. 제노가 목에 걸린, 오래된 펜던트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그린과는 가족 같은 사이야. 이제 만족해?”
“… 알려주는 거야?”
“ 안 알려주면 계속 귀찮게 굴 것 같아서.”
그렇긴 하지. 잠시 침묵한 실버가 계속해서 질문했다.
“가족이면 가족인 거지, 가족 같은 건 뭐야?”
“피가 안 섞였거든. 솔직히 그린도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는진 모르겠어.”
오 박사님께서 나를 거두어주신 것뿐이야, 정말 감사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빛을 받고 있는데도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실버는 문득 깊은 숲속에서 만난 어린 소녀를 떠올렸다. 말을 하는 걸 들어보면 제노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이상한 포켓몬의 힘인가. 오른손으로 턱을 괸 그가 말했다.
“뭐, 그럴 것 같았어. 그 상록체육관 관장도, 오 박사란 사람도 다 같은 목걸이를 하고 있더라고.”
“그럼 왜 물어본 거야.”
“그야,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으니까.”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야. 갤럭시 사에서 일한다는 것도 그렇고, 나는 전부 처음 듣는 말이었다고. 왜 남하고 제일 중요한 부분을 말 안 하려고 해?
그간 쌓인 것이 많았는지 실버의 잔소리가 우다다 쏟아졌다. 포크를 입에 문 채 듣고만 있던 제노가 웅얼거렸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아…?”
“안 괜찮아! 만약 그때 내가 로켓단과 한편이었다면 어쩔 뻔했어! 그런데도 말하지 않아도 된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치만 난 실버를 믿는걸.”
실버는 주인공의 라이벌, 이야기의 주연 중 한 명. 절대 악의 편일 리 없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 제노가 무구하게 눈을 깜빡이자 순식간에 얼굴을 붉힌 실버가 곧장 코를 꼬집어왔다.
“아야!”
“… 제법 기특한 말이라 봐주겠지만, 다른 사람은 안 돼. 이번에도 그래. 성호란 녀석의 뭘 믿고 냉큼 협조하겠다고 한 거야!”
네가 나한테 기특하다고 할 짬이냐. 제노가 눈썹을 한껏 모았다. 아니, 챔피언이 일탈을 저질러봤자 돌 모으기 정도 아니겠냐고.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챔피언으로서 말고, 한 사람으로서 신뢰할 가치가 있는지를 말하는 거야.”
“실버는 챔피언이 마음에 안 들어?”
“당연하지.”
“왜?”
그 질문에 잠시 어물거리던 실버가 시선을 조금 비끼며 중얼거렸다.
“… 그 자식,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불순해.”
- 널 보는 눈빛이 불순하다고, 눈빛이!
순간 떠오른 누군가의 말에 제노는 잠시 벙찔 수밖에 없었다. 큽, 억눌린 소리와 함께 부들부들 떨던 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 청량한 소리에 실버가 빨개진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웃지 마, 난 진지하다고!”
그리고 통화를 마친 성호가 먼 곳에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으로 은근슬쩍 다가온 것은 윤진이었다.
“… 애초에 넌 왜 따라온 거야?”
“그야 마이 베-스트 프렌드에게 따로 묻고 싶은 게 있어서지.”
음흉한 미소를 지은 그가 여전히 제노를 바라보고 있는 성호를 향해 물었다. 너, 제노 양을 엄청 신경 쓰고 있는 거 알아? 그 말에 성호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티 났어?”
“내가 너랑 함께 한 시간이 몇 년인데 그걸 모르겠니.”
“… 그렇구나.”
그가 머쓱한 듯 제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나 열렬한 시선을 당사자가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성호가 말했다.
“제노 씨와 팀을 이루어 태그배틀을 했어.”
“정말?”
“응. 두 번.”
성호가 배틀을 하는 순간의 제노의 모습을 떠올렸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얼굴, 환한 미소, 그리고 반짝이는 물빛 눈동자. 그렇게까지 배틀을 좋아하는 트레이너의 모습은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같이 들떠버릴 정도였다.
“무척 강했어. 솔직히, 싸우면 이길 수 있을지 잘 판단이 안 설 정도야.”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윤진이 놀란 눈을 했다. 과연, 그래서 이런 거구나. 그가 무언갈 납득했다. 강한 트레이너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강자를 끌어들이는 법이었다. 성호의 눈이 마치 어린 시절, 챔피언을 목표로 할 때처럼 빛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윤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성호, 난 정말 기뻐.”
“…? 뭐가?”
“평생 돌만 보고 살 줄 알았던 너에게 이런 봄날이 오다니…!”
손가락으로 눈물 닦는 시늉을 한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알겠니? 아름답게 반짝이는 이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는 법이란다.”
“…! 그렇구나, 내 마음에 든 돌은 다른 사람도 탐낸다는 뜻이지?”
“그, 뭐… 대충 이해했으면 됐어.”
요점은 이거야, 돌이든 사람이든 쟁취하고 싶다면 빠르게 수를 써야 해, 알겠니? 저 사이 좋은 둘을 보라고.
윤진이 여전히 웃고 있는 제노와, 그의 코를 꼬집은 실버를 가리켰다. 성호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바로-”
“그래, 그거야!”
“데봉 코퍼레이션으로 올 생각이 없는지 물어볼게.”
성호가 내린 결론에 윤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윤진도 모르고 성호는 저런 인재가 신오에 있는 것은 아깝다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말을 자르며 윤진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너 미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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