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한 갈래 길
“으으, 너무 창피해요. 현 챔피언 앞에서 포켓몬 마스터가 되겠다느니 하는 말을 떠들었다니….”
“부끄러워할 이유 있나? 나는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만.”
“그래도요….”
양 뺨을 붉히며 제 머리를 부여잡는 심향에게 제노가 새 젓가락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심향이 작게 인사하며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잠시 말없이 밥만 퍼먹던 심향은 금세 기운을 차리곤 다시 제노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간간이 실버가 끼어들고, 제노의 답에 목호가 살을 붙이며 식사자리는 길게 이어졌다. 어느새 대부분의 접시가 바닥을 보였다. 제노는 오늘 너무 많이 떠든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 문득 지금 이걸 고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네 사람이 먹었으니 가격이 얼마나 나왔을까…? 물론 제노가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물질적인 부분에서만큼은 든든한 뒷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에게 이렇게 호화로운 식사를 먹인 건 오랜만이라, 너무 사치를 부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룸에서 나오며 제노가 조심스레 목호에게 얘기를 꺼냈다.
“저, 목호 씨, 계산은…”
“응? 이미 내가 했다만?”
이럴 수가. 제노는 딱 벌어진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격하게 감동받았음을 표현하는 제노의 표정에 목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너에게 밥을 얻어먹을 리가 없지 않나.”
“저도 어엿한 성인이고, 돈도 제법 버는데요….”
“그래, 그래.”
목호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답하며 제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아이 취급을 받은 제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조금 비죽, 내민 그가 모자를 푹 눌러썼다. 목호는 다시 웃을 뿐이었다.
네 사람은 포켓몬 센터로 돌아왔다. 이미 하늘은 캄캄해져 있었다. 심향이 센터의 입구에서 나머지 셋을 돌아보았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바로 검은먹시티로 가시는 거죠?”
“당연하지. 단숨에 라이징배지를 얻고 너보다 빨리 리그에 도전할 거다.”
“너한테 물은 거 아니거든?”
아르르릉. 심향과 실버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잘 먹여놨더니 기운이 넘치는구나. 작게 한숨을 내쉰 제노가 말했다.
“보송송의 치료가 끝나면 황토마을로 갈 거지?”
“네. 공중날기로 거기까지 간 다음 곧장 검은먹시티로 향할 거예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충분히 쉰 다음 움직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심향이 그렇게 답하며 장난스럽게 경례했다. 어느새 다시 망토를 착용한 목호가 망나뇽을 툭툭 두드렸다.
“지금 바로 출발하면 너무 늦기 전에 검은먹시티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야간 비행은 위험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녀석은 밤눈이 밝거든.”
“아무렴 목호 씨의 망나뇽인데 걱정은요.”
제노의 말에 망나뇽이 으쓱거렸다. 귀엽기는. 한번 타봤다고 어느새 익숙해진 망나뇽의 등에 제노가 올라타자, 망나뇽의 날개가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공중을 날아올랐다.
심향은 세 사람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질 때까지 하늘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완전히 혼자가 되자 그제야 심향이 팔을 내렸다. 모자를 한번 고쳐 쓴 그가 힘찬 발걸음으로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나도 지지 않게 열심히 하는 거야! 눈에 강한 의지가 비쳤다.
*
목호와는 검은먹시티의 센터 앞에서 헤어졌다. 의료시설의 역할도 하고 있는 포켓몬 센터는 24시간 문을 열어두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혹시나 남는 방이 없으면 어쩌지 하고 고민하였으나, 검은먹시티가 워낙 조용한 마을이니만큼 빈방이 많다는 답이 돌아왔다.
간호순에게 감사 인사를 한 제노와 실버가 각자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갈라졌다. 그리고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복도에서 누군가 제노의 앞을 막아섰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으시군요? 애송이들 뒤치다꺼리에, 이제는 챔피언과 영웅 놀이라니.”
새파란 머리에 날카로운 눈을 한 남자.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새턴.”
“어떻습니까? 당신 흉내를 내보았는데. 역시 정체를 숨기는 데엔 이만한 게 없는 것 같군요.”
새턴이 제노의 복장을 비꼬며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대체 어떻게 세팅한 건지, 모자를 쓰고 있었음에도 세운 머리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긴 무슨 일이지?”
“부탁하신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태홍 님께서 이건 덤이라고 하시더군요.”
예리한손톱과 함께 상자 하나가 내밀어졌다. 그것을 받아든 제노가 내용물을 한번 확인한 뒤, 다시 뚜껑을 덮었다.
“마침 필요한 참이었는데, 잘됐네. 태홍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태홍 ’님’입니다.”
어쩌라고…. 제노는 새턴의 정정을 무시하고 물었다.
“그래서, 고작 이걸 가져다주려고 간부님께서 직접 오신 건가?”
“제 눈으로 당신의 행동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 혹시 너희 회사 한가하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시죠!”
새턴이 큰소리로 답했다. 다행히 복도에 그의 외침을 들을 사람은 제노를 빼곤 아무도 없었다. 그가 건방진 표정으로 제노를 내려다보았다. 인상을 찌푸리니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에 힘이 더해져 제법 위협적이었다. 앙칼지기는.
“역시 전 당신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태홍 님은 당신이 멋대로 행동하는 걸 내버려두는 거죠?”
“….”
태홍한테 물어봐, 인마.
제노는 새턴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할 뿐이었다. 새턴의 날카로운 시선이 뒤통수를 따끔따끔 찔렀다. 문을 열기 직전, 제노가 그를 돌아보았다.
“용건은 끝났지?”
“하나 더 있습니다. … 전에 말씀하셨던 두 조직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
“… 언제나 저희가 당신을 지켜본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 그래.”
제노의 성의 없는 대답에 새턴이 이를 뿌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대화한 걸로도 피로가 몰려왔다. 방으로 들어선 제노는 문을 닫고, 그것에 기대어 섰다. 잠시 기다리자 새턴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후우….”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제노는 신발장의 센서 등이 꺼지고 나서도 한참을 미동도 없이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방안의 윤곽을 희미하게 훑었다. 공허하게 눈을 몇 번 깜빡인다.
이럴 때마다 정말, 다 그만두고 싶었다.
다 그만두… 만두… ….
내일 점심은 만두 먹어야지. 끙차, 몸을 일으킨 제노가 어기적어기적 침대로 걸어갔다. 벗은 옷을 대충 방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그대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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